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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武寧王陵]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대 왕릉

미상

무령왕릉 대표 이미지

무령왕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무령왕릉(武寧王陵)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과 그 왕비의 무덤으로 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다. 무령왕릉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양(梁)의 지배층 무덤 양식과 매우 흡사한 벽돌무덤으로써, 양과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무덤 내부에서 묘주의 정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인명이 적힌 최초의 삼국시대 왕의 무덤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2 우연한 발견, 아쉬움이 남는 발굴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고분군에 위치한 6호분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백제의 고분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그런데 일제의 유명한 도굴꾼이자 역사학자였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무령왕릉을 그 근처에 있던 6호분을 주위에서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 덕분에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일본인들의 도굴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무령왕릉이 백제왕의 무덤임을 가루베 지온이 눈치 챘다면, 무령왕릉 내부의 유물들은 일본 각지로 흩어져 무령왕의 실체를 영영 파악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1971년, 이렇게 무령왕의 무덤은 왕이 묻힌 지 약 1,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이 무색하게 무덤의 발굴 과정은 매우 실망스럽게 진행되었다. 발굴 도중 무덤 입구에 놓인 진묘수(鎭墓獸: 무덤을 지키기 위해 놓아두는 동물 모양의 돌로 만든 상. 석수(石獸)라고도 한다)와 함께 발견된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돌판 같은 것)에서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이 소식을 들은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유적 주변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발굴단은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전에 발굴을 빠르게 끝내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무령왕릉 발굴은 17시간 만에 졸속으로 끝나버렸다.

조사 결과, 왕릉은 산비탈을 파내고 그 속에 벽돌을 쌓아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약 20m 높이의 봉분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는데,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3.14m 규모에 터널형 천정과 전면 중앙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널길이 있는 철(凸)자형의 무덤 구조를 지닌 전축 단실묘(塼築單室墓 : 벽돌로 쌓은 방 하나짜리 무덤)임이 밝혀졌다. 왕과 왕비의 합장관대(合葬棺臺)는 주변보다 조금 높게 만들어졌고, 무덤을 이루는 벽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아름다움과 동시에 강한 종교적 색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무덤 내부에서는 지석과 함께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오수전(五銖錢) 등이 발견되었으며, 왕과 왕비 목관 아래에는 금으로 만든 관 장식(金製冠飾)과 금동신발(金銅飾履), 금은으로 만든 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와 함께 동탁은잔(銅托銀盞)·청동거울,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과 봉황이 그려진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각종 유물 수천 점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달하며, 백제의 높은 문화와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 이처럼 지석을 통해 무덤의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고대 왕릉은 현재로서는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사실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무덤 양식으로 지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무덤은 한반도로 넘어온 중국계 유이민(流移民)의 것이라 여길 수도 있을 만큼 중국 양의 색채가 강하다. 무덤양식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도 전반적으로 중국의 영향이 짙게 깔려있다. 또한 왕의 시신이 안치된 관은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는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출토된 청동거울과 매우 유사한 것이 일본의 고분에서도 발견되어 당시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점에서 무령왕릉의 발견은 6세기 전반 백제와 중국·일본 사이에 전개된 교류 양상과 백제 지배층의 문화·사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발굴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첫 발굴 조사가 17시간 만에 졸속으로 끝나버리는 바람에 왕릉에 대해 보다 상세하고 정밀하게 조사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당시의 발굴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아쉬운 결과이다. 다만 이때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 이후의 발굴들은 보다 치밀하게 진행된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겠다.

3 지석(誌石)의 발견으로 풀린 백제 왕계의 수수께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유물로는 무령왕지석을 꼽을 수 있다. 지석은 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의 돌판으로 중앙 윗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다. 지석은 2매가 발견되었는데 각 지석 앞뒷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구성은 1면이 왕의 지석, 2면은 간지도(干支圖), 3면은 매지권(賣地券), 4면은 왕비의 지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면과 2면, 3면과 4면이 각각 하나의 지석 앞뒷면을 이룬다.

