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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 고분군[扶餘 陵山里 古墳群]

백제 사비시대 왕들의 안식처

미상

부여 능산리 고분군 대표 이미지

부여 능산리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능산리 고분군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왕족의 무덤군이다. 부여 사비도성 바로 바깥에 자리하고 있으며, 총 3개의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고분 내에서 사신도 벽화나 금동 유물 등이 발굴되고, 근처에 왕의 무덤을 지키는 능사(陵寺)로 추정되는 절터(능산리사지)의 존재를 통해 왕의 무덤으로 지목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고분군이다. 사적 제14호이며, 주변의 백제 유적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일제강점기 왕릉의 발견과 계획 설계된 왕의 무덤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 나성(羅城)의 동쪽 바깥에 근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6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보수공사 중 7호분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능산리 고분군의 동쪽으로 무덤 5기가 모여 있는 고분군이 발견되어 이를 능산리 동고분군이라고 하며, 서쪽 4기의 고분을 일컬어 능산리 서고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현재 사적으로 등록된 능산리 고분군은 양 고분군 사이에 있어, 헷갈리지 않기 위해 능산리 중앙고분군이라고 적기도 한다.

능산리 고분군은 조선시대까지는 백제의 왕릉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지리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부여지역에 왕릉이 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지도서』에서 해당 지역을 능산리라고 부르고 있어 , 능산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능산리 고분군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당시 일본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조선 백성을 탄압하며,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기초 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일제는 조선의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고적조사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백제의 옛 도시인 부여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특히 백제는 고대 일본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국가였으므로 더욱 일제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분의 최초 조사는 1915년 7월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関野貞)가 각각 조사단을 이끌고 실시하였다. 이때 사비도성 동쪽의 능산리산 남사면 하단부에서 왕릉급 6기의 고분을 확인하였고, 이를 각각 동하총(東下塚), 중하총(中下塚), 서하총(西下塚), 서상총(西上塚), 중상총(中上塚), 동상총(東上塚)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조선고적도보 3(朝鮮古蹟圖譜 三)』(1916년 발간)에 실렸다. 이 고분들이 순서대로 능산리 1~6호분이다. 이후 1971년 사적 보수공사를 진행하며 6기의 고분 위로 1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7호분이다. 1966년 발견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은 동하총(1호)과 중하총(2호) 사이의 고분(8호)까지 포함하면 총 8기가 된다. 능산리 동고분군은 1938년 조사되었으며, 능산리 서고분군은 발견은 1917년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에서 확인되나, 실제 발굴조사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실시된다.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도성의 수도방어를 위한 외곽성곽인 나성의 바로 바깥에 자리하고 있으며, 각각의 고분이 줄을 지어 가지런히 배열된 편이다. 게다가 부여 다른 지역의 고분군에 비해 고분의 밀집도도 현저히 낮다. 특히 고분의 구조나 규모, 발견되는 유물을 고려하면, 백제왕의 무덤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비도성은 도성 내에서 발견되는 유적의 공간 배치를 볼 때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현재까지 도성 내에서 고분군이 발견되지 않고 왕릉으로 여겨지는 능산리 고분군이 나성 밖에 바로 붙어있는 점, 그리고 그 옆에 고분과 관계가 있어 보이는 절터(능산리사지)가 확인되는 점에서 무덤의 위치까지도 도성 설계에 포함되어 의도적으로 도성 밖에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왕릉의 구조와 내부에서 보이는 사신(四神)사상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들은 원형봉토분으로 대체로 밑지름이 20~30m이며, 봉토 주변에 호석(護石)이 배치된 것도 있다. 내부구조는 널길(고분의 입구에서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무덤 바깥 길[墓道]과 안 길[羨道]로 이루어져 있다.)이 있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으로 뚜껑 돌 아래로는 모두 지하에 조영된 지하 석실분이기도 하다.

능산리 고분군은 고분 내 현실(玄室)의 길이, 널길의 길이, 전체적인 무덤 폭, 석재 가공방식 등이 표준화된 모습을 보여, 공통점을 보이는 이러한 석실들을 ‘능산리형 석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내부구조는 천장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우선 천장의 형태는 볼트(Vault)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뉘는데, 볼트형은 아치형과 같은 천장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우며, 평천장은 흔히 볼 수 있는 평평한 형태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이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으로 나뉜다. 육각형 평천장은 아치형과 사각형의 중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백제의 무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볼트형 천장에서 육각형 평천장 구조, 다시 사각형 평천장 구조로 변화해갔다고 보고 있다. 볼트형 천장은 부여 이전의 백제 왕도인 충청남도 공주(웅진)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나 송산리 6호분(왕릉)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평천장 구조의 경우에는 학자에 따라서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변하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어 축조 시기를 확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전자(볼트→육각형→사각형)를 기준으로 능산리 고분군 내 무덤의 축조 시기를 능산리 2호분→능산리 3호분과 5호분→능산리 1호분의 순서대로 보는 경우가 더 많다.

