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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비명[四山碑銘]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네 개의 걸작

885년(헌강왕 11)

사산비명 대표 이미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사산비명(四山碑銘)」은 통일신라시대 지식인 최치원이 찬술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대숭복사비명」,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말한다. 최치원은 왕의 명을 받아 8년에 걸쳐 「사산비명」을 찬술하였다. 「사산비명」은 신라 승려인 진감선사, 낭혜화상, 지증대사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인 숭복사의 창건내력을 담고 있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에 머무를 당시 저술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더불어 최치원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2 사산비명의 구성과 최치원

「사산비명」은 네 곳의 산(四山)에 있는 비명(碑銘)을 일컫는 말로써,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銘)」 (이하 「진감선사비명」로 약칭함),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이하 「낭혜화상비명」로 약칭함), 초월산의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 (이하 「숭복사비명」로 약칭함),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이하 「지증대사비명」로 약칭함)을 말한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에 의해 찬술되었는데, 885년(헌강왕 11) 3월에 당(唐)으로부터 신라(新羅)로 귀국한 뒤 최치원은 왕의 명을 받아 8년에 걸쳐 「사산비명」을 지었다. 이러한 「사산비명」은 신라 승려인 진감선사, 낭혜화상, 지증대사의 행적과 업적, 그리고 신라왕실의 원찰(願刹)인 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비명은 위인을 추모하고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작성하며, 서문(序)과 명문(銘)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문에는 주인공의 전기를 기재하고 주인공에 대한 업적과 찬양은 명문에 기록한다. 비명의 중심은 명문이지만, 주인공의 위업을 강조할 경우는 서문에 전기나 서적을 장황하게 쓰기도 한다. 「사산비명」에는 서문이 명문과 함께 강조되어 서술하고 있으며, 각 비명의 내용 구성에 차이가 있다.

「진감선사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은 서문의 처음 부분에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선사의 업적과 사찰의 위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서 진감선사의 생애나 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설명하며, 끝부분에 비명의 건립 동기나 찬술 인연을 적은 다음 명을 썼다. 「낭혜화상비명」은 비명의 건립 동기와 낭혜화상의 생애를 서술한 다음, 그의 업적을 찬자의 생각인 논(論)을 통해 제시하면서 명을 붙였다. 「지증대사비명」은 불교 선종(禪宗)의 역사를 간단히 기술하고 여섯 개의 바른 것(六是)과 여섯 개의 기이함(六異)을 중심으로 지증대사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비명의 건립 동기를 음기(陰記)로 작성하였다. 「낭혜화상비명」에서 비명의 건립 인연은 「진감선비명」, 「대숭복사비명」과 달리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어있다. 또한, 「지증대사비명」의 음기는 서에 들어갈 내용을 따로 떼어서 붙였다.

이처럼 「사산비명」의 서문은 찬자(최치원)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3가지의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치원이 「사산비명」의 구성을 달리한 것은 전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일정한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최치원의 입장에서 각 선사의 공덕이 다르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비명의 구성도 최치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당시 최치원이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형식으로 전기를 구성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짧은 기간, 첫 번째로 찬술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쌍계사 경내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는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의 탑비 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비의 일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비명의 내용은 여러 탁본과 판본을 통해 완전하게 알 수 있다.

「진감선사비명」은 최치원이 찬술한 네 개의 비명 가운데 첫 번째로 완성되었다. 최치원은 진감선사가 입적한지 36년이 지난 886년(정강왕 1)에 정강왕(定康王)에게 「진감선사비명」의 찬술을 명령받고, 887년(정강왕 2)에 작성을 완료하였다. 아울러 전서의 제액과 비문의 글씨도 썼다. 「진감선사비명」의 찬술 기간은 1년여 남짓 되는 짧은 기간인데, 이는 최치원이 비명을 빨리 완성할 것을 독촉받았기 때문이다. 신라가 「진감선사비명」의 찬술을 거듭 독촉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사유는 알 수 없다. 「진감선사비명」은 찬술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다른 「사산비명」에 비해 현저히 적은 2,500여 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 서술 면에서도 다른 것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견해가 있다.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서문에는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하고, 본 내용에서도 노장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유·불·도를 하나로 파악하는 최치원의 사상적 입장과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군주는 백성을 부리는데 시기적절하게 해야 하며, 신하는 군주의 잘못에 대하여 올바르게 간언해야 한다는 내용을 통해 최치원의 정치의식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진감선사비명」에는 쌍계사의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 사실 등도 기록되어 있다.

4 신라 말의 혼란과 최치원의 고민이 담긴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사 터에 있으며,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비의 높이는 251cm, 너비는 148cm로 신라 석비 가운데 최대 크기를 자랑하며, 글자의 수도 58행 × 96자, 도합 5,120자(본문 5,022자, 세주 98자)로 가장 많다. 비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여서 비명의 대부분을 판독할 수 있다.

