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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위대한 왕을 기리고자 거대한 비를 세우다

414년(장수왕 2)

광개토대왕릉비 대표 이미지

광개토대왕릉비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고구려(高句麗)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훈적을 담고 있는 돌비석[石碑]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지역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주로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릉비 등으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불린다. 고구려사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 최고(最高)의 금석문으로 평가받는다.

2 광개토대왕릉비의 형태

광개토대왕릉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 석재를 사각형의 기둥 형태로 다듬은 비석이다. 각 면의 너비나 표면의 굴곡이 고르지 않아 다듬은 돌이라기보다 자연석의 느낌이 강하다. 높이는 6.39m에 이르며 비의 1면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부에는 길이 3.35m, 너비 2.7m, 두께 0.2m 가량의 화강암 기단을 설치하고 홈을 파 비신을 세웠다. 기단은 세 부분으로 깨진 상태이다.

비의 몸 사면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자 간격을 균등하게 새기기 위해 종횡으로 바둑판처럼 가는 선을 그어 공간을 구획하였다.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 총 44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신의 형태에 따라 2면의 마지막 두 행과 4면의 첫 번째 행을 제외하고 매 행 41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전체 글자수는 1,775자로 여겨지나 비석에 손상이 가 150여 자 가량은 판독되지 않는다.

서체(書體)는 대부분 한대(漢代) 예서(隷書)이고, 글자의 세로 길이는 9~12cm, 가로 너비는 10~12cm이다. 다만 글자의 모양에 따라 획수가 복잡한 경우에는 세로가 긴 장방형(長方形)을 띠기도 한다.

3 비의 건립과 망각, 그리고 재발견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이 사망한 2년 후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부왕의 능을 조성하며 건립하였다. 비가 세워진 곳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지역으로, 평양으로의 천도 이후에도 정치․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기능하였으나,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방치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조선 세종(世宗)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루었던 업적들을 열거하며 찬송하고 있는데, 그중 1369년(공민왕 18) 압록강을 넘어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했던 일을 다룬 제39장의 압강(鴨江) 주해(註解) 부분에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 강 건너에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는 금(金) 황제의 성(城)이고 북쪽 7리 떨어진 곳에는 비(碑)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록을 남긴 이들은 정작 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평안도 강계도호부 산천조에서는 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금나라 황제묘(皇帝墓)와 황성평(皇城平)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황제묘는 곧 지금의 장군총(將軍塚)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이 이른 시기부터 집안 지역 경관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역시 적어도 조선 초에는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곳을 철저하게 여진족의 영역으로 여겼으므로, 남아 있는 유적이나 비 또한 여진족의 것으로만 여겼을 뿐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조사하거나 비문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17세기 이후 청(淸)의 봉금정책(封禁政策)으로 이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비의 존재는 다시 한 번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재발견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이 지역에 청의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면서이다. 1877년(고종 14) 회인현 지현(知縣)으로 부임한 장월(章樾)의 서계(書啓)를 맡은 관월산(關月山)이 민간을 방문하다가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비 전체가 이끼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곳만 부분적으로 탁본을 하였다. 관월산이 자신이 뜬 탁본을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소개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끼에 덮여 있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비의 탁본을 뜨기 곤란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지현의 명을 받은 마을 사람 초천복(初天福)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이끼를 제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터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였다.

4 탁본의 제작과 비문 연구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알려지며 탁본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형태와 재질 상 탁본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뜨고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해 빈 자리에 먹을 칠하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 많이 만들어졌다. 만주에 파견된 일본 육군 참모 본부의 사코오 가게아키(酒勾景信)를 통해 1883년 처음 일본에 입수된 탁본도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판단하여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속적으로 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인근에 거주하며 탁본을 팔던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 부자는 작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1902년 무렵부터 비 표면에 석회를 바르고 일부 글자를 임의로 수정하기도 하였다. 비에 석회를 바르면서 탁본의 글자가 보다 선명해졌기 때문에 한때 이것을 더 오래되고 좋은 탁본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왜곡이 가해진 것이었다.

