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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

교역의 중심, 금관가야의 왕묘역

미상

김해 대성동 고분군 대표 이미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고(古) 김해만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며 ‘애구지’라고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봉황토성과 함께 금관가야의 중심이자 왕묘역을 구축한 곳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수계를 이용한 내륙 지역과의 교류와 바닷길을 통한 대외 교류를 기반으로 세력 확장과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2세기 전후에 내륙 진례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김해 양동리 고분 세력과 더불어 3세기 후반에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김해 대성동 집단은 5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고구려 남정에 휘말리면서 점차 힘을 상실하였다.

고분군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부터 목관묘와 목곽묘, 옹관묘까지 다양한 무덤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금관가야의 중요 유물인 금동관 편뿐만 아니라 중국·일본과 관련 있는 물품도 출토되었다. 중국계 유물은 청동그릇, 금박구슬, 금동제허리띠와 같은 중원계유물과 청동솥(銅鍑), 금동 및 청동제말갖춤과 같은 북방계유물로 나뉜다. 또 바람개비모양동기(巴形銅器), 원통모양동기(筒形銅器)와 같은 왜(일본)계 유물과 서역계 유물인 파란색의 유리편(Romanglass)의 존재는 중국 동진(東晉)과의 관계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당시 정세는 중국 동북지역과 금관가야, 일본 긴키 지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적 제341호이며 고분 옆에 있는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위치하며 이와 함께 금관가야의 왕묘역이 잘 관리되고 있다.

2 금관가야 세력의 이동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학술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유적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구간 외에도 북쪽의 주차장 부지와 구지로 구간, 남동쪽의 ‘가야의 숲’ 구간(현 수릉원)까지를 대성동고분군으로 본다. 구릉은 길이 약 280m, 너비 50m, 높이 22.6m 정도의 독립구릉이며 이 구릉의 중심으로 주변의 평지까지 포함한다. 발굴조사로 알려진 무덤은 고인돌(支石墓), 옹관묘, 목관묘, 목곽묘, 수혈식석곽묘, 석실묘 등으로 무덤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목관묘는 구릉 주변의 낮은 곳이나 평지에 위치하며 대형목곽묘는 구릉의 능선부, 중소형급은 구릉의 사면과 평지에 조성되었다.

금관가야의 정치·경제·문화·교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한 김해 대성동 고분군 집단은 구릉의 북쪽에서 높은 남동쪽으로 무덤을 조성하였다. 봉황토성과 함께 금관가야의 중심세력이 된 대성동고분을 형성한 세력은 지리적 이점 외에도 주요 수출품이었던 철제품 및 철 생산지로서의 역할, 이를 원활하게 유통·관리할 수 있는 수계의 활용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이 김해 대성동 집단이 국제 교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금관가야의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주변 세력을 통합·관리하는 체제를 만들게 되었다고 본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3세기 후반에 왕묘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대형 목곽묘(木槨墓)에서 확인되는 초월적인 권력 집단의 형체는 화려한 부장품과 희귀한 외래 문물, 순장으로 나타난다. 최초의 왕묘로 여겨지는 대성동 29호분은 3세기 후엽에 등장한다. 청동솥, 무덤 바닥에 열지어 배치된 판상철부형 철정(鐵鋌), 청동칼 끝 장식(靑銅鞘尾金具)이 부착된 대도(大刀)를 비롯하여 다량의 화살촉과 토기들의 정연한 배치, 금동관과 순장의 흔적은 왕의 무덤을 만들고 의례를 행하는 일련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최상위 계층의 화려한 부장은 생전의 권력과 부를 저승으로까지 안고 가겠다는 의지와 그것을 그대로 계승 받고자 하는 남은 이들의 바람이었다.

