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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이곳에 잠들다

199년

김수로왕릉 대표 이미지

김해 수로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7월 28일 수로왕릉에서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은 199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조성 이후 수로왕릉은 금관가야의 멸망, 몽골의 침략, 왕릉에 대한 관리 소홀 등의 문제로 황폐화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선조(宣祖) 이후 왕릉에 대한 지속적인 수리와 정비가 이루어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2 신라·고려시대의 수로왕릉

김해 수로왕릉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무덤이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서상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었다. 무덤의 높이는 약 5m의 원형 봉토이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수로왕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지리지(地理志), 읍지(邑誌) 그리고 조선 후기 이래 릉(陵) 관리자들의 기록인 『숭선전지(崇善殿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수로왕릉에 대한 사실을 가장 처음 전한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의 기록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왕후인 허왕후(許皇后)가 죽은 지 25년이 지난 199년(獻帝 立安 四年) 기묘(己卯) 3월 23일에 15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대궐의 동북쪽에 높이 한 길, 둘레가 300보(步)인 빈궁(殯宮)을 세웠다가 후에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묘(首露王墓)라고 이름하였으며, 아들인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매년 정월 3일·7일, 5월 5일, 8월 5일·15일에 맞춰 이 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위의 기록에서 대궐의 동북쪽에 만들어 세웠다는 빈궁의 성격은 분명치 않다. 원래 빈궁이란 시체를 입관한 후 그 관을 발인할 때까지 안치하는 궁전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그곳에서 어디인가 다른 곳으로 옮겨서 장사지냈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무덤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 높이가 한 길(8자=2.4m)이라는 것으로 보아 사당이나 빈소와 같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봉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서기 2세기경의 이 지역 분묘에는 그처럼 높은 봉분을 가진 고총고분(古冢古墳)이 없음으로, 이 문장은 후대의 어느 시기에 무덤을 성대하게 고치거나 크게 성토한 이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둘레가 300보라면 지름이 170m 정도가 되는데 이것은 봉분으로서는 지나치게 크다. 이는 묘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로왕묘에 대한 제사는 거등왕이 즉위한 이후 가야국이 멸망할 때까지 1년에 5회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되어있다. 중국에서도 1년에 5제를 지냈으나 그 시기가 다르며, 신라 하대의 오묘 제사일인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과 대동소이하되 7월 상순이 빠졌을 뿐이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의 제사에도 정월, 단오, 추석과 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고유의 제사 습속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금관가야에서 행해지던 수로왕릉에 대한 제사는 금관가야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구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신라 문무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 이 묘에 제사 지내는 예를 빠뜨리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신라 문무왕(文武王) 대에 이르러 수로왕릉 제사와 관련하여 변화가 생겼다. 문무왕은 조서를 내려 거의 폐허처럼 되어 사용하지 못하던 수로왕릉에 대하여 묘제(墓制)를 확장하여 크게 성토(盛土)하고 사당을 보수하게 명하였다. 또한 가락국의 왕손들에게 끊어졌던 수로왕릉 제사를 다시 이어가게 하고 수로왕릉 주변의 땅 30경(頃)을 왕위전(王位田)으로 지급하였다. 이는 문무왕이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으로 수로왕의 12대손이자,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의 증손(曾孫)인 어머니 문명왕후(文明王后)를 위하여 배려해준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수로왕릉 제사는 수로왕의 직계 후손이면서 김해 지방의 촌주인 급간(級干) 갱세(賡世)가 주제하였다. 수로왕릉 제사는 그 후로도 이어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수로왕릉은 다시 변화를 맞이하였다. 991년(고려 성종 101) 김해부 양전사(量田使)에 의하여 신라 문무왕이 내린 수로왕릉의 왕위전 30경 중 15결(結)이 국가로 반납되었다. 이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유교를 장려하던 당시의 고려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지방 세력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던 고려 정부의 입장에서 수로왕릉을 중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3 조선시대 수로왕릉에 대한 정비작업

