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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新羅 金冠]

황금빛 미학의 결정체

미상

신라 금관 대표 이미지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금관은 왕 또는 최상위 계층에게 있어 자신들의 신분을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과시 용품 중의 으뜸이다. 신라의 관(冠)은 재질에 따라 금관, 금동관, 은관, 동관으로 나뉜다. 초기에는 은관을, 동관은 말기에 잠시 사용하였고, 가장 전형적인 신라의 관은 금관과 금동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금관은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5점이 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본적인 형태는 비슷하다. 머리둘레를 감싸는 관테(帶輪) 위쪽으로 ‘山’ 모양 가지(나뭇가지 모양) 또는 사슴뿔 모양의 가지를 덧붙인 형태이며 표면에는 달개장식과 곱은옥을 매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주로 관테 아래에 굵은고리 드리개 1쌍~3쌍을 늘어뜨린다. 그 외에 경주 교동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작은 금관이 있는데 형태가 전형적인 것과 다르다. 교동 금관은 머리를 감싸는 금테두리 위쪽으로 세움가지 장식 3개가 단출하게 덧붙여져 있고 달개 장식만 표면에 달린 형태로 부산 복천동 10·11호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비슷하다. 또 금관 지름이 작아서 성인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황금에 대한 욕망, 금관을 찾아라!

신라 금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건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이었다. 일본 순사가 경주 노서리에서 우연히 아이들이 흙 속에서 유리구슬을 찾는 모습을 보고 알아보니 봉황대 고분 뒤에 살던 박문환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를 상부에 보고해 전문가 파견을 요청했으나 그 사이에 이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라는 대서소(대서소: 행정·법률서류를 대신 작성해주는 직업) 주인과 경주보통학교 교장이었던 오사카 킨타로(大坂金太郞) 등의 비전문가가 3~4일 동안 유물을 수습하였다. 금관을 비롯하여 금 허리띠, 금귀걸이, 유리그릇 편과 구슬목걸이 등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었지만, 정식 발굴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덤 구조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

금관총(金冠塚; 128호)에서 나온 유물 중 무덤의 주인공이 허리에 차고 있던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을 발견한 시점은 2013년 보존처리를 하던 중에 확인되었으니 발굴한 지 약 92년 만이다. 고리자루칼의 칼집 끝에서 확인한 이사지왕(尒斯之王)이라는 글자는 금관총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점을 던져주었다. 금관총은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의해 대략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은 자비왕이나 소지왕 중 한 명일 가능성이 크지만, 금관총의 규모나 입지 등을 함께 고려해 보면 왕(마립간)이 아닌 왕족이나 귀족일 가능성도 있다. 금관총은 다른 왕릉급 무덤보다 작은 무덤에 속하며 125호분인 봉황대의 배총(陪塚; 부부나 형제, 군신 관계에 있는 자를 근처에 묻는 무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 무덤 주인공이 남자일 경우는 주로 큰 칼을 허리에 찬 채로 출토되기 때문에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의 출토 위치도 문제가 된다. 이 칼은 주인공의 허리가 아닌 머리 위쪽 부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의 성격을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이후 1924년 유명한 말 탄 사람 토기(기마인물형 토기)와 배 모양 토기 등과 함께 두 번째 신라 금관이 발견되었다. 이미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붙여진 무덤이 있었고 또 이 무덤에서는 특이하게 금방울이 나왔기 때문에 금령총(金鈴塚)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금령총 금관과 금 허리띠는 금관총 금관과 금 허리띠보다 작았고 금령총 금관에는 곱은 옥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이 아닌 아이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총과 금령총에서 금관이 출토되면서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이 세워졌다. 금관을 찾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욕망은 1926년 서봉총 발굴로 이어졌고 마침내 세 번째 금관이 나타났다. 서봉총 금관의 모습은 또 달랐다. 기본적인 형태는 관테에 3단의 ‘山’ 자형 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세움 장식이 있는 유형이지만 관테 안쪽으로 ‘十’자 모양의 둥근 테두리가 있고 그 가운데에 3마리의 봉황 장식이 달려 있었다.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은 당시 무덤 발굴조사 때 스웨덴(스웨덴 한자식 표현 서전瑞典) 황태자 구스타프가 방문하였음을 기념하고 이와 함께 봉황 장식이 있는 금관이라는 특징에서 따온 것이다.

금관에 열광하던 당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먼저 금관총 금관의 절도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1927년 11월 경주박물관 분관에 몰래 들어간 도둑이 금관을 훔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금 허리띠와 유리목걸이를 들고 달아났다.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한 탓에 도둑은 경찰서장 관사 앞에 유물을 두고 사라져 잃어버린 유물을 찾을 수 있었다. 또 1935년 평양박물관에 서봉총 금관을 전시했었는데 전시가 끝난 후 당시 고이즈미 아키오 관장이 기생 머리에 금관을 씌운 사건이 터져 시끄럽기도 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금관은 그로부터 47년 후에 발견되었다. 1973년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발굴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금관의 기본 형태는 같았으나 천마총 금관은 ‘山’ 자형 장식이 4개였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명품이었다. 거대한 무덤 발굴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먼저 천마총을 발굴하고 뒤이어 황남대총을 조사하였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는데 먼저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북분에서는 금관이 발견되었다. 남분과 북분의 여러 출토 상황 등을 종합해 본 결과 남분은 남성, 북분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3 금관은 마립간의 전유물이었을까?

