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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백제인의 안전한 항해를 비는 제사 유적

미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대표 이미지

부안 죽막동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죽막동 유적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일대에 위치하는 해양 제사유적이다. 유적이 입지한 곳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변산반도의 최서단으로 화산성 대지가 낮은 산과 구릉을 이루며 이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오랫동안 침식이 진행되어 곳곳에 해식애와 해식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죽막동 유적은 해발 약 22미터의 해식애에 위치하는데, 북쪽으로는 해식동굴인 당굴(용굴 혹은 여울굴)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격포 일대의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던 수성당(水聖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91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실시한 서해안 도서지역 지표조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입지와 수습된 유물을 볼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해양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그해 5월부터 약 50일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전 이미 지표에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석제 모조품 등의 유물이 깔려 있었는데, 이는 유적이 바다에 접해 있는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하여 퇴적 조건이 불리한 데다 수성당 주변이 일부 파괴·유실된 데 원인이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노천 제사유적의 특성상 특별한 건물 등의 유구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그릇받침[기대(器臺)], 광구호, 개배 등의 백제 토기편과 토제 말, 200여 점의 석제·토제 모조품, 각종 무기류와 마구 등의 금속유물, 중국 청자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조선시대의 기와편도 출토되어 제사용 건물의 존재를 상정할 수도 있으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2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토기는 수성당 뒤편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중심부 토기군과 가2구 토기군으로 명명된 토기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개의 토기군은 퇴적 과정과 기종 구성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심부 토기군은 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 옹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접시(蓋杯), 손잡이잔 등 다양한 기종이 출토되었는데, 대체로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가2구 토기군은 파편 상태의 항아리편과 그릇받침이 주를 이루고, 그 밖에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병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낸 후에 의도적으로 폐기한 것들로 보인다. 토기들은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의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기종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심 연대는 5~6세기대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공헌용기(供獻用器)로서 주목되는 대형의 광구옹은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으로 편년된다.

금속유물로 쇠투겁창(鐵矛), 철검(鐵劍), 쇠화살촉(鐵鏃)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테(鞍橋), 말띠드리개(杏葉), 철고리(鐵環), 동고리(銅環), 혁금구(革金具), 띠고리(鉸具), 동방울(銅鈴) 등의 마구류, 동경(銅鏡) 등이 중심부 토기군의 대형토기 속에 들어 있었다. 금속유물 대부분은 토기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토기 바닥에는 금속유물들이 산화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심부 및 가2구 토기군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원래는 항아리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 후대에 포함층 상면이 교란되면서 주변으로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연대 추정이 가능한 말안장, 말띠드리개, 쇠투겁창 등으로부터 제사에 사용된 유물의 중심 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죽막동 유적이 제사유적임을 입증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모조품(模造品)은 신(神)에게 공헌하기 위한 용도로 실물을 축소하여 모조한 것으로 재질에 따라 석제품과 토제품으로 나눌 수 있다. 석제 모조품은 왜와의 교류 양상이 엿보이는 유공원판(有孔圓板)과 검형(劍形) 석제품, 곡옥 등을 비롯하여 선형품(蟬形品), 거울(鏡), 방울(鐸), 도끼(斧), 낫(鎌), 손칼(刀子) 등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실 같은 것으로 신목(神木) 혹은 성수(聖樹) 같은 나무에 매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제 모조품으로는 말[토제마(土製馬)]과 인형(人形) 모조품 두 종류뿐이지만 제사용 유물 자체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중시되고 있다. 일찍부터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어 오면서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신과 인간의 매개물로서 숭앙을 받아 온 짐승인 말과 사람 자체를 축소 모형으로 만든 인형을 신에게 공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토제마는 전부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액(厄)을 없애고자 제사했던 동아시아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며, 토기가 퇴적되어 있는 범위 바깥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면서 의도적으로 제사장 주변에 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옥류(玉類)와 중국의 육조(六朝) 청자는 발굴 구역의 일부에 걸쳐서 소량이 산포되어 있었다. 중국 청자는 각진 귀(耳)와 유약,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흑유 단지로 보아 육조시대(A.D.317~581)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고려시대 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사기 및 백자, 다량의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3 죽막동 유적의 성격

죽막동 유적은 해양 제사와 관련된 유적으로 4세기 중반부터 7세기대의 백제시대에 처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제사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곳으로 전라북도 서해안 일대에서 발굴된 최초의 제사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적은 곰소만과 동진강구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돌출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주변을 조망하기에 유리한 입지를 띠고 있다. 변산반도 앞 바다를 통과하는 배들을 조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이기 때문에 이 일대 항로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남쪽과 북쪽으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봉화대가 있었던 봉화봉과 계화산이 인접해 있는데, 이들은 항해 상의 지표로 이용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이곳을 백제의 중요한 해안 제사유적으로 기능하게 한 핵심적인 요건이 되었다.

