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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분 출토 유리제품

오색찬란한 빛깔의 향연

미상

신라 고분 출토 유리제품 대표 이미지

유리제잔

e뮤지엄(국립경주박물관)

1 개요

유리는 모래와 불의 조화로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주재료는 산화규소(SiO2 실리카)와 용유점을 낮추는 첨가제인 융제(재, 내트론 등), 융제의 풍화를 막아주기 위한 안정제(산화칼슘 등), 색을 결정하는 착색제(산화코발트 등)로 구성된다. 유리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약 4,500년 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1세기 경 대롱불기 기법으로 유리 제작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때 로만글라스(roman glass)라고 하는 유리제품이 유럽 대륙과 아시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2세기 경 중국 철기문화와 함께 유리도 들어왔다고 본다. 유리는 융제의 화학조성에 따라 계통이 다르다. 우리나라 초기 유리는 납-바륨유리였고 기원 전후에 포타쉬 유리가, 2세기 경에는 소다유리가 유입되면서 6세기까지 유행하였다. 그 이후는 사찰이나 공방을 중심으로 초기의 납-바륨유리가 제작되는 한편, 새로운 납유리가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 제품으로는 부여 합송리나 당진 소소리 유적 등의 유리제 대롱구슬(납-바륨유리)이 있다.

신라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리제품은 구슬류와 팔찌, 유리그릇을 비롯하여 일부 귀걸이나 말띠꾸미개에 유리 알갱이를 넣어 만드는 경우도 있다.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유리구슬류로 보통 목걸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대형 적석목곽분에서는 가슴걸이 형태로도 나타날 만큼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신라 유리그릇은 주로 황금 장신구와 함께 출토되며 흑해 연안을 거쳐 초원길(草原路)을 통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오색영롱한 빛, 유리구슬

유리구슬은 대부분 둥근 형태이지만 만드는 방법에 따라 형태의 차이가 있고 길쭉한 원통 모양의 것도 있다. 구슬은 유리로 만들기 전부터 흙으로 구워 만들거나 돌이나 옥, 수정 등을 다듬어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 대부분의 구슬은 유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양한 빛깔을 나타낼 수 있었다. 대체로 푸른색 계통의 유리구슬이 많다. 신라의 유리구슬은 주로 소다 유리 계통이며 대롱불기 기법으로 만들었다. 구슬은 하나의 개체로 만들어서 수십 또는 수백 점을 연결해서 목걸이로 만들기도 하지만 구슬들이 연달아 붙은 것들도 있고 유리 속에 다른 색의 유리를 집어넣은 상감유리구슬도 있다. 또 유리와 유리 사이에 금박이나 은박을 넣기도 하고 2-3개의 다른 색 유리를 말아 만든 연리문구슬 등이 있다. 삼국시대 중 신라시대 무덤에서 유리구슬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경주 황남대총에서 확인한 약 4만 점이 넘는 유리구슬은 단일 무덤 중 최대량을 자랑한다. 신라 외에도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청색과 녹색의 유리구슬이 약 30,700여 점 정도 출토되었다. 황남대총 유리구슬 중에서 청색 계열이 많았다면 무령왕릉에서는 주황색 계열이 가장 많았다.

신라의 유리구슬은 중·소형급 무덤에서도 2~3점 확인될 만큼 사랑받는 귀중품이었다. 물론 대형 무덤에서는 수천, 수만 점의 유리구슬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무덤 내부의 흙을 일일이 체질을 하여 작은 구슬을 찾아내기도 한다. 황남대총의 4만 점이 넘는 유리구슬의 대부분은 짙고 푸른색의 구슬로 둥근 구슬이 하나씩 있기도 하지만 연이어 붙은 형태도 있다. 유리구슬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량의 구슬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대롱불기를 한 다음 그 끝을 길게 잡아 늘리는 방법이 효율적이다. 길게 만들어진 유리관을 하나씩 끊어내면 속이 빈 유리구슬이 되고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면 여러 개가 붙어있는 연주형(連珠形) 구슬이 된다. 구슬은 둥근 형태 외에도 곱은 옥모양, 장구 모양, 여러 면 모양 등이 있고 크기도 약 0.2㎝ 정도로 매우 작은 구슬에서 1㎝가 넘은 굵은 구슬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유리구슬은 짙은 청색, 청록색, 녹색, 황색, 주황색, 갈색 등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풍화가 된다. 풍화가 된 유리는 흰색이지만 여러 겹의 얇은 피막이 생기면 빛이 반사되어 무지개빛을 띠기도 한다. 이를 은화(銀化, iridecence) 현상이라고 한다.

