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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

진흥왕의 야망을 기록하다

미상

단양 신라 적성비 대표 이미지

단양 신라 적성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단양 신라 적성비는 충청북도 단양군 하방리 적성(赤城) 내에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적성 지역을 점령한 후 세운 비로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78년에 발견되어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비의 내용에는 신라의 장군 이사부(伊史夫)가 당시 고구려 지역인 적성을 공격했을 때 도와주었던 인물들을 포상하고 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2 발견 과정과 현황

단양 신라 적성비는 충청북도 단양군 하방리의 적성(赤城) 내에 위치하며,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운데 내려오면서 좁아지고 얇아지는 형태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비문을 새겼다. 비석의 상부는 깨져있으나 대부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78년 1월 6일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 적성 내에서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단양군 일대에서 온달(溫達)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 조사되었다. 출토 상태는 표면이 위를 향하고 뿌리가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었으며 땅에 30cm 정도 되는 깊이로 묻혀있었는데 오랫동안 땅속에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字劃)이 선명하였다.

비석은 화강암 자연석이며 비의 규격은 높이 93cm, 아래 너비 53cm, 윗너비 107cm인데, 밑으로 내려오면서 22cm, 14cm, 5cm의 두께로 된다. 비의 윗부분은 절단·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쪽 측면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개석과 대석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비의 형태상 대석의 존재 가능성도 함께 검토되었다. 글자는 자경 1.5cm, 2cm, 3cm의 크기로 예서(隸書)풍의 해서(楷書)로 되어있다.

비문은 22행 450여 자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 있는 글자는 288자이고 주변에서 수습된 비편에서 21자를 추가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글자는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지만, 비석의 상단부가 파손되어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3 비의 건립시기

제1행에 비석을 세운 간지가 적혀있었을 것이지만 비문 상단이 파손되어 간지가 보이지 않아 연대 추정에 애를 먹고 있다. 학계에서는 비석의 건립연대에 대하여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진흥왕(眞興王) 12년(551)을 비석 건립의 상한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551년 거칠부(居柒夫) 등 여덟 장군이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郡)을 탈취했다는 기록 이 보이는데, 지금의 단양 지방이 이때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신라의 북방 경략은 진행되고 있었기에, 아마도 적성의 신라 귀속은 551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특히 525년에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으로 오늘날 상주에 해당하는 사벌주(沙伐州) 군주(軍主)를 삼아 일찍부터 관산(管山)·서원(西原)·모산(母山)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 과 550년 백제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금현성(金峴城)을 공취 하고, 이듬해 진흥왕이 낭성(娘城: 지금의 청원)에 순행하였다는 기록 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본다면 청주·충주와 연접하고 있는 단양 지방은 늦어도 550년에는 신라에 귀속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비석 건립의 상한을 551년으로 보고 있다.

다음은 비문에 나오는 인물의 관등을 문헌 사료와 비교하여 연대를 추정한 견해로써 이사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 등이 중심이 된다. 비문의 이간(伊干) 이사부는 기록상에 지증왕 때 실직주(悉直州)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고 541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 되었다는 그 이사부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비석이 진흥왕대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또 무력(武力)은 김무력(金武力)으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인데, 비문에는 관등이 보이지 않지만, 아간(阿干) 비차부(比次夫) 다음으로 나열되고 있어 아마도 아간(阿干) 이하였을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무력은 553년 대아간(大阿干)으로 한강 유역에 신설된 신주(新州)의 군주 가 되었고 561년 건립된 창녕 척경비에서는 잡찬(迊飡) 관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무력의 관등이 아간 이하였던 시기를 감안한다면 적성비는 553년 이전에 세워졌을 것이다.