먼저 무령왕지석 1면을 보면 그 첫머리에 무덤의 주인을 가리켜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신 백제(百濟)의 사마왕(斯麻王)’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동대장군’은 무령왕 재위 21년에 중국 남조(南朝) 국가 양의 무제(武帝)로부터 받은 작호 중 하나로 2품에 속한다. 사마왕의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무령왕은 중국과 교섭에서 여융(餘隆)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나 평소에는 사마로 불렸던 것 같다(‘무령왕’은 시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사마라는 이름은 무령왕의 어머니가 왜(倭 : 일본의 옛 이름)로 향하던 도중에 섬(일본어로 ‘시마しま’라 발음한다)에서 왕을 낳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편, 지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무령왕의 부계(父系)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앞서 무령왕 이름 ‘사마’의 유래가 언급되어 있는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 조에서는 무령왕의 아버지는 가수리군(개로왕 蓋鹵王)이며, 가수리군의 동생인 군군(곤지 昆支)이 당시 무령왕을 밴 형수와 함께 왜로 향하다 도중에 무령왕을 낳자 무령왕을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한 『일본서기』의 또 다른 기록에서는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이자 말다왕(동성왕 東城王)의 이복형이라 하면서도 뒤이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인데 기록이 와전되어 이복형제로 기록이 남았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무령왕의 부계에 대해서 각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 학계의 연구자들은 사실 파악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런데 1971년 무령왕릉에서 지석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확보되었다. 우선 지석에서는 무령왕이 계묘년(癸卯年)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의 계묘년은 523년이다. 이를 역으로 환산해보면 무령왕은 461년(개로왕 8년)에 태어난 것이 되며, 이는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과 시기가 일치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무령왕은 477년 즉위 당시 13세였던 전전대 왕인 삼근왕(三斤王)보다도 나이가 많으며, 왕위에 오를 때는 나이가 마흔이었으므로 동성왕의 아들이라 보기도 어렵다. 『삼국사기』에서 무령왕을 동성왕의 아들이라 한 것은 아마도 왕계를 정리하면서 의도적으로 왕통을 부자 상속의 입장에서 서술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령왕의 가계(家系)에 관해서는 무령왕의 생몰연대 및 즉위년 등의 시점이 사료마다 차이가 있어 여전히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나, 최근에는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4 지석(誌石)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백제 시대의 이모저모

지석을 통해 우리는 무령왕의 실체 외에도 백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먼저 무령왕 지석 1면에서는 양 무제에게 받은 ‘영동대장군’ 관호를 칭하면서도 이에 맞춰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을 쓰지 않고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을 써서 무령왕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사서에서 왕의 죽음을 ‘훙’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과도 대비된다. 즉 무덤의 양식은 중국식을 따르고 그 안에 놓인 묘지에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호를 표기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연호 대신 간지(干支)로 날짜를 기록하고 ‘훙’대신 ‘붕’을 사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모습은 웅진 천도 이후 실추된 백제 왕권의 권위를 무령왕이 양과의 국제 관계를 통해 회복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즉 양 무제에게서 받은 ‘영동대장군’이란 관호가 무령왕 권위의 바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령왕의 죽음에 대해 ‘붕’이란 글자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무령왕 혹은 그 아들 성왕(聖王)이 백제왕을 황제에 준하는 위치로 올리고 이를 신하와 백성들에게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1면과 왕비의 지석인 4면을 보면 왕과 왕비는 모두 죽은 뒤 약 3년(28개월)이 지나서야 무덤에 매장되었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3년상은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던 상례(喪禮)로서 시신을 안치[殯]하고 장사를 지내는[葬] 기간 및 상복을 입는 기간[服喪]을 모두 포함하여 3년 동안 상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이때 ‘3년’이라는 기간은 햇수가 아닌 개월 수로 따지는데 대개 25개월·27개월·36개월 등 국가나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백제의 경우는 양의 상례(27개월)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석에서 보듯 무령왕에 대한 3년상은 28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므로 양과 백제 사이에도 상례 기간이 1개월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일 때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백제의 현실에 맞게 적절한 변용 과정을 거쳐 흡수한 사례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3면에 새겨진 매지권의 내용은 무령왕이 죽어서 묻힐 땅을 돈으로 샀다는 기록이다. 지석과 함께 출토된 오수전을 그 대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석에는 무령왕이 토왕(土王)·토백(土伯)·토부모(土父母) 등에게 문의하여 땅을 샀다고 하는데, 이들은 지하의 신으로 도교사상과 연결된다. 백제의 종교라고 하면 흔히 불교를 떠올리기 쉽지만, 왕의 묘지석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될 정도면 도교 역시 백제인들의 사상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무령왕과 왕비 머리맡에서 나온 청동거울(방격규구신수문경 ·의자손수대경 ·수문경) 역시 거울에 적힌 명문에서 도교적 색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밖에도 중국정사인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는 백제가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점치고 관상 보는 법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점, 송산리 6호분의 벽화에 청룡·백호·주작·현무·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사기』 근구수왕(近仇首王) 1년 조에서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덕경(道德經)』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서도 도교사상이 백제의 왕과 귀족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2면에 보이는 간지도(干支圖)는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중 쉽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를 방위도로 보기도 하고 능역도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서쪽을 나타내는 간지들이 비어있어 왕릉과 빈전의 위치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명이 되지 않은 부분으로서 비석 3면 매지권의 마지막 부분에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로서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부종후령(不從後令)’(後를 律의 오자로 보기도 한다) 등의 문구가 묘지에 상투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어서 중국 장례문화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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