이러한 금관가야의 왕묘역이 양동리 고분군에서 대성동고분으로 이동하여 조성된다는 현상은 당시 김해 지역 내 사회 변동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즉 일부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의 이주로 보기도 하지만 대성동 고분군 주변에 있는 목관묘(가야의 숲)에서 부채를 비롯한 다양한 칠제품(漆製品)과 청동거울, 칠초철검(옻칠한 칼집과 철검) 등이 부장된 최상위 계층의 유력 수장묘가 연계적으로 조성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어 자체적인 성장의 결과로 파악한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가 되면 더 화려하고 풍부해진다. 무덤 속에 부장품을 더 많이 넣기 위한 무덤의 확장성이 엿보이게 된다. 즉 피장자가 안치되는 무덤 구덩이(主槨) 곁에 또 다른 구덩이(副槨)를 파고 그 안에 다량의 부장품만을 넣는 무덤의 형태는 대성동 13호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하나의 구덩이를 파고 한쪽 곁에 주곽과 부곽을 구분하는 격벽 시설을 만드는 경주지역의 목곽묘(同穴主副槨式木槨墓)와 비교된다. 주곽과 부곽의 구덩이를 따로 조성하는 목곽묘(異穴主副槨式木槨墓)는 김해 대성동고분 뿐만 아니라 김해 양동리·칠산동·예안리고분과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부곽의 형태가 주곽과 같은 방향이 아닌 가로형인 경우도 있고 같은 구덩이 내에 부곽만 더 깊이 파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목곽 내부에는 피장자가 안치되는 상자모양의 판재 목관이 따로 마련된다. 13호분의 주곽에는 피장자의 좌우와 발치 부근에 3명의 순장자가 있었고 일본(왜)에서 생산된 석제품과 바람개비모양 청동기도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최상위급의 대형 목곽묘에서 확인되는 순장은 주로 주곽 내에 이루어지지만 1호·88호·91호 목곽묘처럼 충전토(무덤 구덩이과 목곽 사이를 넣는 흙)에서 순장된 인골이 남아있기도 한다.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90호·88호·91호묘가 있다. 대성동 90호분은 도굴 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연호문경(連弧文鏡; 중국 전국시대 거울의 일종), 전연(前燕)의 청동그릇과 마구, 일본(왜)의 원통모양 동기 및 4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88호 목곽묘에서는 중국 중원에서 사용한 허리띠장식, 일본(왜)의 원통모양동기와 바람개비모양 동기, 경옥제곡옥, 방추차형 석제품이 출토되었고, 91호 목곽묘에서는 중국 전연의 청동그릇과 말갖춤류, 유리(로만글라스) 편, 일본(왜) 류큐열도산 조개제품이 확인되었다. 4세기 후엽의 1호 목곽묘에서는 주곽에 5명의 순장이 확인되었고 철제 무기류와 농공구류 뿐만 아니라 화려한 말갖춤류와 말갑옷(馬冑)의 종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93호 단계가 되면 부곽을 같은 구덩이 내에서 더 깊게 파서 만들기도 하고 말갑옷, 금동제 말방울(馬令)과 함께 창녕 양식의 토기도 나온다. 이후 5세기 전엽에 해당하는 73호분에서도 판갑(갑옷), 금귀걸이, 금동제 화살통 등이 확인되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왕묘급에 해당하는 무덤은 조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김해 대성동고분의 중심 세력의 약화와 연계해 보아야한다.

가야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매장 습속의 하나인 순장은 김해 대성동 대형목곽묘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된다. 보통 무덤의 빈 공간을 해석할 때 순장인골이 없어진 부분이라고도 하지만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는 운 좋게도 순장된 사람의 뼈가 고스란히 잘 남아 있어 가야 사람의 모습과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순장은 절대 권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자료로 잔혹 동화와 같은 죽음의 산물이다. 금관가야의 순장은 곽내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고령 지산동 고분의 순장 형태처럼 충전토 구역에서도 확인된 점이 흥미롭다.

91호분의 순장자들은 가슴에 목걸이를 하고 있거나 왼쪽 팔목 부근에서 확인된 빗 모양 장신구 등으로 보아 나름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88호 목곽의 충전토에서 확인된 3명의 순장 인골 중에서 머리에 화살촉의 경부편이 남아있는 두개골의 부식된 흔적과 척추 중앙에 철촉 선단부의 존재는 노년의 여성 순장자가 화살을 맞았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다른 순장자도 10대 후반과 20대의 여성으로 빗 모양 장신구와 녹각제와 철제 손칼이 함께 출토되었으며, 또 57호의 순장 인골을 분석해 보니 3명 모두 여성으로 밝혀졌다. 20 대 2명과 30 대 1명으로 모두 출산 경험이 있으며 종아리 부근의 가자미근선이 발달된 것으로 보아 다리 근육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3 금관가야의 묘역과 왕성의 권역을 구분하다

봉황토성으로 불리는 봉황동유적은 임호산과 경운산, 분성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있다. 표고 46.5m의 봉황대를 중심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유적으로 김해패총, 회현리유적, 봉황대유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1907년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발견된 후 1920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특히 옹관묘는 일본 북부 큐슈의 야요이(彌生) 토기로 만든 것으로 일본과의 교류의 증거가 되며, 패총에서 출토한 중국 동전인 화천(貨泉)의 존재는 중국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기원후 8~24년)에서 만든 동전으로 기원후 14~40년 사이에만 제작되었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적 유물이다.