‘석회 탁본’의 존재로 인해 각국 학자들이 연구에 활용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들은 일부 글자가 누락되거나 다르게 보이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이러한 석회 탁본의 문제점은 1959년 일본의 미즈타니 데지로(水谷悌二郞)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석회 탁본의 존재는 급기야 비문 위조 논란을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비문 위조설은 1972년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진희는 20세기 초 일본 육군 참모부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일부 글자에 대한 석회 도포 작전을 수행하였고, 의도적으로 비문 내용을 위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비문 위조설은 국제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으나 이는 1984년 중국 학자 왕젠쥔(王健君)의 연구 발표를 통해 해명되었다. 집안 현지에서 비를 실측하고 관련 기록을 검토하며 연구를 진행한 왕젠쥔은 현지인들과의 인터뷰와 문헌 기록에 근거하여 비에 석회가 칠해져 일부 글자가 인위적으로 수정된 것은 일본 육군 참모부와 무관하며, 탁본을 팔던 초씨 부자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지 조사에 근거한 왕젠쥔의 발표를 통해 비문 위조설 논란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논란은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에 있어서 석회를 바르기 전에 만들어진 ‘원석 탁본’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석 탁본은 1880년대 후반에 탁본 전문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도서관 소장본들과 타이완(臺灣) 후쓰니안(傅斯年) 도서관 소장본, 일본의 미즈타니 데지로본과 가네코 오테이(金子鷗亭)본 등이 있으며, 한국에는 임창순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혜정박물관 소장본이 있다.

5 비문의 내용과 쟁점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면 1행부터 6행까지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의 고구려 건국 전승과 고구려 왕계에 대한 약력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로, 비의 주인공인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에 따라 순서대로 서술한 부분이다. 세 번째는 3면 8행부터 4면 9행까지로, 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출신지와 차출 숫자 목록 및 수묘 제도의 정비 과정, 위반 시 처벌에 대한 규정을 담은 부분이다.

이 중 발견 초기부터 관심을 모았던 것은 광개토왕의 훈적이 서술되어 있는 두 번째 부분이다. 특히 영락 5년조 기사와 영락 6년조 사이에 위치한 ‘신묘년조’의 문장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처음 일본인 학자들은 신묘년조의 문장을 “백잔(百殘)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임나(任那)], 신라를 무찔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이 문장이야말로 고대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복속시켰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30년대 정인보(鄭寅普)가 한문 문장의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함으로써 전혀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바다를 건넌 주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만든 당사자가 고구려이므로,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에게 유리한 내용이어야 하고, 행위의 주체 역시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정인보의 시각은 이후 주로 북한 학계에 계승되었다.

신묘년조 문장은 앞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비문 변조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어떤 글자는 여전히 학자 간 판독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보거나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간주하기보다는 당대 고구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나 수사적 측면에 주목하여 이해하려는 추세이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무찌르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문 자체를 문제로 삼기보다는 이 문장이 비문의 전체 맥락에서 수행하는 역할, 즉 해당 문장이 담당하는 명분적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위대한 고구려 태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천하에 왜(倭)라는 이질적 존재가 침투해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군사적 응징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광개토왕의 무훈(武勳) 기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광개토대왕릉비 연구는 이제 수묘인연호에 대한 연구로 확장된 상태이다. 광개토왕비에는 국연(國烟) 30가, 간연(看烟) 300가로 이루어진 수묘인들이 출신지 50곳의 이름과 지역별 차출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수묘인 집단은 동시에 110가의 구민(舊民)과 220가의 신래한예(新來韓穢)로 구분되어 있기도 하다. 구민은 원래부터 수묘역을 수행해 오던 이들을 가리키는데, 광개토왕은 이들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정복 활동을 통해 새롭게 약취해온 한족(韓族)과 예족(穢族)들에게 수묘를 시키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수묘제의 운영 방식과 수묘인들의 실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구려의 법과 제도, 신분제, 대민 지배 양식 등에 대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2012년 집안 지역에서 수묘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가 새로 발견되면서 해당 분야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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