조선 세종(世宗) 대에 수로왕릉의 상태에 대해서 관찰사가 보고한 장계(狀啓)가 있다. 경상도관찰사 이선(李宣)의 장계 내용에 따르면 수로왕릉은 길옆의 논 가운데에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이 방치되어 그 위로 길이 나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소나 말을 놓아 기르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였다면 고려 성종 대 이래 반으로 줄었던 왕위전 15결도 이미 상실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세종 대 이르러 수로왕릉의 보존 상태가 이렇게 좋지 않았던 것은 무신집권기 말에 몇 차례에 걸친 몽골의 대규모 침략이나 고려 말기 왜구의 습격 등으로 말미암아 김해지역에 살던 직계 후손들이 떠나거나 그 세력이 현저하게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수로왕릉의 묘역 내에는 사당이나 담장 등의 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 이선은 수로왕릉을 정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선의 요청에 대하여 예조(禮曹)에서는 표석이나 수묘호도 지정하지 않고 사방 30보의 경작 금지 조치만을 결정하였다. 이 조치로 인하여 일단 수로왕릉의 보존에는 큰 문제가 없게 되었으며 조선에서 수로왕릉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 성종 대에는 예조에서 교정청(校正廳)에 단자(單子)를 내려 『대전(大典)』에 실리지 않은 조목을 열거하여, 신라시조(新羅始祖)와 수로왕, 고려태조(高麗太祖) 이하 4위(位)에 능실(陵室)에서는 전시(田柴)를 금지하게 하였다. 한편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의 지리지와 읍지와 같은 인문 지리서를 집대성한 것인데, 여기에는 매해 봄, 가을로 부(府) 안의 늙은이(府老)들이 함께 모여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과 그 능을 납릉(納陵)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는 유형원(柳馨遠)이 조선 효종(孝宗) 대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해지역에 관한 체제나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거의 답습하였다. 새로운 내용으로는 수로왕릉과 허왕후의 묘를 1580년(선조 131)에 관찰사 허엽(許曄)이 수리하였고 1592년(선조 25)에 왜적에게 도굴되었는데 이를 향인(鄕人)들이 함께 봉축(封築)하였으며 그 후 관찰사 허적(許積)이 비를 세우고 허목(許穆)이 그 음기를 찬술하였다는 내용이 추가되어있다. 수로왕릉에 대한 도굴은 1614년(광해군 61) 이수광(李睟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전하고 있다. 『지봉유설』에는 ‘왜적들이 수로왕릉을 파헤쳤을 때 구덩이 안은 매우 넓었고 두개골은 구리 대야만큼 컸으며 관 바깥에 두 명의 미인이 있어서 안색이 살아있는 듯하였으나 구덩이 바깥에 내놓고 해를 쪼이니 곧 녹아 없어졌는데 이는 아마 순장한 사람인 듯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처럼 수로왕릉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적들에 의해 도굴과 파괴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1603년(선조 36)에는 선조가 전대의 왕(前代諸王)의 능묘로서 난을 거치면서 훼손된 것을 각 고을에서 수리하게 명을 내렸는데, 그때 수로왕릉이 조정의 보호대상 능묘로 지정되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는 1765년(영조 41)에 편찬된 전국지리지로서 전국의 읍지들을 수합하여 편집한 관찬 지리지인데, 여기서도 1746년(영조 22)에 조정의 명령으로 수로왕릉을 둘러싸고 사방 100보에 돌을 세워 표시하였다는 내용과 1748년(영조 24)에 왕릉의 모서리가 함몰되어 봉분을 다시 할 것을 아뢰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은 영조가 1746년에 묘역을 사방 100보까지 확대 조성한 것을 보여준다. 영조에 이어 정조도 수로왕릉의 보호를 장려하였다. 정조는 수로왕릉의 능비를 고쳐 세우는데 향과 축문(祝文)을 내려주기를 원한다는 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이를 기꺼이 허락하였다.

4 수로왕릉을 통해 본 허왕후의 전설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는 남방식 불탑과 한 쌍의 잉어, 두 개의 양궁(洋弓)과 두 마리의 코끼리 및 연꽃 봉오리가 그려져 있다. 여기서 한 쌍의 잉어(雙魚文)는 아요디아국 전승의 신비한 물고기를 상징하고 두 개의 양궁은 태양신의 화신이며 활의 명수인 라아마를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나아가 허왕후 일행이 쌍어문을 국가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을 거쳐 김해의 금관가야로 이주해 온 것으로 파악하였다.

먼저 쌍어문은 현재 수로왕릉의 안쪽 문인 납릉 정문 현판 좌우의 공포(栱包)와 조선 후기 역대 왕들이 내린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각 문 위의 공포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1792년(정조 16)까지 그러한 건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미 쌍어문은 금관가야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을 가능성은 없는 셈이다. 쌍어문은 그 건물들의 건립과 함께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792년 이후 왕명에 의하여 납릉에 배치된 능감(陵監)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에 따르면 1793년(정조 17)부터 1798년(정조 22) 사이에 김씨, 허씨 문중에서 수로왕릉과 관련된 전각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때 제각(祭閣)만 그 자리에 두고 보수하였으며, 신주(神廚)와 제실(齊室)은 자리를 이동하여 새로 지었으며 나머지 건물은 새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또한 1824년(순조 24)에 제각 동쪽에 안향각을 신축하였고, 1843년(헌종 9)에 내신루(內神樓)를 헐고 그 자리에 단층 건물인 외삼문(外三門)을 세워 납릉 정문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대에 새겨진 것이고, 납릉 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대의 신축 때나 헌종대에 새겨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수로왕릉의 쌍어문을 근거로 만들어진 허왕후의 전설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없으며, 조선 후기를 지나 어느 시점에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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