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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

신라 지방행정의 핵심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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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촌락문서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는 1933년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지방행정 문서이다. 이 고문서(古文書)를 통해 통일신라 시기 행정의 말단 단위인 촌락 내부 사정까지 속속들이 파악하였던 국정 운영의 치밀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울러 신라의 지배체제 이면에 존재하였던 민(民)의 양태 또한 일면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2 신라촌락문서의 발견, 통일신라의 지방행정을 들여다보다

삼국 간의 기나긴 항쟁 끝에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오랜 전란에 따른 혼란을 수습하고 대민지배체제를 강화하며 체제를 안정시켜나갔다. 모든 주·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행정력은 각 지방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는 촌(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일본 나라현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발견된 이른바 「신라촌락문서」는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력과 대민지배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촌락문서」는 1933년 10월 일본 나라현 도다이지 쇼소인의 중창(中倉)에 소장되어 있던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문서는 화엄경론 책자를 보관하기 위해 싸는 덮개인 질(帙)의 내부에 붙어 있었는데, 문서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楮紙)를 사용하였으며, 그 크기는 가로 58cm, 세로 29.6cm였다.

이렇게 발견된 문서는 곧 사진 촬영을 하고 다시 본래 발견된 상태로 질(帙) 속에 넣어 현재까지 쇼소인에서 계속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본 문서에 대한 연구는 현재 문서를 촬영한 사진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 고문서(古文書)를 통해 지방행정의 말단 단위인 촌(村) 내부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통일신라 시기 지방 행정의 치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지배체제 이면(裏面)에 존재하였던 민(民)의 양태 또한 일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문서 발견 이후 「신라촌락문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초기부터 이 고문서는 「민정문서(民政文書)」, 「촌락문서(村落文書)」, 「균전성책(均田成冊)」, 「촌락장적(村落帳籍)」 등 연구자들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러왔다. 특히 이 문서 자체가 어떤 호적(戶籍) 또는 계장(計帳) 류의 성격을 가진다는 관점에서 「촌락장적」이란 이름으로 많이 불려 왔다가 근래에는 이 문서의 성격과 용도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신라촌락문서」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있다.

3 「신라촌락문서」의 용도와 성격

「신라촌락문서」는 통일신라시대의 4개 촌락에 대한 각종 정보를 기록한 문서이다. 즉 이 문서는 통일신라 시기 지방지배의 실상을 전하는 구체적인 자료로서 여기에는 총 4개 촌에 관한 촌락 이름(村名)·촌의 영역(村域)·호구의 등급(烟))·인구(口)·소와 말(牛馬)·토지(土地)·수목(樹木)·호구(戶口)와 가축(牛馬)의 감소·수목의 감소 등의 순서로 촌의 실상을 알려주는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문서에 담긴 촌락에 대한 정보는 3년을 주기로 작성되며 정보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현재 문서에 기재된 마을 이름은 사해점촌(沙害漸村)과 살하지촌(薩下知村) 두 촌의 이름만 확인되며 다른 2개 마을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문서에 기재된 마을의 영역은 단순히 주거지와 경작지만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과 강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각 촌에 거주하는 연(烟)은 총 아홉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음이 확인되는데, 연(烟)의 등급을 부여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를 놓고 아직 토론 과정에 있다. 대체로 가구의 노동력, 즉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산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이밖에 각 연(烟)이 소유한 토지의 다과(多寡)를 기준으로 하였다거나 혹은 가구의 총체적 자산으로 등급을 나누었다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들이 논쟁 중에 있다.

한편, 문서에 기재된 인구는 전체 인구수를 비롯한 3년간의 출생·사망·이동한 인구를 표기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기록하고 있다. 토지는 논·밭·마전(麻田) 등의 총면적을 나누어 기재하였다. 수목은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무에서 재배되는 생산품 역시 수취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나무의 숫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즉 「신라촌락문서」는 신라 정부의 지방 행정을 위한 촌락의 다양한 정보를 기재하고 있는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서의 용도와 성격에 대해 추측해볼 수 있는 사안을 하나씩 자세히 정리해보도록 하자.