아간(阿干) 비차부(比次夫)는 『삼국사기』 거칠부 전에서 551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보내진 ‘대아간(大阿干) 비차부(比次夫)’ 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 이것은 이 비가 비차부가 대아간이 되기 이전인 551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적성비 건립 연대의 하한은 550년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흥왕 6년 이전 곧 545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었는데, 이는 적성비에 기록된 인물의 관등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인물의 관등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적성비에 보이는 인명 가운데 두미지(豆彌智)를 탐지로 비정하고 내례부지(內礼夫智)를 노리부(弩里夫)에 비정하며 3행의 ○○부지를 거칠부에 비정하였는데, 비에는 거칠부가 대아간으로 되어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거칠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545년 『국사(國史)』를 편찬한 공로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 으로 되어 있어 이를 감안한다면 545년 이전에 건립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의 경우 확실하지 않은 판독을 바탕으로 인물을 비정한 연후, 그것을 기초로 추론한 것이기에 확실한 근거를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견해들을 종합해 본다면 비의 건립 시점은 아마도 540년(진흥왕 즉위)에서 550년(진흥왕 11) 사이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연대를 구체화할만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550년을 적성비 건립의 하한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4 비문의 내용

비문의 전체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관 이사부(伊史夫: 伊干)·두미(豆彌: 彼珍干)·서부질(西夫叱: 大阿干)·거칠부(居柒夫: 大阿干)·내례부(內禮夫: 大阿干)·고두림(高頭林: 미상)·비차부(比次夫: 阿干)·무력(武力: 阿干)·도설(導設: 及干)·조흑부(助黑夫: 及干) 등의 “대중등(大衆等)”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사업(拓境事業)에 공을 세운 적성 사람 야이차(也爾次)의 공훈을 전사법(佃舍法)에 의거하여 표창하고, 앞으로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진흥왕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로 척경비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또한 촌(村)과 관련된 지방 행정 단위와 지방민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내용도 담겨있으며, “국법(國法)”,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 등 율령과 관련된 용어도 보인다. 그리고 인구의 파악과 관련하여 “소자(小子)”, “소녀(小女)” 등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다.

5 비문의 성격

비문의 성격에 대해서는 척경비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았으나 그 외에 내용을 중심으로 보아 위무를 위한 안무비(按撫碑), 선무비(宣撫碑), 축성비(築城碑), 선전비(宣戰碑)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여러 논의를 일축하고 건립 장소를 강조하여 적성비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현재도 진행 중이나 비의 내용을 감안할 때 비석의 내용으로서 일차적인 사실은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싸워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작(賞爵)을 내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실제로 야이차의 공적을 치하하며 그에 따른 은전을 베푸는 선무의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무비나 선무비의 성격에 가깝다는 점이 부각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6 비문의 쟁점

비문에서 나타나는 용어 중 가장 먼저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 대중등(大衆等)이라는 용어인데, 이 용어는 다른 비문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대중(大衆)과 같은 성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당하는 관위(官位)는 대아찬 이상의 고위 관등으로서 군주, 당주 등과 엄격하게 구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번째로 중요시되는 것은 적성연(赤城烟)과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이다. 그중 연(烟)은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에 보이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에 사용된 개념으로 ‘가(家)’, ‘민호(民戶)’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비문에서 확인되는 소자(小子), 소녀(小女) 등의 용어는 신라에서 이 시기에 이미 인구를 성별과 연령별로 파악하고 있었고 호령(戶令)이 보다 체계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미 6세기경 신라 사회에서 토지 및 인구에 대한 개념이 사용되고 있었고 그와 관련된 법과 제도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신라 율령 제도의 발달을 이해하는데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서인(書人)’과 ‘석서입인(石書立人)’이라는 용어도 중요한데 적성비가 세워진 6세기 신라 사회의 각 분야가 이미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운영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사회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개념으로, 앞으로 적성비를 중심으로 신라의 정치사 및 사회사·경제사 중심의 연구 영역을 보다 확대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 단양 신라 적성비의 의의

1979년 발견된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시대의 영토확장에 대한 정책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비이면서 동시에 공을 세운 지방민에 대한 표창을 내리는 선무비의 성격을 가진 비이다. 이러한 내용 속에서 율령·조세제도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촌락의 존재 양상 등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사 등 다양한 분야의 관점에서 신라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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