봉황토성은 환호(도랑)와 토성을 기반으로 단계적 확장을 진행하였고 4세기 환호취락(주거지 주변에 도랑을 만든 구조)에서 평지성으로 바뀐다. 평지에 마련된 봉황토성은 대규모의 성벽과 협축한 성벽에 돌을 쌓아 두른 구조로 금관가야의 위상을 대성동고분과 함께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봉황토성의 안팎에 주거지와 고상건물지가 별도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고 토기 가마와 송품관 및 철광석의 존재는 직접 토성 안에서 여러 물건을 생산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방지와 함께 특수한 건물지도 존재하였으며 대성동 고분군의 북쪽에 경작유구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유물과 유구의 확인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의 내용 중에 길이 1천 5백보의 나성(羅城)을 쌓고 궁궐, 관청, 무기고, 창고, 신궁을 지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또 봉황토성의 서쪽은 해반천과 연계되는 곳으로 호안 시설과 접안 시설, 창고로 추정되는 다양한 유구와 녹나무로 만든 배 편 및 노의 존재는 대외 교류를 위해서 바다와 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이다. 또 한옥 생활체험부지유적에서 모형토기(미니어처), 복골(卜骨), 말뼈, 다량의 사람모양과 말모양 토우(土偶)의 존재는 이곳에서 일종의 의례행위가 있었음을 추측게 한다.

4 철을 기반으로 동북아시아의 허브이자 가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다

가야의 철은 매우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지금의 화폐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크기의 철정(鐵鋌; 덩이쇠)을 비롯하여 가지각색의 철제품들은 주변 지역의 주요 교역 물품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듯이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는 다량의 철정과 철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갑옷과 투구, 말갑옷과 말투구, 철제 무기와 농공구류, 말갖춤류 등 종류도 다양하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특히 외래계 유물이 출토품이 많고 다양하다. 특히 청동거울(方格規矩四神鏡), 청동솥,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虎形帶鉤)와 재갈과 말띠꾸미개, 발걸이 등의 마구류는 중국 북방계 문물이며, 원통모양이나 바람개비모양 동기, 각종 석제품 등은 일본(왜)계 문물이다. 또 88호분과 91호분에서는 중국 중원계의 허리띠장식이나 삼연(三燕; 북방 모용선비족이 세운 왕조, 남연, 전연, 후연)의 청동그릇, 9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 편은 중국과 요령지역을 경유하면서 북방유목민족 및 서역과의 교류가 금관가야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91호분은 중국계 물품의 보물창고라고 불린다. 동서로 긴 대형 목곽묘(길이 820㎝, 너비 480㎝)로 바닥에 돌을 깔지 않았다. 피장자는 무덤 중앙에 두고 그 주변으로 유물을 두었다. 동쪽에 노형기대와 항아리류, 금동·청동제 말갖품류, 청동그릇, 원통모양 동기와 칠그릇이 있고 발치쪽에는 다량의 토기를 부장하였다. 남쪽 장벽에서 용무늬가 투조된 말띠꾸미개와 운모장식과 유리(로만글라스) 편이 확인하였다. 목곽의 중앙 동쪽에 3명의 순장자가, 서쪽 충전토 상부에 2명의 순장자가 있었음을 파악하였다. 특히 한 무덤 내에서 중국 대륙계의 유물인 중원계와 북방계 유물이 한꺼번에 확인된다는 점은 중국 동진(東晉)과의 교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운모(雲母)장식은 신라 고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도교의 불로장생 관념과 영원불사의 선약(仙藥)의 하나로 여겨진다. 주로 머리 부근에서 확인되며 백제 풍납토성 경당지구 수혈에서도 출토되었다. 91호에서 출토된 운모는 장방형의 형태로 중간에 작은 구멍이 2개씩 여러 곳에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디엔가 실과 같은 것으로 달아맨 것이 아닐까 한다.

88호분은 일본(왜) 물품들의 보물창고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일본(왜) 물품들이 한꺼번에 하나의 무덤에서 확인되는 사례는 없었다. 특히 바람개비모양 동기가 12점이 확인된 점은 일본보다 더 많은 부장량이라고 한다. 김해 대성동 집단의 무덤에서만 확인되는 대외교류의 중요한 물품의 존재는 대외적인 교류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청동제품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 서역까지 아우르는 국제적인 대외교류품으로 치장한 김해 대성동 집단은 5세기 이후 점점 세력이 약화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73호분 대형 수혈식 석곽묘에서 여전히 갑옷이나 투구, 말갖춤류, 금동제 화살통 등이 확인되고 창녕, 진주, 고성 계통의 토기도 함께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532년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기 전까지 김해 대성동 고분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는 주변 지역과의 교섭과 관계망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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