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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부처의 소리로 중생을 깨우치다

771년(혜공왕 7)

성덕대왕신종 대표 이미지

성덕대왕신종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성덕대왕신종은 771년(혜공왕 7) 제작된 범종으로 국보 제29호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3개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8.9톤이다. 화려한 문양과 사실적인 비천상의 표현 등 완성도 높은 전체 문양의 배치와 조화로운 모습 등은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종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1,000여 자의 명문은 당시 사회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 성덕왕의 추모를 위한 마음을 담아 제작하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는 이 종을 제작하게 된 배경과 의미가 잘 적혀 있다.

효성스러운 후계자인 경덕대왕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왕업을 계승하여 여러 일에 힘썼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 세월을 대할수록 그리움이 일었고, 거듭 아버지를 떠나보내어 대궐에 나아갈수록 슬픔은 더해졌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점점 슬퍼지고 영혼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삼가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1장(丈)이나 되는 종 1구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우리 성군(효성왕)께서는 행실이 조상에 합치되고, 그 뜻이 지극한 이치에 부합하여 빼어난 상서로움은 지난 어느 세월보다 기이하며, 아름다운 덕은 이 시대의 으뜸이다. …
태후(太后)께서는 은혜로움이 땅처럼 공평하여 백성을 어진 가르침으로 교화하고, 마음은 하늘처럼 맑아 부자(父子)의 효성을 장려하였다 … 이에 〈경덕왕의〉 유언을 돌아보고 마침내 오랜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담당 관청에서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들은 모형을 만드니, 때는 신해년 12월이었다. 이때 해와 달이 교대로 빛을 내고 음양이 기를 조화롭게 하고, 바람이 온화하고 하늘이 고요하여 신기(神器: 종)가 완성되었다.

이처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과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구리 12만근을 들여 큰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덕왕을 이은 혜공왕이 8세에 경덕왕을 이어 즉위하자 만월부인이 섭정을 하였다. 이때 아버지와 아들의 효성을 장려하여 경덕왕의 유언을 잇고자 다시 종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였고, 771년(혜공왕 7)에 종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성을 장려하고 경덕왕의 유언을 따라 종을 주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성덕대왕신종의 주조 목적은 죽은 부모의 추모를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있었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성덕왕을 위하여 제작하고자 했으므로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알려졌다.

봉덕사는 성덕왕이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願刹)이다. 한편 봉덕사 창건 주체가 성덕왕이 아닌 효성왕으로, 효성왕이 738년(효성왕 2)에 그의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라고도 한다. 어떤 의견이라도 봉덕사는 신라 중대 왕실의 원찰로서 기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된 전후 시기에 봉덕사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여 성덕왕대부터 효성왕, 경덕왕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3 봉덕사의 폐사와 성덕대왕신종의 운명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은 조선시대까지 본래 자리를 지키다가 봉덕사가 수몰됨에 따라 이곳 저곳 옮겨 다니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봉덕사가 북천에 침몰하자 1460년(天順 4, 세조 5)에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달았다.’고 하였다.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봉덕사는 수몰되었다고 하였으므로 1454년 당시에는 이미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에 ‘경주 봉덕사의 큰종과 유후사(留後司) 연복사(演福寺)의 큰 종은 헐지 말게 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1424년에는 봉덕사가 수몰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덕사는 1424년과 1454년 사이에 큰 홍수로 인한 북천의 범람으로 수몰되었다고 판단된다. 이후에 봉덕사종은 한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는데, 1460년(세조 5)에 영묘사 곁으로 옮겼으나 화재로 인해 이 절도 전소되었다. 다시 1507년(중종 2)경 경주부윤 예춘년(芮椿年)이 남문 옆의 종각(鐘閣)으로 옮겨서 군사들을 징집할 때에 사용하였다. 이처럼 성덕대왕신종은 본래 자리를 잃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게 되었다. 봉덕사종과 종각은 1916년 5월 12일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옛 경주박물관, 즉 현재의 경주문화원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에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4 성덕대왕신종의 아름다운 소리와 문양

우리나라 범종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었겠지만 현재는 8세기 이후 만들어진 종들 10여 개가 남아 있다.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상원사 범종, 청주 운천동 출토 범종이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밖에 선림원 범종·실상사 범종은 그 일부가 전한다. 한편 일본에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범종으로는 상궁신사(常宮神社) 범종 즉 일명 연지사(蓮池寺)종·우좌신궁(宇佐神宮)에 보관 중인 송산촌대사(松山村大寺) 종·광명사(光明寺) 소장 신라 범종·주길신사(住吉神社) 소장 신라 범종·운수사(雲樹寺) 소장 신라 범종이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모으고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고 이 소리를 통해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고도 믿는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서도 종을 통해 일승(一乘)의 원만한 소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서 중생이 괴로움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 다른 독창적인 발전을 해왔다. 특히 상단 부의 용뉴(龍鈕), 음통(音筒)은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용뉴는 용의 형태로 만들어져 붙여진 이름으로, 종을 매달기 위해 종의 윗부분에 만든 고리 부분을 가리킨다. 용이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발톱으로는 종의 천판(天板)을 누르고 있다. 용뉴의 뒷 부분에는 둥근 형태의 음통이 있는데, 한국 범종에서만 나타난다. 음통의 내부는 비어 있고 음통과 종신(鐘身) 내부가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음통은 한국 종의 아름다운 울림소리와 관련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의 몸부분인 종신(鐘身)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약간 벌어지며 가장 아래 부분인 종구(鐘口)가 팔릉형, 즉 꽃 모양으로 굴곡진 형태는 이 종의 특징이다. 능형부마다 연꽃을 넣고 그 양쪽에서 당초 덩굴이 대칭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고 있다. 종신의 위에도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당좌, 비천상, 명문이 배치 되어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비천(飛天)은 대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들고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이다. 비천 주위에는 보상화를 구름같이 피어 오르게 하였다. 비천들은 모두 4명으로 종신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양쪽에서 명문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다른 통일신라시대 범종들과 비교하여 문양의 표현 방법과 조각 기법이 매우 화려하고 우수하며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종신에 새겨진 1,000여 자의 명문을 통해 당시의 불교사상과 신앙 정치세력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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