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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佛國寺]

통일신라의 불국토(佛國土)가 구현되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 대표 이미지

경주 불국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사적 및 명승 제1호 불국사(佛國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8세기 중엽 신라 귀족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목조 건축과 석조 기단이 잘 조화되어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라고 평가된다. 불국사는 당시 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어 당대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불국사는 조선 초기까지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부 전각과 석탑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1805년(순조 5)까지 부분적인 중수를 이룬 것으로 보이나 신라 때와 같은 사찰의 모습으로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야 총 2차의 수리공사로 복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 후 1973년에 복원 공사를 완료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2 김대성,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은 745년(경덕왕 4)~750년(경덕왕 9)에 중시(中侍)를 역임한 진골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문량(金文亮) 또한 706년(성덕왕 5)~711년(성덕왕 10)에 중시직을 맡아 국정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김대성은 진골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중시직 사임 후에 대규모의 불사(佛事)를 시작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에는 경덕왕대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김대성은 신문왕대(681~692)에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여인이었던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났다가 죽고, 이후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서 다시 태어났다. 장성한 뒤에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서 사냥한 곰이 꿈에 나와 대성을 꾸짖었다. 이에 그는 곰을 사냥한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石佛寺]을 창건하여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사중기(寺中記)’에 따르면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774년(혜공왕 10)에 김대성이 죽자 국가가 불국사를 완성시켰다고 전해진다. 공사가 완료된 시기가 혜공왕대인지 그 이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1966년 석가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묵서지편으로 각각 1024년과 1038년에 찬술된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에 창건시기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 무구정광탑(석가탑)이 742년(경덕왕 1)에 조성되어 혜공왕대(765~780)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불국사 창건시기가 다소 소급된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편찬된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과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을 통해서도 불국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3 창건의 사상적 배경과 왕실의 영향

김대성은 불국사 창건에 시주를 하고, 공사의 많은 부분을 감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사는 고도의 기술과 경제적 자원이 뒷받침 되어야 했기 때문에 단순히 개인의 불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김대성이 죽고 난 이후 국가가 그를 대신하여 불국사의 공사를 완료시켰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불국사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대성이 불국사를 조성하는데 영향을 받은 불교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며 신라 의상(義湘)의 제자들로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는 승려 표훈(表訓)과 신림(神琳)을 머무르게 하였다. 표훈의 경우에는 김대성이 직접 그를 찾아와 화엄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어 둘 사이의 긴밀한 교류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바탕으로 김대성은 표훈의 가르침을 불국사 조성에 반영하여 화엄세계를 구현하였다. 그런데 표훈은 천궁을 왕래하며 경덕왕의 후사 문제를 해결해 준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로, 높이 숭앙되고 있었던 국가적인 승려였다. 따라서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뿐만 아니라 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고승 표훈과 왕실이 모두 관련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덕왕대는 신라의 문화가 크게 번성하여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이때 여러 절이 창건 및 중수되었고, 대형 종과 불상 등의 불교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이로 보아 깊은 불심을 지니고 있었던 경덕왕이 불국사 창건을 후원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나아가 불국사가 왕실 추복(追福)의 성격을 지닌 원찰(願刹) 또는 호국(護國) 사찰로 경영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4 불국사의 가람 배치와 불국토의 구현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당시 신라에서 신앙되었던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각각의 원(院)에 모셔진 다원식(多院式) 구조이며, 봉안되는 불상에 따라 각 불전이 영역적으로 구별된다. 이는 각 부처와 보살들의 불국토를 체계화하고 통합하고자 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대웅전(大雄殿)과 극락전(極樂殿), 비로전(毘盧殿), 관음전(觀音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구역으로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대웅전은 마당에 석가탑(釋迦塔), 다보탑(多寶塔) 등 2개의 탑과 강당이 갖추어진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형식이다. 2개 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서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과 함께 하기를 청해 두 부처가 함께 앉았다는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쪽 삼층석탑의 본래 명칭은 석가모니가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줄여서 석가탑이라고 한다. 동쪽의 다보탑은 다보불이 석가모니 옆에서 상주하며 설법을 증명해준다는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 삼층석탑(국보 21호)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간략화하여 통일 초기의 석탑보다 각 부위에 사용된 석재의 수가 적다. 1996년에는 석가탑의 해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 때 제 2층 중심의 사리를 보관하는 공간에서 금동제 사리 외함(金銅製舍利外函)과 각종 공양구(供養具)가 발견되었다. 이 중에 사리 외함에 들어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126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평가된다.

삼층석탑은 여기에 얽힌 전설에 따라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경덕왕대에 석공 아사달이 신라에 와서 다보탑을 완성한 후 삼층석탑을 쌓고 있었는데, 이때 아사녀가 남편인 아사달을 찾아 경주에 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이후 아사녀는 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에서 매일 남편을 기다리다가 어느 날 물에 비친 탑의 환영을 보고 연못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 인해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고 하고, 삼층석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고 하여 ‘무영탑’이라 하였다.

다보탑(국보 20호)은 목조 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석조화한 뛰어난 작품으로,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지만 팔각 형태를 조화롭게 반복시킨 것도 주목된다. 다보탑의 경우는 1925년 일본에 의해 전면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탑 속의 많은 유물들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매우 안타깝다.

대웅전의 북쪽에 있는 비로전에는 화엄종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 옆에는 대중적 신앙대상인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다. 마지막으로 정토사상과 연관이 깊은 아미타불이 봉안된 극락전은 대웅전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방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방위적 개념이 표현되어 있다. 비로전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과 극락전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은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꼽힌다.

이러한 불전들은 불국사의 석조 기단 위에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의 영역은 석조 기단을 기준으로 기단 위에 위치한 부처의 세계, 즉 불국토와 그 아래에 위치한 일반인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이때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석조 기단 옆에 배치되어 있는 동쪽과 서쪽의 계단이다. 대웅전에 가기 위해서는 동쪽의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로 올라가 자하문(紫霞門)을 통과하면 된다. 또한 극락전의 경우에는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로 올라가 안양문(安養門)을 통과하면 된다. 이 다리들은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각각 국보 23호와 24호에 지정되어 있다. 또한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홍예교(虹霓橋)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불국토를 형상화 한 가람배치는 석굴암과 더불어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에 영향을 미친표훈의 화엄사상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성은 불국토의 경지를 구분한 표훈의 사상을 활용하여 우선 부처의 영역으로 토함산 정상의 석굴암을 설정하고, 여기에 부처가 깨달은 직후의 모습을 형상화한 본존불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토함산 기슭의 불국사에는 다양한 불국토의 모습을 장식하여 토함산을 하나의 화엄세계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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