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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國內城]

고구려의 왕성

미상

국내성 대표 이미지

지안 국내성(서북 모서리)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국내성(國內城)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의 왕성 유적이다. 산성자산성(환도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중기 도읍을 구성하였다. 국내성은 평면형태 방형의 석축 평지성으로, 전체 둘레는 2.74km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노령산맥이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 국내성은 고구려가 졸본(현 환런)에서 국내(현 지안)로 도읍을 옮기면서 기존에 있던 한대(漢代) 방형 토성을 활용하다가 축성기사가 있는 342년에 석축 성벽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의 성벽은 4세기 전반기에 처음 축조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에 자리한 평지 왕성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4년에는 고구려의 다른 왕성·왕릉 및 귀족무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 국내성의 고고학 조사 내용

국내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4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보고에 의하면, 국내성은 통구성(通溝城)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성벽의 폭은 9m, 높이는 6m 가량이었고,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雉) 42개가, 북벽 바깥쪽에는 해자가 남아 있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할 수 있었던 것은 한동안 청(淸) 왕조가 자신들의 발흥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주 지역에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봉금(封禁)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집안현성(輯安縣城)이었던 국내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상당한 변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시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동벽과 남벽이 없어지게 되었고, 1960년대에는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성벽 또한 급격히 훼손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실시한 정밀조사에서는 성벽 10곳을 절개하였는데, 석축 성벽 아래에 토루가 있다는 잘못된 조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국내 천도 시기 논의와 맞물려 국내성의 축조 및 활용 시기에 대한 논란을 가져왔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중국 정부가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국내성의 내부 건물지와 성벽(북벽과 서벽)을 대대적으로 발굴조사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내성 일대의 환경이 전체적으로 정비되었으며, 북벽과 서벽의 무너진 성벽 일부가 복원되었다. 특히 서벽은 통구하 강변을 따라 가득 들어차 있던 민가가 모두 정리되면서 전체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되었다. 2004년 국내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도 중국 정부는 2006년부터 남벽과 동벽의 일부 구간에 대한 기초 조사와 함께 일정 높이로 성벽을 복원하였다. 현재는 동벽 일부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 모두 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국내성의 성벽은 우선 터파기를 하고 사질 점토를 층층이 쌓아 올려 기초부를 튼튼히 한 다음 성벽의 양쪽 바깥면은 석축으로, 중심부는 흙으로 채워 넣는 일종의 토심석축공법(土芯石築工法)으로 쌓았다. 특히 적을 대하는 바깥쪽 성벽은 돌로 두텁게 쌓되, 성벽의 아래쪽은 들여쌓기 하였다.

성문은 북문 4개, 동문과 남문 각각 2개, 서문 1개가 발견되었다. 북벽의 중앙과 서쪽 문지에는 성문을 공략하고 있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문 양쪽에 적대(치)가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북벽 서쪽 문지의 경우 문길의 길이는 13m, 너비는 5.6m이다. 어긋문 구조로 된 서문지는 두 성벽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어긋나 마치 11자와 같은 형태로, 한정된 인원만이 성벽을 우회하여 성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옹성과 비슷한 방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성벽에는 치와 각루의 기초가 남아 있으며, 부근에서 고구려 기와가 수습되는 것을 볼 때 이들 시설에는 기와지붕을 한 누각이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성 내부에서는 거의 전 구역에서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최하층에서는 4세기 초중반에 유행한 권운문와당이, 국내성 중앙부에서는 동진(東晋)에서 제작된 청자도 다수 출토되었다. 그리고 성벽에 대한 근래 발굴조사 결과 또한 현재의 석축 성벽의 축조 시기는 4세기 초를 넘지 않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국내성이 석축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구려 왕성으로 자리 잡은 시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환도성을 수리하여 지붕을 새로 이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는 기록이 있는 342년(고국원왕 12)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국내성의 중앙부에 위치하였고, 이곳을 기준으로 각 방위별로 행정구역을 설정하여 귀족 세력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내성에는 연화문와당과 수면문와당 등을 비롯한 각종 와당과 고구려 중기 및 후기의 유물이 모두 출토되므로, 평양 천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국내성의 축조 시기를 둘러싼 여러 논쟁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인 국내는 국내성이 위치한 지안 지역으로, 이곳에는 환도산성 외에도 태왕릉과 장군총, 광개토왕릉비 등이 분포한다. 지안 일대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만주의 소강남(小江南)이라고 불릴 정도로 따뜻하고 강수량도 풍부하며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많아 농사짓기에 알맞다. 또한 북쪽에는 노령산맥에서 뻗어내린 용산, 우산, 철성산 등이 지안의 분지 지형을 감싸며 천혜의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른다. 내륙 교통로 외에도 압록강 수로를 이용한 물자 수송과 통행이 가능하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22년(기원후 3)에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고 하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건안(建安) 연간(196~219년)에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라고 한다. 학계에서 국내 도읍이 현재의 지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으나,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 시점에 대해서는 유리왕대(기원전 19~기원후 18년), 태조왕대(53~146년), 신대왕대(165~179년), 산상왕대(192~227년)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지안 지역에 있는 성곽 유적으로는 국내성과 산성자산성(환도산성) 밖에 없고, 1970년대 중반 성벽 발굴조사에서 석축 성벽 아래에서 토성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로 국내성은 국내 천도 당시부터 활용된 것으로 한동안 잘못 알려졌다. 당시 석축 성벽 아래에서 폭 7~8m, 잔고 1.7~2m 규모의 궁형(弓形)의 토축 다짐층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부에서 출토된 마제 석부와 석도, 환상석기 등을 근거로 고구려 건국 이전에 축조된 한(漢)의 고구려현성(高句麗縣城)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 국내성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시행되면서, 과거 보고되었던 한대 토루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으면서 과거 조사 결과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해당 토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재검토한 결과 청동기시대의 여러 석기와 함께 고구려 전기에 해당하는 심발형토기가 발견되어, 국내성은 일단 한(漢)이 아닌 고구려가 축조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남한 지역의 고구려 성곽 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 성과에 비추어볼 때, 석축 성벽 아래의 토층은 성벽을 쌓아 올리는데 있어 기초부를 튼튼히 하기 위한 점토다짐층을 당시 토성의 흔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석축 성벽 안쪽의 토축부에서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토기가 출토되었고, 또 성 내부의 최하층에서는 4세기대 초에 해당하는 간지(干支)가 있는 권운문와당과 동진대 청자가 출토됨에 따라 국내성의 축조는 국내 천도 당시가 아니라 문헌에 기록된 대로 4세기대 전반기임이 분명하다. 이에 최근에는 국내 도성의 초창기 평지 거점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4 평양 천도 이후의 국내성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성은 늦어도 4세기 전반기부터는 고구려의 왕성으로 활용되었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이후 국내성과 한성(漢城)을 별도(別都)로 운영하였으며, 도성과 함께 3경(京)이라 불렀다. 이로 인해 지안 일대는 비록 도성의 지위는 잃었으나 고구려에게 있어 여전히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실제로 고구려 후기에 국내성 외곽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많은 기와 건축물이 새롭게 들어섰음이 확인된다. 특히 6세기 중반경에는 산성자산성인 환도성에 행궁(行宮)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내성에도 고구려 후기에 해당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국내성 역시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조망이 좋고 압록강 수로를 이용하기에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기와 건축물들이 지속적으로 추가되는 것을 보면, 국내성은 과거 도성이었던 시기보다는 그 선호도가 낮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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