관은 머리에 쓰는 쓰개의 한 종류이다. 보통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이유는 보온성을 높이거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특히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관은 관을 쓴 착용자(소유)가 소속된 조직이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복식(服飾)의 한 종류로 구분된다. 관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재질이나 형태에 대한 제도적 장치인 관제(冠制)를 통해 신분이나 지위에 맞도록 규제하였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고 하고 가야는 ‘철의 나라’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신라의 무덤에서 확인된 금제품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신라의 왕과 왕족들은 황금 장신구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쌌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물건을 만드는 재료 중의 으뜸은 금이다.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불변의 물질로 사랑받아왔다. 실제로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을 보존 처리하면 새 금관처럼 반짝거린다. 그래서인지 관람객 중에 경주 대릉원 천마총 안에 있는 금관이 진짜 유물이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금관이 너무 새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재현품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신라의 금관은 마립간 시기의 무덤에서만 출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황남대총처럼 초대형급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된 사례를 제외하면 금관총·서봉총·천마총·금령총 등은 지름 35~50m의 대형급 또는 중형급에 해당한다. 또 황남대총 북분은 성인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금령총은 금관의 지름이나 금 허리띠의 길이로 보아 미성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금관을 착용할 수 있었던 신분은 마립간을 비롯하여 일정 범위에 속하는 인척(왕족)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마립간에게 복속된 중앙과 지방의 전통적인 세력과 방계로 멀어진 왕족은 금동이나 은으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였던 듯하다. 마립간이 전통적인 지배자였던 ‘간(干)’ 계층보다 우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완벽하고 절대적인 우위는 차지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즉 지방은 지역의 지배자들을 통해야만 지배할 수 있었고, 이들에게 유사한 귀금속 제품을 주며 서로 간의 친연성을 유지·관리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4 변화하는 금관

전 세계적으로 고대 금관의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중 신라 금관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형태적으로도 독보적이다. 짧은 시기 동안 다섯 점의 신라 금관 형태는 변화·발전하면서 가장 화려한 천마총 금관에서 정점을 찍은 뒤 사라진다. 물론 금동관으로 명맥은 계속 유지되기는 한다.

신라 금관은 5세기에서 6세기로 갈수록 일정한 변화·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신라 금관은 관테에 세움 가지 장식, 달개와 곱은옥 장식, 표면에 새겨진 연속점무늬(點列文) 등의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특징이 시기별로 달라진다. 먼저 세움 장식 중에서 앞쪽에 있는 나뭇가지 모양 장식의 개수가 ‘山’ 모양의 기준으로 할 때 3단(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에서 4단(천마총, 금령총)으로 변한다. 또 세움 장식을 고정하는 못의 개수도 삼각형 모양으로 3개를 박다가 2개의 못을 1열로 박는다. 금관 표면에 달아 장식하는 달개가 89개(황남대총 북분)에서 382개(천마총)로 늘어난다.

금관 앞쪽으로 늘어뜨리는 장식인 드리개(垂飾)가 있는데 마치 귀걸이처럼 보인다. 황남대총 북분과 서봉총의 드리개는 굵은고리 드리개(太鐶垂飾)가 달려 있지만, 황남대총 북분 금관에는 좌우 3쌍이 달려 있어 매우 화려하다. 금관총·금령총·천마총 금관의 드리개는 가는고리 드리개 1쌍이 달려 있다. 또 경주 교동 금관은 형태는 다르지만 신라 금관 중에서는 가장 빨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금관은 금동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금동관의 형태도 단순화되는 방향으로 변한다. 최종적으로는 구리판을 잘라 만든 동관(銅冠)으로 만들어진다.

5 금관, 의식용 관일까? 죽은 자를 위한 가면일까?

흔히 금관은 머리에 쓰는 왕관이라 생각한다. 신라 금관의 형태도 머리에 쓸 수 있는 관테와 세움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금관을 전시와 같은 이유로 이동하거나 움직일 경우에 매우 불안할 정도 흔들린다고 한다. 실제 생활에서 왕(마립간)이 기념적인 행사 등에 직접 머리에 쓴 상태로 움직이는 것은 꽤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이 머리에 쓰는 용도였다면 금관 바로 아래 얼굴, 그리고 목과 가슴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황남대총 북분이나 천마총의 금관 출토 상태를 보면 금관 바로 아래에 목과 어깨를 감싸는 가슴 꾸미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관을 얼굴의 턱 아래까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무덤 주인공의 발에 신겨진 금동신발도 바닥에 스파이크처럼 징이 달려 있기 때문에 실제로 신고 다닐 수 있는 신발이 아니라 장례 의식 용품의 하나로 보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최근 경주 황남동 120호 적석 목곽묘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120호의 봉분을 파괴하고 만든 120-2호에서 금동관과 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와 신발까지 출토되었다. 금동관은 3단의 ‘山’자 모양 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장식 2개가 있는 점이 신라 금관과 동일하지만 관테에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 구멍이 정연하게 뚫려있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천마총처럼 금관을 얼굴에 씌운 것이 아니라 황남동 금동관은 마치 얼굴을 덮은 가면처럼 평평하게 접어 얼굴을 덮은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생전의 의식용 혹은 평상시 사용했던 관은 고깔 모양의 관모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금관은 장례의식 때 얼굴을 가리는(또는 덮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어 아직 명쾌한 결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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