능산리 2호분은 볼트형의 천장 구조가 송산리 고분군의 아치형 천장과 비슷하여 능산리 고분군 내에서 가장 빨리 축조된 고분으로 보고 있다. 송산리 6호분이나 무령왕릉처럼 벽면을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여 아치형을 이루도록 쌓아 올렸다. 송산리 고분군과의 차이점은 재료가 벽돌에서 돌로 바뀐 점일 것이다. 직사각형 평면의 널방에, 남벽 중앙에 널길이 있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사비로 천도한 성왕이 무덤의 주인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현재까지 삼국시대 왕의 무덤 중 무령왕릉 외에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은 없음으로, 확정하기에는 아직 세밀한 검증이 더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능산리 3호분과 5호분도 잘 다듬은 판석으로 벽면과 천장을 구축하였다. 다만 벽면을 수직으로 놓은 다음 판석을 45도 각도로 꺾어 올리고,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 돌을 올려놓아 천장을 육각형 구조로 만들었다. 남벽 중앙에 널길이 있는 횡혈식석실분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고분들과 같다.

능산리 1호분은 잘 다듬은 판석으로 동벽과 서벽, 북벽을 세워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다. 벽 위에 그대로 뚜껑 돌을 올려서 천장까지 완전한 사각형이 된다. 그리고 널방(무덤방)의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능산리 고분군의 고분 중 가장 유명한 고분이기도 하다. 벽면의 사신도뿐만 아니라 천장에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그려 넣어 백제 회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손꼽힌다. 사신도는 송산리 6호분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를 이유로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신도 벽화는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지역의 고분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러한 사신도는 중국에서 전해진 사신 사상과 관계가 있다. 사신 사상은 방위를 가리키는 신과 관련되며, 본래는 다섯 신이 있다. 이는 다시 28수(宿)이라는 성좌(星座)와 관계되는데, 성좌를 중앙, 동, 서, 남, 북의 5방위로 나누고 이 성좌의 형태를 5가지 상상의 동물로 정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방위신(方位神)이라고도 하며, 각각 정해진 색이 있다. 중앙은 황룡(黃龍),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다. 이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유래된 사신 사상은 처음에는 군진(軍陣)에서 활용되다가 점차 일상생활로 퍼져, 풍수지리사상과도 연결된다. 한반도에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적어도 한사군(漢四郡) 시대(기원전 108년부터)에는 이미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신도와 관련한 일상생활의 기물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알 수 없지만, 백제는 송산리 6호분의 벽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된다.

사신 사상은 고분 내 벽화뿐만 아니라, 고분 자체의 입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7호분을 정상에 두고 그 아래에 전후로 3기씩 2줄로 배열되어 크게 삼각형의 모양을 이룬 채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능선이 돌출되어 있고, 앞에는 하천이 지나고 있다. 그 남쪽의 들을 건너면 필서봉이 보인다. 이 형국은 동 청룡, 서 백호, 남 주작에 낙산(樂山), 북 현무의 상응(相應)하며 거의 오행 사상과 관련된 전형적인 지리 배치라고 할 수 있다.

4 죽은 왕을 모시는 사찰, 능산리사지와 고분군

능산리사지는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하며, 능산리 고분군과는 불과 100m 정도만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왕릉을 수호하고 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인 능사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1992년~2009년까지 총 11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고, 동·서·남쪽에 회랑이 있는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통해 전형적인 백제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때 절터의 중심에 있는 목탑터(木塔址)의 심초석 위에서 사리를 봉안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석조사리감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567년(위덕왕 13년) 백제 위덕왕[창왕(昌王)]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 고 적혀있어, 이 사찰이 능사였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 주었다. 위덕왕의 아버지이자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능산리사지에서는 국보 제288호로 지정된 석조사리감 외에도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견되어 백제의 높은 공예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 사찰의 동·서·북쪽을 둘러싼 배수로와 배수로를 건너는 목교 및 석교를 통해 백제의 우수한 건축 기술도 확인할 수 있으며, 금당 서쪽 방의 온돌 시설과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공방지도 있어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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