유리구슬 중에 금빛, 은빛을 띠는 구슬을 중층(重層) 유리구슬이라고 하는데 투명 유리 사이에 금박이나 은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유리 사이에 있는 것이 금박 또는 은박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안쪽 유리는 투명하고 바깥 유리가 황색인 경우, 은박에 바깥 유리가 황색인 경우, 바깥 유리가 변색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구분해야 하며 주로 경산 임당동·조영동, 칠곡 심천리, 경주 서봉총·금관총, 김해 양동리, 부산 복천동, 고성 송학동, 산청 옥산리, 마산 현동 등 영남 일부 지역 외에 대체로 마한·백제권역에서 주로 확인된다. 중층유리구슬을 만드는 방법은 기원전 3세기 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동부 지중해 연안 및 서아시아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흑해 연안의 남러시아, 중앙아시아, 헝가리, 스칸디나비아 등 유럽과 인도네시아 자바 등 동남아시아, 한반도, 일본 등 각지에서 확인되었다.

연리문(連理文) 구슬은 안쪽 유리의 바깥 면에 여러 가지 색의 유리막대를 번갈아 두고 만드는 구슬로 얇은 띠 모양의 색상이 약간 비틀어져 보이기도 한다. 신라 지역에서 확인한 연리문 구슬은 경주 황남대총 북분의 사례뿐이며, 주로 백제 지역에서도 공주 수촌리 Ⅱ지점 2호 덧널무덤, 공주 무령왕릉, 함평 신덕고분, 나주 복암리고분에서만 발견될 정도로 매우 희귀한 구슬이다. 일본에서는 강기다마(雁木玉)라고 하는데 나라현 니자와센즈카(新澤千塚), 강산현 아카이와시(赤磐市) 이와다(岩田), 기부현 후나키야마(船來山), 아이치(愛知)현 이와츠(岩津) 무덤에서만 확인되었다. 또 베트남 부남국(扶南國)의 옥에오(Oc Eo) 유적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바닷길을 통해 연리문 구슬이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리구슬 중에 유리에 여러 색을 무늬처럼 새겨 넣은 상감 유리구슬(또는 모자이크 구슬)이 있다. 장식보검이 출토된 경주 미추왕릉 계림로 14호에서 사람과 새 무늬가 있는 상감 유리구슬이 가장 유명하다. 미추왕릉의 상감 유리구슬의 제작지를 두고 지중해나 서아시아 지역을 주목하거나, 또는 지금도 이런 종류의 유리구슬을 만들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와(jawa)섬을 두고 동남아시아로 보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최근 성분 분석 결과를 보면 칼슘 함량이 높은 소다유리로 식물의 재를 소다 원료로 사용하였고, 산화마그네슘과 산화칼륨을 함유한 서아시아 유리 성분과 유사하다. 상감 유리구슬은 주로 청색 유리에 노란색 유리를 점처럼 여러 군데 감입해 넣는데 경주 황남대총 북분과 남분, 천마총, 금령총, 식리총 등 왕(왕족)급 무덤과 경주 황오동이나 인왕동, 쪽샘지구의 무덤에서도 1~2점씩 확인되었다.

유리구슬은 요즘처럼 한 줄, 또는 여러 줄로 엮어 목걸이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반적인 목걸이와는 달리 가슴걸이는 여러 줄을 유리구슬의 중간에 긴 금판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한 것으로 앞쪽 가슴 전체를 덮거나 어깨와 등 까지를 덮는 형태이다.

3 황금보다 귀한 유리그릇

신라에서는 황금보다 귀한 것이 유리, 유리 중에서도 유리그릇이었다. 주로 4~6세기의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유리그릇은 하나의 무덤에서 1~2점 정도만 확인된다. 특히 경주 황남대총남분에서 8점, 북분에서 5점의 유리그릇이 한꺼번에 출토되었고 종류나 형태도 꽤 다양해서 주목받았다. 이렇게 한 무덤에서 여러 점이 나온 사례는 5점의 유리그릇이 나온 중국 풍소불묘(馮素弗墓) 정도이다. 신라 유리그릇 중에서 경주 월성로 가-13호 적석목곽묘의 유리잔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마립간 초기부터 서역의 유리그릇을 입수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가 국제적인 교류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리잔도 식물의 재를 이용한 소다유리로 중앙아시아 유리 원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유리그릇은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외에 경주 월성로 가-13호와 안계리에서만 확인된다. 색은 주로 연한 녹색이 도는 투명한 빛이거나 청색이 대부분이며 완이나 잔, 또는 굽다리가 붙은 잔, 봉황모양 유리병 형태가 있다. 유리그릇의 표면에 파란 유리띠나 투명유리 띠를 덧대어 물결무늬나 그물처럼 보이는 무늬(網目文)로 장식하기도 하고 금령총 유리잔처럼 청색 점무늬를 찍은 것도 있다. 이러한 청색 점무늬 유리잔은 합천 옥전 M1호의 가야 무덤에서 똑같은 형태의 잔이 확인되었다. 또 완성된 유리 표면을 깎아내어 둥근 무늬를 만들거나 짙고 연한 갈색 유리를 나이테처럼 보이도록 표현한 유리잔도 있다. 천마총 청색 유리잔처럼 육각형의 무늬로 표현된 것도 있다.

유리그릇은 황금보다 귀한 위신재였기 때문에 대부분 신라 무덤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가야에서는 합천 옥전 M1호분의 유리그릇이 유일하며 김해 대성동유적에서 확인된 투명·청색·갈색 유리 조각은 곡률이나 기포 방향으로 보아 유리그릇의 일부로 추정한다. 백제 지역에서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한 연갈색의 나이테 무늬가 있는 유리 조각이 있는데 황남대총 북분의 것과 비슷하다.