죽막동 유적 내에서 삼국시대의 제사 행위가 이루어진 제장(祭場)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20×15m 범위의 평탄면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원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던 수성당 뒤편의 8×9m의 범위가 제장의 중심부로 판단되며, 이러한 양상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지리적 위치와 입지, 제사용 모조품의 출토, 제사 용기로 분류할 수 있는 장식성이 강한 토기들, 중국과의 교류를 암시하는 육조 청자 등의 유물로 볼 때, 죽막동 유적은 해안가에 위치한 독립된 제사유적임이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제사의 대상은 어업신, 항해신, 선신(船神) 등 바다와 관련된 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입지적 특성을 감안하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항해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의 연대로부터 제사의 양상을 유추해 보면, 4세기 대에는 주로 토기 위주의 유물로 제사를 지내다가 5세기 들어 석제와 토제 모조품을 바치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 중후반 이후부터는 대형의 옹에 공헌용의 금속유물을 넣어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헌 용기로서 옹과 그릇받침은 5세기에 본격적으로 결합하여 등장하고, 6세기 이후에는 새로이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병, 장군(橫岳)과 같은 다양한 기종이 추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를 지낸 주체는 누구일까? 제사에 사용된 유물의 면면을 보면 그 주체는 상당한 지위를 가졌던 계층이나 항해와 관련된 실권을 장악한 세력이라 생각된다. 특히 육조 청자의 경우 백제의 중앙에서 지방 호족에게 사여하였거나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통해 소유한 고가의 사치품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죽막동 유적의 제사가 중앙의 통제 하에 있었던 지방 관리에 의해 공적으로 이루어졌거나 독자적인 해양 교섭 능력을 가진 세력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바로 죽막동 유적의 위치이다. 죽막동 유적이 위치한 험조처를 무사히 통과하면 공주, 부여로 갈 수 있는 금강 하구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당시의 항해선들에게는 죽막동 앞 바다가 공주, 부여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이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중앙에 도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사 항해를 바라는 마음에서 죽막동에서의 제사 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기와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노천 제사와는 달리 건물을 지어 제사를 지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 주체는 재지의 호족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수성당(水聖堂)이라는 제당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러한 제사가 현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면 죽막동 유적에서 이루어진 제사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항해의 안전과 풍어, 마을의 무사태평 등을 비는 중요한 제의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4 죽막동 유적에서 행해진 제사의 중요성과 의믜

죽막동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해안에서 돌출되고 주변에 표지로 삼을 만한 큰 산을 끼고 있던 항해상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백제시대에는 한강유역으로 북상하는 기점이자 공주와 부여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였다. 또 황해를 사이에 두고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거치거나 혹은 서해를 직항해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항로의 중요 거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유적 일대의 해안 환경은 조류가 심한 데다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하고 바람도 강해서 조난의 위험이 컸던 곳이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죽막동 바로 옆의 격포에 배를 대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따라서 죽막동은 격포까지 무사히 들어온 사람들이 감사의 제를 올리거나 앞으로의 무사 항해를 비는 의미로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을 제사유적으로 볼 만한 근거는 지리적 특성만이 아니라 출토된 유물의 상태를 보아도 짐작 가능하다. 토기가 대부분 깨진 채로 출토되었다는 것은 노천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대로 폐기하였거나, 아니면 제사를 지낼 때에 의도적으로 깨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사를 지낸 후 유물을 깨뜨리는 것은 제사가 끝났음을 알리거나, 제사가 끝남과 동시에 제기에 남아 있는 신성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출토 유물 가운데 석제 모조품이 눈에 띄는데, 죽막동과 유사한 시기의 제사유적으로 최근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 후쿠오카의 오키노시마 유적에서 거의 동일한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러한 모조품은 당시 제사에 전문적으로 사용된 유물로 판단된다. 또한 토제마 역시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고르게 나오는 고대의 대표적인 제사 유물 중 하나인데, 사지가 절단되어 있거나 X자형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토제마는 죽막동 뿐만 아니라 하남의 이성산성, 천안 위례산성, 순천 옥룡산성, 광양 마로산성 등 백제 고지(故地)의 산성 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많아서 죽막동 유적과도 비교된다.

한편 토기와 석제·토제 모조품 외에 마구와 무기류의 비중이 높은 점도 특이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죽막동 유적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유적임은 분명한데, 마구나 무기류로 볼 때는 단순히 해양 제사유적으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중요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죽막동과 인접한 격포 지역은 조선시대에 진(鎭)을 설치하여 서남해안 일대의 수로를 통제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이처럼 중요한 정치·군사적 활동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백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죽막동에서 치러진 제사는 지역 방어를 기원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의 주체는 중앙 세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막동 제사의 시작을 4세기 대 백제의 가장 융성한 시기를 구가했던 근초고왕의 백제 역영 확장에 빗대어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특이하게도 죽막동 유적에서 행해지던 제사가 백제의 멸망 시점인 7세기 후반부터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제사유적인 부안 죽막동 유적 조사를 계기로 선사시대 이래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양 제사와 관련된 고고학적 연구뿐 아니라 당제와 토속 신앙 등 민속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죽막동 유적의 중요성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반도 서남부 해안에서 이루어진 고대 해상 활동과 중국, 일본 등과의 활발한 교류 양상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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