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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한국을 대표하는 석탑이자 비극을 간직한 탑

미상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대표 이미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사비시대의 왕도인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터에 있는 백제의 석탑이다.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이 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는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형적인 한국석탑 양식의 출발점으로 그 가치가 높으며, 해당 건축 기술이 신라, 고려에 이어져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석탑 근처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명문와에서 ‘정림사(定林寺)’라는 단어가 확인되어, 해당 절터를 정림사지, 석탑을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와 발견 전까지는 당(唐)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탑신에 새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 때문에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 석탑의 시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건립

한국의 불탑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고 전국 각지에 사찰을 들어서면서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나, 당시의 불탑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져 남아있는 실물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현재는 그 실상을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불교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4세기 후반에 처음 한국에 전래된 점을 통해, 처음에는 중국식 탑파 양식인 고층누각(樓閣) 형식의 목조탑(木造塔)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조영되는 불탑이 증가하며, 각국은 자연히 영토 내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여 탑을 쌓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은 엄청난 양의 황토 진흙과 풍부한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벽돌을 만들어 전탑을 쌓아 ‘전탑의 나라’가 되었고, 일본은 풍부한 목재를 이용하여 많은 목탑을 쌓은 ‘목탑의 나라’라고 불리었다. 한국의 경우는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채취되는 자연적인 조건 덕분에 후대로 갈수록 석탑이 보편화되어 ‘석탑의 나라’라고 불리게 된다.

이처럼 한국의 불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썩기 쉬운 나무에 비해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함에 따라 보다 단단하게 탑을 조영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오래 유적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중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의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석탑이면서도 세부 구조는 목조가구를 그대로 모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불탑의 재료가 목조에서 석조로 옮겨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석탑의 등장 시기를 추정하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 수법이 특이하고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미륵사지 석탑과 관계하여, 양 탑의 건립순서에 논란이 있다. 학자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나, 거의 동시대로 보고 있다. 보통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조금 더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륵사지 석탑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살짝 늦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정림사는 538년(성왕 16)의 부여 천도와 함께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백제 왕실이 익산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시대이고, 미륵사는 무왕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어 , 양 탑의 건립 시기를 반대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양 탑은 한반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들이며, 이를 통해 석탑의 등장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3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양식과 신라·일본에의 영향

정림사지는 강당을 갖춘 백제식 1탑 1금당 양식으로, 이는 백제 사찰의 특징이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양식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역시 백제 고유의 석탑이면서도 신라에 건축 기술에서 영향을 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그 형식이 잘 보이지는 않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다시금 형태가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석탑의 모본으로 가치가 높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약 8.33m이며, 구조는 전형적인 석탑에 걸맞게 아래에 지대석(址臺石)을 깔고, 기단부(基壇部)를 구축한 뒤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5층 쌓고, 맨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완벽한 비례미와 균형미를 가지고 있다. 석탑에 쓴 척도는 1척(尺)이 약 35cm이다. 탑의 지대석 너비는 14척이고, 7척이 탑의 기본 척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층 탑신과 1층 지붕돌을 합해 7척, 1층 탑의 너비도 7척이다. 탑의 기초가 되는 기단(基壇)은 높이가 7척의 반인 3.5척, 너비는 3.5척을 더한 10.5척이다. 이 밖에도 탑의 3층과 4층을 합한 높이나 2층과 5층의 합도 거의 7척에 수렴하는 등, 7척을 기준으로 비례와 균형을 맞추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기단부는 이중 기단으로 하층 기단을 약화시킨 초기적 이중 기단이다. 지표상에 8매의 지대석을 높고 그 위에 다시 저석(底石) 8매를 둔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와 1탱주(撑柱 : 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기둥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긴 기둥. 우주와 우주 사이의 기둥), 면석이 16매로 조립된 중석(中石)을 올려놓았다. 중석 위에 갑석(甲石)도 8매로 구성하였으며,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다듬어 낙수면(落水面)을 이루었다.