첫째, 문서의 ‘당현(當縣) ○○○촌(村)’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신라촌락문서」는 최소한 현(縣) 단위 이상에서 집계·작성된 내용을 주(州) 단위 이상의 기관에서 재정리한 문서라 할 수 있다. 문서에서는 ‘당현’ 소속의 촌과 ‘서원경(西原京)’ 소속의 촌 등 상위 행정단위를 달리하는 촌들이 한 사람의 필체로 일괄적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서의 상태로 볼 때, 촌락문서는 ‘당현’과 ‘서원경’을 행정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웅천주(熊川州)’ 혹은 ‘중앙’에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신라촌락문서」의 발견 경위로 보아 이 문서는 신라 왕경이 있었던 경주로부터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본 문서는 현(縣)에서 군(郡)을 거쳐 주(州)로 혹은 소경에서 곧바로 주(州)로 발송된 다음 한 차례 내용의 정리·재작성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다시 경주의 왕경 즉 중앙의 행정기관으로 보고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본래의 용도를 마치고 폐기된 문서는 당시 왕경 내 어느 귀족 가문이 주축이었을 사절단(상단)의 교역 물품에 포장용지로 사용되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러한 경위로 보아 이 문서는 당시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 그 용도를 마치고 폐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문서의 마지막 용도는 신라 왕경 내 어느 기관의 행정 문서였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같은 시기 당(唐)과 일본(日本)의 여러 지방행정 관련 문서 작성 형식과 비교해보았을 때, 「신라촌락문서」는 기존에 작성된 호적(戶籍)과 계장(計帳) 등 각종의 지방행정 문서를 바탕으로 하여 핵심 내용만을 다시 추려서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전식년(前式年)의 문서와 호적, 수실(手實, 가호마다 호주가 매년 연말에 작성하여 보고하는 문서), 계장 등의 문서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넷째, 문서의 작성연대에 대해서는 695년 설(윤선태), 755년 설(旗田巍·兼若逸之·이기백·강진철·김수태 등), 815년 설(이홍직·전봉덕·武田幸男·木村誠·김기흥·이인철·이희관 등)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한동안 815년 설이 지지를 받아 왔다가 근래에는 695년 설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신라촌락문서」는 695년(혹은 815년) 무렵 신라 지방 현(縣) 단위 이상에서 해당 지역 예하 촌락에 대해 조사·수집된 내용이 주(州) 이상의 상급 단위에서 다시 지금의 문서 형식으로 정리·편집된 다음 중앙(경주)으로 보고되는 경로가 상정된다. 곧 신라의 중앙 행정기관에서는 이러한 문서들을 가지고 국가의 여러 정책 집행이나 재정 운영 등 여러 행정을 진행하는 과정에 참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본 신라의 대민지배

「신라촌락문서」에는 호(戶)를 ①공연(孔烟), ②계연(計烟), ③등급연(等級烟), ④3년간 중 수좌내연(三年間中 收坐內烟)으로 나누어 기재하였다. 공연에 대해서는 자연호로 보는 견해와 몇 개의 자연호가 합쳐진 편호로 보는 견해가 맞서고 있으나, 근래에는 편호로 보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다음으로 계연은 말 그대로 ‘계산상의 연’이라는 뜻이다. 계연수(計烟數)는 중상연(仲上烟)을 기본수 1로 하여 호등이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기본수가 1/6씩 감소한다. 즉 중중연(仲仲烟)은 5/6, 중하연(仲下烟)은 4/6, 하상연(下上烟)은 3/6, 하중연(下仲烟)은 2/6, 하하연(下下烟)은 1/6이 기본수이다. 이 기본수를 촌의 각 등급연의 수와 곱한 다음, 그 전체를 더한 값의 정수와 분자를 ‘계연(計烟) 몇 여분(余分) 몇’으로 나타낸 것이 각 촌의 계연수(計烟數)이다. 이것은 촌 단위의 경제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산출한 수치로서 이렇게 계산된 계연의 수치는 해당 촌에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하는 기준 수치로 이용되었다. ‘3년간 중 수좌내연’은 전식년 이후 3년 사이에 전입해온 호를 말하며, 당식년 문서에 등급을 부여받지 않는 채 기재되어 있어 등외연(等外烟)이라고도 한다.

한편, 등급연은 ‘하하(下下)·하중(下中)·하상(下上)·중하(中下)·중중(中中)·중상(中上)·상하(上下)·상중(上中)·상상(上上)’의 아홉 등급으로 공연의 등급을 매긴 호를 말한다. 「신라촌락문서」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에서는 편호(孔烟)를 상상연(上上烟)부터 하하연(下下烟)까지 총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9등호제를 실시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신라가 9등호제를 실시하였던 상황은 정관(貞觀) 9년(635) 3월 당(唐)에서 기존의 3등호제를 혁파하고 9등호제를 성립시켰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즉 신라 또한 이러한 중국의 변화에 발맞추어 9등호제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시기적으로 통일전쟁 과정과 새로운 체제 정비과정 속에서 민의 빈부 격차가 다양하게 나타나게 됨으로써 9등호제가 성립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대로 통일신라 시기에 시행된 9등호제의 호등 편제의 기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그래도 많은 연구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호등 산정이 이루어졌다는 견해’에 따른다면 각 호(烟)의 정남(丁男)과 정녀(丁女)의 수를 2:1로 환산하여 적용하면 호등과 계연수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게 된다. 즉 이는 고대 한·중·일의 연령 등급제가 인신(人身)을 기준으로 한 수취체제와 밀접히 결합되어 운영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며, 특히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연령 등급제와 유사했던 촌락문서의 상황은 당시 신라의 세제(稅制)가 인신(人身)을 핵심적 기준으로 하여 운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근대 국가에서 조세 수취는 국가 구성원에 대한 경제적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전근대 사회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떠한 체계를 갖추어 조세 수취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작업은 당 시대의 체제적 발전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를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다. 즉 「신라촌락문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통일신라 시기 수취체제에 대한 논의에는 신라의 촌락지배가 무엇을 기축으로 하고 있었는지, 나아가 통일신라 사회의 역사적 발전단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들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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