최치원은 낭혜화상이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진성여왕 4)에 비명을 찬술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최치원은 낭혜화상의 문도가 바친 행장(行狀)을 바탕으로 비명 찬술에 착수하였지만, 비명 작성을 완성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최치원이 「낭혜화상비명」의 내용을 작성하면서 비문의 찬술을 명령한 진성여왕에 대한 안위에 대하여 아무런 시사도 하지 않은 점, 경문왕(景文王)을 가리켜 ‘선대왕(先大王)’이라 한 점 등을 근거로 진성여왕이 897년 효공왕에게 양위하기 전에 찬술을 마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비석의 건립 시기 역시 비명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비명의 서자(書者)인 최인연(崔仁渷)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헌강왕 11년(885)에 입당하여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였다. 즉 비명을 비면에 새기기 위한 판하문(版下文)을 쓴 것은 909년 이후가 된다. 「낭혜화상비명」에는 최인연의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는데, 최인연의 직함은 조청대부(朝請大夫) 전 수집사시랑(前守執事侍郞)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924년(경애왕 원년)에 건립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碑)」의 직함과 같다. 따라서 「낭혜화상비」의 건립 시기는 대략 92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비명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8대손인 낭혜화상이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이 김헌창의 반란에 연루되어 신분이 진골에서 득난(得難)으로 강등되었다는 것,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에게서 화엄학을 배웠다는 것, 821년(헌덕왕 13) 중국에서 유학하고 선승 보철(寶徹)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는 것, 중국에서 수행하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는 것, 여러 번에 걸쳐 왕명을 받아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문왕 사후에 성주사에 되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에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낭혜화상비명」은 889년(진성여왕 3) 농민봉기 이후에 찬술되었으며, 분량도 5,120자이다. 최치원은 찬술 과정에서 혼란한 사회 현실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비명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최치원은 「낭혜화상비명」 찬술을 통해 첫째, ‘군신 관계에서 군주는 인재를 잘 살피고 등용하는 것을 중시하며, 군주는 신하들로부터 간언을 잘 듣고 행해야 한다.’ 둘째, ‘지방 통치에 있어서 지방 수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셋째, ‘개혁을 추진할 때는 그 시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낭혜화상비명」에는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언급되어 있어 신라 하대 불교 학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낭혜화상이 국왕의 자문에 응할 때 유교 경전을 인용하고 있어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사료가 된다. 또한 ‘득난(得難)’ 등의 표현을 통해 당시 신라 골품제(骨品制)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골품제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5 마지막으로 찬술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국보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는 273cm, 너비 164cm, 두께 23cm이다. 지증대사가 882년(헌강왕 8)에 입적하자, 헌강왕은 885년(헌강왕 11) 최치원에게 「지증대사비명」을 찬술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비명 찬술이 지체되자, 지증대사의 문인인 영상(英爽)이 최치원을 찾아와 비명 찬술을 독촉하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지증대사비명」은 「사산비명」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 찬술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완성되었다. 이처럼 비명 찬술이 지체된 것은 다른 비명들과의 우선순위 경쟁에서 밀린 것이라는 견해와 889년의 농민봉기가 사벌주(상주) 지역에서 발생한 뒤, 오랫동안 해당 지역이 반란을 일으킨 무리(叛徒)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연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렇듯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비문은 다시 비석으로 세워지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더욱이 비석을 세우는 데는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와 가은현(加恩縣) 장군인 희필(熙弼)이 그 비용을 내었는데, 이는 당시 신라에서 비석을 세우는 비용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비명은 지증대사가 진골 출신으로 824년(헌덕왕 16)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한 이후 여러 사찰에서 교화 활동을 벌였다는 것, 879년(헌강왕 5)에 심충(沈忠)이 희사한 땅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선종 9산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을 개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는 것, 지증대사는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의 월지궁(月池宮)에 나아가 직접 설법하기도 하였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아울러 「지증대사비명」에는 신라 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또한 지증대사가 신라 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던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 비명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토지 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이 기록되어 있어 관련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6 숭복사의 중창(重創)과 대숭복사비명

「사산비명」 가운데 앞서 살펴본 3개의 비명이 신라 승려인 진감선사, 낭혜화상, 지증대사를 위해 찬술된 것이라면 「숭복사비명」은 승려가 아닌 신라 왕실의 원찰(願刹)인 숭복사를 위해 찬술되었다. 앞의 3개의 비명은 비가 남아있는 반면, 「대숭복사비」는 늦어도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손상되어 현재는 15편의 비석 조각만 남아있다. 그러나 「숭복사비명」은 다른 비명들과 함께 사산비명의 필사본이나 주석서에 기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숭복사(崇福寺)는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지은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으며, 이후 원성왕(元聖王)이 죽자 곡사에 원성왕릉을 만들면서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겼다. 그 뒤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보고 절을 증축하였으며,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었다.

「숭복사비명」은 서문과 명문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문은 도입부와 전개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문의 도입부는 숭복사를 중창한 임금의 덕과 나라의 태평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선사의 비명에서 맨 앞부분에 선사의 업적을 기리고 찬양하는 내용과 비슷한 구성이다. 전개부에는 숭복사의 중창 과정이 담겨있는데, 숭복사의 유래와 기원, 경문왕과 곡사의 중창, 헌강왕의 등극과 숭복사 개칭, 정강왕의 비명 찬술 명령 계승, 진성여왕의 비명 찬술 독려, 그리고 최치원의 비명 찬술 동기와 과정 등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사찰의 창건과 중창 과정은 시대에 따라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숭복사비명」은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계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 신앙을 알려주고 있으며,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나타나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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