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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

고구려의 오골성

미상

봉황산산성 대표 이미지

봉성 봉황산산성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펑청시(鳳城市)에서 동남쪽으로 3.5km 가량 떨어진 봉황산(해발 836.4m)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유적이다. 문헌을 통해 고구려의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전하는 오골성(烏骨城)으로 비정된다. 산성은 성의 전체 둘레가 16km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규모면에서 고구려의 최대급 산성이다.

중국이 랴오허(遼河)를 건너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단둥(丹東)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데, 요동(遼東) 지역에서 압록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펑청을 거쳐야하는 만큼, 산성은 그러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산성에서 서쪽으로는 슈엔(岫岩) 지역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安市城)으로 비정되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덩타(燈塔)의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遼東城)과 연결되며, 동쪽은 압록강을 따라 박작성(泊灼城)으로 알려진 단둥의 호산산성(虎山山城)을 거쳐 국내성(國內城) 등으로 진입할 수 있다.

2 봉황산산성의 고고학 조사 내용

봉황산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1985년에 이루어졌다.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성벽을 비롯하여 북벽의 망대(1호, 2호), 성문(1호~4호), 치, 대형 건물지와 산성 주변의 고구려 고분 183기 등을 발굴조사 하였으나, 아직까지 정식 발굴조사 보고서는 발간되지 않았다. 유물 일부는 현재 단둥시박물관(丹東市博物館)에 전시되어 있다.

아이허(靉河)의 좌안에 있는 봉황산산성은 서쪽으로는 봉황산의 줄기와 맞은편 동쪽으로는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석축 성벽을 쌓았다. 성의 전체 둘레는 15,955m로, 고구려 산성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전체 16km에 달하는 성벽 중에 인공 석축 성벽의 총 길이는 7,525m이다. 성벽은 쐐기형 성돌과 북꼴돌이 결합된 전형적인 고구려 석축 성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산성은 환형분지(環形盆地)에 자리잡고 있어 내부가 넓고 평탄한데, 명대(明代)에 편찬된 『요동지(遼東志)』에 ‘오골성에 10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산성의 정문은 남문으로, 문지 앞에는 거대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다. 차단벽의 겉면은 석축이나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있다. ‘八’자형의 북문지(1호)는 두 산을 연결하는 능선이 움푹 꺼져 협곡을 이룬 곳에 있는데, 그 좌우 능선으로 정연하게 쌓아올린 성벽이 잘 남아있다. 북문지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요대(遼代)의 것으로 밝혀졌다.

북문지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치가 1개 발견되었는데, 성벽과 맞물려 있어 동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마주보고 있는 성벽의 안쪽에서는 초소로 추정되는 시설과 함께 성벽으로 오를 수 있는 등성시설(漫道)도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북쪽 성벽에서는 여장(성가퀴)과 함께 30여개가 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돌구멍(石洞)이 발견되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시설인 여장은 성벽의 가장 상면에 축조되며, 고구려 산성에서 확인되는 여장은 대체로 별다른 시설이 없는 평여장으로, 그 폭은 0.8~1.2m 가량으로 일정한 편이다. 돌구멍은 바깥 성벽으로부터 안쪽으로 약 1m 들어온 곳에 만들어져 있는데, 1.5~2m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구멍은 방형 평면에 한 변의 길이는 0.25m, 깊이는 0.5~1.2m 이다. 돌구멍의 바닥에는 돌확과 편평한 형태의 초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돌구멍의 용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물을 빼는 배수구, 성벽 바깥쪽으로 굴릴 통나무를 매달았던 나무기둥의 구멍, 목책을 세워 성벽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둥 구멍, 성을 방어하기 위한 노포(弩砲)를 세운 구조물, 투석기나 쇠뇌 등의 장비를 일시적으로 고정시키는 시설, 방어용 그물망을 고정시키기 위한 기둥 구멍 등이다. 접근이 쉽지 않은 급경사면의 성벽에서도 돌구멍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방어력 강화를 위한 시설물이라기보다는 여장과 바로 인접해 설치된다는 점에서 성벽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의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산성에서는 2곳의 망대가 발견되었는데, 북문의 서쪽에서 확인된 망대는 기초부, 계단, 망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서는 연화문와당을 포함한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성 내의 대형 건물지에서는 심발, 호 등과 같은 토기와 낫, 화살촉, 차축두 등의 철기류, 그리고 승문 타날 및 무문양 기와, 연화문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3 봉황산산성의 역사적 의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봉황산산성은 둘레가 16km에 달하는 고구려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큰 성으로, 랴오둥반도 동남부의 교통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봉황산산성은 명대 편찬된 『요동지』의 오골성에 대한 기록과 부합하기에 고구려의 오골성으로 비정된다.

오골성은 중국과의 전쟁이 빈번하였던 랴오허 유역의 최전선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랴오둥반도에서 평양으로 가기 위한 주요한 길목에 자리하였다. 실제로 『신당서』에는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함락시키지 못하자, 고연수와 고혜진이 ‘오골성을 탈취한다면 곧 평양도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당의 장수들 또한 ‘오골성을 탈취한다면 압록강을 건너 그들의 심장부를 죌 수 있다’라고 하며 찬성하였다는 기록 이 전한다.

그리고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등에는 오골성이 고구려와 당의 전쟁 당시 주변의 안시성과 신성, 백암성 등과 잘 연계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자치통감』에는 백암성의 청병 요청에 의해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다 고 하고, 『구당서』 설만철전(薛萬徹傳)에는 당나라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오골성과 안시성 같은 여러 성의 군사 3만 여 명이 와서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오골성은 고구려의 지방관이었던 욕살이 상주하였던 성이었다. 고구려에서 성은 지방을 지배하기 위한 기본 행정단위였는데, 대성-성-소성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한원(翰苑)』 고려기에 따르면 고구려 지방 통치의 중심지인 대성(大城)에는 최고 지방관인 욕살이 파견되는데, 이는 당의 지방관인 도독(都督)에 해당한다. 성(城)에는 일명 도사(道使)라고도 불리는 처려(處閭)가 파견되었는데, 이는 당의 자사(刺史)에 해당하며, 소성(小城)에 파견된 가라달(可邏達)은 당의 장사(長史)에 해당한다. 또한 성(城)에는 누초(婁肖)가 있는데, 이는 당의 지방관인 현령(縣令)에 해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욕살이 파견된 고구려 성으로는 오골성 외에도 책성(柵城)이 있다. 욕살은 행정과 군사의 양면을 관장하는 군정적(軍政的) 책임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을 관할하기 위해 축조된 치소성은 고구려가 랴오둥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이후, 중대형의 포곡식산성을 축조하면서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곡평야(河谷平野)에 입지한 포곡식산성은 넓은 평지가 포함된 계곡부를 감싸고 있는 경우가 많아, 위급 시에 주민을 성 내부로 피신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주민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행정 치소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였다. 또 이들 포곡식산성에는 고구려 기와가 다량으로 수습되고 있어 성 내부에 기와 건물지가 축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오직 사찰·신묘 및 왕궁·관청만이 기와를 사용하였다’ 는 『구당서』와 ‘요동성, 현도성 등 수십 성에 모두 관청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는 『주서』의 기록은 기와 건물지가 있는 고구려 성이 치소성으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처럼 봉황산산성은 고구려의 지방관이었던 욕살이 상주하면서, 랴오둥에서 평양으로 가는 관문이자 주변의 중요한 성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군사를 지원하였던 근거지 역할과 동시에 그 일대를 지배하였던 중요한 행정 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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