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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大王岩]

살아서는 통일의 군주, 죽어서는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다

미상

대왕암 대표 이미지

경주 문무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대왕암(大王岩)은 경상북도 양북면 봉길리 감포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으며,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바닷속 왕릉(海中王陵) 또는 산골처(散骨處)로 알려져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龍)이 되어 신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였으며, 동해(東海)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에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火葬)하고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 대왕암은 문무왕과 관련하여, 감은사(感恩寺), 만파식적(萬波息笛), 이견대(利見臺)와 연결되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2 대왕암은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인가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서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대왕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海中王陵)으로 알려져 있으며, 2011년 7월 28일 문무대왕릉에서 ‘경주 문무대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볼 때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평범함 바위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동서남북(東西南北) 네 방향으로 물길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바위가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바위의 중앙부에는 못처럼 파여진 공간이 있고 그곳에 거대한 바윗돌이 놓여 있다. 바닷물은 차고 빠짐에 따라 바위의 동쪽에서 들어와 중앙부에 모였다가 다시 서쪽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대왕암은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현지 주민들에게 ‘대왕 바위’로 불리고 있었다.

1964년 신라오악학술조사단(新羅五岳學術調査團)이 구성되어 대왕암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었다. 신라오악학술조사단에서는 첫째, 대왕암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무왕 관련 사료를 볼 때 문무왕릉으로 보이며, 둘째, 감은사, 이견대(利見臺)와 같이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 대왕암은 암초 중앙부를 파내고 육지에서 운반해 온 거대한 바윗돌을 안치하였다. 넷째, 중앙부에 물이 있는 못을 만들기 위해 인공적으로 동서 방향의 긴 물길을 마련하였다. 다섯째, 중앙부에 놓은 거대한 바윗돌은 정확하게 남북 방위에 따라 놓여있다고 밝혔다. 이를 근거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대왕암을 신라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으로 비정하였다.

다만 대왕암을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으로 보는 것과 다른 견해도 있어 소개한다. 첫째, 『삼국사기』 기록 에 따르면 문무왕은 유언에서 인도(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둘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수록된 문무왕릉비 의 ‘滅粉骨’이라는 문구를 보아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바윗돌 아래에는 문무왕의 유골을 봉안한 납골 장치나 석실(石室)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넷째, ‘장사지낼 장(葬)’이라는 글자는 시체나 뼈를 묻는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화장하여 분골(粉骨)할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바닷속 왕릉이 아닌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散骨處)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3 대왕암에 나타난 문무왕의 호국정신(護國精神)

문무왕이 죽자 신하들이 왕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서 장사(葬事)지냈고, 문무왕은 신라를 지키고자 용이 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문헌에 보인다. 대강의 줄거리는 ‘왜(倭)가 자주 신라를 침범하니, 문무왕은 이를 근심하였고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나를 동해의 물속에 장사지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왜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거서간 이래로 호시탐탐 신라를 침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왜의 침입을 방비하고자 신라 소지왕은 493년(소지왕 15)에 백제 동성왕(東城王)에게 이벌찬(伊伐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백제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문무왕이 사망할 당시의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이후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당의 침입을 물리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틈이 생기면 언제든 신라를 침입하려는 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의 아버지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도 절영도(絶影島)에 진지를 쌓아서 신라를 침입하는 왜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왜의 침입은 신라의 근심거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문무왕은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죽어서 용이 될 것을 맹세하였고, 왜의 침입이 빈번했던 동해(東海)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이에 문무왕의 아들이었던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대왕암에 장사를 지냈다. 문무왕이 호국정신은 대왕암뿐만 아니라 감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감은사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로 현재는 절터(寺址)와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가 남아있다. 『삼국유사』의 기록 에 따르면 문무왕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창건하였으나 미처 완공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이 죽자,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지를 받들어 감은사를 완공하였다.

1970년대 감은사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감은사 금당(金堂)의 주춧돌 아래에는 일정하게 틈이 있으며, 동쪽을 향해 구멍이 뚫려 바다와 물길이 이어지게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절의 금당 아래에 틈을 만들어 물을 채우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감은사를 이렇게 독특한 구조로 세운 것은 용이 된 문무왕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라 추측된다.

4 용이 된 문무왕과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은 문무왕을 대왕암에 장사지낸 뒤, 신라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된 문무왕을 배알하기 위해서 대왕암을 조망할 수 있는 바닷가의 언덕에 이견대를 세웠다. 이견대는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있으며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문왕은 일관(日官) 김춘질과 이견대에서 만난 용을 통해 문무왕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용을 물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며, 용이 구름과 비를 통제함으로써 농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어왔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는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 이 있다. 이뿐 아니라 다양한 문헌에서 용과 기우제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이처럼 용이 구름과 비를 통제한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이견대에서 기우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홍양호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견대는 조선 후기에도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용이 된 문무왕은 신라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용으로서 구름과 비를 통제하는 능력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를 통해 문무왕의 호국 이미지는 백성에 대한 사랑(愛民)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만파식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만파식적은 신비로운 피리로서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멈추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정치적 불안이나 국난이 진정되고 태평성대가 오기를 염원하는 피리이며, 훌륭한 통치를 비유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세운 이후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박숙청(朴夙淸)이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하자, 신문왕은 일관에게 점을 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일관이 “돌아가신 문무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도 33천(天)의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문왕이 이견대로 행차하여 대나무를 찾아 그것으로 피리를 만드니, 바로 만파식적이었다.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었고,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장사지냈다. 또한 문무왕이 완공하지 못한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용이 된 문무왕은 신비로운 피리인 만파식적을 신문왕에게 주었고,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받은 곳은 문무왕을 배알하기 위해 세운 이견대였다. 이처럼 대왕암에서 시작된 문무왕의 호국정신은 감은사, 이견대, 만파식적을 통해 하나의 큰 이야기로 발전하였고, 여기에는 평화와 안정을 바랐던 신라인의 염원이 담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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