총 5층의 탑신부는 구성형식에서 큰 차이는 없으나 석재 개수가 올라갈수록 줄어들며, 상층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1층의 탑신은 별석재 12매로 구성되었으며 민흘림이 뚜렷한 4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2장의 벽판석으로 탑신의 면석을 이룬다. 2층 이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주의 민흘림이 뚜렷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목조건축에서 보이는 오금법(기둥이 안쪽으로 조금 쏠리는 안쏠림이라는 기법)이 미륵사지 석탑에서와 같이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받침에서도 각형반석 4개와 그 위에 8매의 각을 죽인 사능형(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설계하여 목조 건축의 공포 부분을 요령 있게 표현한 부분이 확인된다.

2층 이상의 탑신은 1층에는 없는 탑신괴임이 있다. 상륜부는 없어져 불명확하나 노반과 복말이 탑의 정상에 있고, 5층 옥개석까지 찰주공이 뚫려 있는 점, 정림사지 내에서 원형 구멍이 있는 연꽃무니 돌조각(상륜의 파편으로 추정)이 출토된 점에서 볼 때, 탑의 상륜부는 석제상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백제의 석탑 양식은 이후 이웃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확인된다. 백제는 당시 주변 국가보다 건축술이 발달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탑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신라의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여 탑의 건립을 맡긴 일 이나, 일본 초기사원의 창립을 위하여 사공(寺工)이나 기와박사 등이 건너간 사실 등에서 알 수 있다. 또 웅진ㆍ사비기 백제 불교 사찰들에서 유행하는 와적기단은 고구려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신라에서는 몇몇 곳에서 아류작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일본에서는 사찰뿐만 아니라 관아건물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백제의 기술이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층탑인 석탑사 삼층석탑(石塔寺 三重石塔)은 백제석탑의 요소가 짙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석탑사를 창건하고 탑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석탑사 삼층석탑을 모범으로 다른 석탑들이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령이기(日本靈異記)』에도 백제 부흥 운동 시기 백촌강(白村江)에 참전한 일본의 호적이 귀국 후 백제계 승려와 사원을 조영했다는 이야기 등도 참고가 된다.

4 나당연합군에 상처 입은 정림사지 오층석탑, ‘평제탑’이란 수모

백제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가치가 높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위치한 정림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지금의 충청도 부여) 도성 내에서도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왕궁의 남문에서 남으로 곧게 이어지는 도로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을 도성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여 그 위상을 높이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이러한 사찰을 활용하였다고 평가된다. 정림사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통해 정림사 안에서도 정중앙에 서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위상 역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큰 수모를 겪게 된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당시 빠르게 퇴각하면서 승전비(勝戰碑)를 세울 시간이 부족해지자, 수도 정중앙에 있으면서 국가사찰이었던 정림사지의 석탑에 백제 정복을 기리는 전승기념문을 새겨놓고 돌아갔다. 이것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비문은 4면에 모두 적혀있으며, 1면에 24행, 2면 29행, 3면 28행, 4면 36행, 총 117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가 새겨져 있어 총 2,216자가 적혀있다. 비문은 비명으로 시작한다. 곧바로 중국 낙주(洛州) 하남의 권희소(權懷素)가 쓰고 660년[당 현경(顯慶) 5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는 글귀가 이어지고, 당의 장군 소정방의 위업이 길이 남으라는 문구로 끝난다. 그중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년)을 비롯하여 태자, 좌평 이하 칠백여 명을 당으로 압송하였고, 멸망한 백제 땅에는 5도독과 37주 250현을 두었다는 기록도 포함된다.

정림사가 사찰의 기능을 상실한 뒤, 정림사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전승기념문, ‘대당평백제국비명’의 제목을 인용하여 ‘평제탑’, 또는 ‘평제비’라고 불렀다. 백제 도성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았던, 백제를 대표하던 사찰의 탑이 반대로 백제 멸망을 상징하는 비석이 되어 이후로도 계속 백제의 석탑보다는 백제 멸망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문화의 상징에서 멸망의 상징이 되어 당의 승전을 기리는 비석으로 수모를 받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명문와에 ‘정림사’라는 단어가 확인되고 나서야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고 불리며 ‘평제탑’이라는 명칭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기와에는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태평 8년은 1028년(고려 현종 19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사찰이 고려시대에도 사찰로서 운영되고 있었고, 정림사라고 불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평 8년은 정림사를 중수한 해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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