유리그릇 중의 으뜸은 황남대총 북분의 봉황 머리 모양(鳳首形) 유리병이다. 비록 깨진 것을 복원한 것이지만 형태적인 미감도 훌륭하고 유리의 두께도 매우 얇은 편이다. 유리병 입구의 가장자리를 안쪽으로 살짝 오므린 형태로 그리스에서 유행한 오이노코에(Oinochoe)처럼 생겼다. 중국에서는 이런 병의 형태를 봉황머리모양이라고도 한다. 유리병의 목에는 청색의 얇은 유리띠를 나선 모양으로 감아놓았다. 몸통은 투명한 유리 빛이며 청색 빛을 가진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있다.

신라의 유리그릇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대접을 더 받게 된다. 불교에서 유리는 귀한 보석인 칠보(七寶) 중의 하나로 매우 진귀한 재료였다. 주로 탑과 연관되어 있으며 사리기 중 가장 안쪽에 두는 작은 사리기를 유리병으로 만들었다. 그 외 공양품으로 유리구슬이 있는데 황룡사 목탑 심초석 아래와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주로 녹색이 가장 많으며 그 외 일부 청색과 황색 등이 있다. 녹색 유리구슬은 이 시기의 녹유전돌(綠釉塼)의 녹유와 비슷한 성분이다. 신라 유리사리기는 대체로 병의 형태로 경주 황룡사와 감은사, 익산 왕궁리, 의성 빙산사터, 봉화 서동리, 함양 승안사 터 등에서 나온 것이 있다. 특히 칠곡 송림사 오층 전탑의 유리 사리기는 유리병과 유리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녹색의 유리잔 표면에 둥근 띠모양의 유리(圓環文)를 덧붙였다. 이러한 원환문은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것으로 일본 쇼소인(正倉院)의 감색 유리잔과 중국 산시성(陕西省) 시안시(西安市) 허자촌(何家村) 출토 유리잔이 있다.

4 유리그릇은 어떻게 만들까?

유리그릇은 토기를 만드는 방법과 다르다. 완성된 유리는 딱딱하지만 실제로 유리는 액체와 같은 상태의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잔이나 병의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유리그릇을 만드는 최초의 방법은 코어 기법으로 막대기에 진흙이나 동물의 배설물로 심(코어)을 만들고 이 심에 유리액을 묻혀 그릇의 형태를 만든 후 안에 있는 심을 꺼내서 완성하는 방법이다.

유리구슬처럼 거푸집(mould)을 이용하여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유리 속 기포가 둥근 형태이며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잘 갈아낸 후 완성한다. 열수하법(熱垂下法)은 원통형이나 반구형의 틀에 유리판을 놓고 열을 가해서 유리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늘어지도록 해서 그릇의 형태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유리그릇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산성이 좋지 않았다.

로마시대에는 속이 빈 대롱 끝에 유리액을 감아 다른 쪽에서 입김을 불어 넣어 순식간에 유리덩이가 풍선처럼 부풀게 한 후, 풍선처럼 부푼 쪽에 다른 대롱(폰테, pontil)을 대고 원래 불던 대롱의 유리덩이를 떼어 냈다. 그다음 유리그릇의 구연부를 정리해서 만든 후 바닥 쪽 폰테를 떼어내면 완성된다. 신라 유리그릇의 바닥을 살펴보면 폰테 흔적이 남아 있다. 대롱불기로 자유롭게 유리그릇의 형태를 만들 수도 있지만, 일정한 형태가 있는 거푸집 안에 대롱불기를 하면 거푸집의 형태대로 유리그릇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대롱불기 기법은 유리그릇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대량으로 생산된 유리그릇은 여러 유통로를 통해 확산되었다.

5 사막과 초원, 바다를 넘어 온 값비싼 보석, 유리

신라 유리그릇은 이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었다. 현재까지 출토지가 밝혀진 유리그릇은 22점 정도로 대부분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었다. 유리그릇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4세기대 경주 월성로와 김해 대성동 출토품이다.

신라의 유리그릇은 로마 유리(로만글라스)와 중앙아시아(사산조 페르시아) 유리로 구분할 수 있다. 황남대총 유리그릇의 분석 결과나 중국 북연 풍소불묘 유리그릇의 존재로 보아 북방 초원길을 통해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그물무늬 유리잔과 비슷한 것이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Kara-Agachi)에서 출토되었고, 경주 계림로 무덤에서 나온 장식보검과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계통의 물건들도 이러한 교류 양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 그런데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한 유리그릇 은 표면을 갈아내어 만든 사산조 페르시아계 유리그릇으로 중국 북위(北魏)를 통해 들어왔다고 본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북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산시성(山西省) 평성(平城) 대동남교(大同南郊)에서 페르시아 유리그릇의 존재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5세기대 신라에 로마 유리그릇이 먼저 들어왔고 5세기 후반 즈음에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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