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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라시압 궁전벽화

중앙아시아로 간 고구려인

미상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대표 이미지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인근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 궁전 터에서 발견된 무덤의 벽화이다. 이 그림에는 새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두 명의 인물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고구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화에는 바르후만이라는 왕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는 당(唐)에 의해 강거도독(康居都督)으로 책봉된 불호만(拂呼縵)과 동일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이 벽화의 연대는 7세기 중엽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모습을 통해 당시 고구려가 사마르칸트 지역에까지 사절단을 파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7세기 무렵 고구려의 폭 넓은 국제 외교를 보여주고 있다.

2 벽화의 발견과 연대

1965년 러시아(당시 소련)에 의해 아프라시압 궁전지가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1975년에 보고서를 통해 벽화의 존재와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특히 벽화의 우측 하단에 보이는 2명의 인물이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새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러한 형상이 고구려인의 복장을 묘사한 중국 측 사서에 소개된 바 있기 때문이었다. 머나먼 서역 땅에서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머나먼 이 지역까지 오게 되었던 것인지, 사마르칸트 일대의 나라와 고구려의 교섭에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이 있었던 것인지 연구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 시작하였다.

소그드어로 쓰인 벽화의 명문에 따르면 그려진 벽화는 바르후만 왕이 재위했을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바르후만이라는 인물은 당시 중국의 왕조였던 당(唐)의 역사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나라는 강국(康國)이었는데, 당은 영휘(永徽) 연간(650~655) 내지 현경(顯慶) 3년(658)에 강거도독(康居都督)으로 불호만(拂呼縵)을 책봉하고 있다. 이 불호만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으로 보아 바르후만과 동일한 인물로 파악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고구려 사절이 사마르칸트에 있던 강국을 방문한 시기는 650년에서 658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국과 고구려의 지리적 거리, 당시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타국의 동향을 통해 사절의 방문 시기를 좀 더 좁혀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마르칸트는 그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당시 중원과 북방 초원 세력의 힘겨루기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7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 사마르칸트의 강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세력은 중원의 당과 초원의 서돌궐이었다. 이 무렵 서돌궐의 지도자는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라는 인물로서, 650년부터 당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657년 11월 당에 패하여 사로잡히기 전까지 당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리적으로 서돌궐과 가까웠던 사마르칸트가 당에 의해 책봉을 받고 양자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아사나하로가 잡힌 이후인 658년 2월에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다양한 지역에 대대적으로 기미주가 설치되어 당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강국 역시 이 무렵에 기미주에 의해 당의 영향 하에 들어갔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7세기 중반 무렵 강국의 왕이었던 바르후만이 강거도독에 임명된 것은 현경 3년이었던 658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한 이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양국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사마르칸트의 강국이 658년에 당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로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 시까지 고구려와 강국이 당을 가운데 두고 교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벽화에 나온 고구려인 사절들은 그 이전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왜 이 먼 곳까지 사절로 파견되었을까.

3 고구려 사절단이 사마르칸트로 간 경로

먼저 고구려 사절단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먼 서역의 사마르칸트까지 갈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 무렵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고려할 때 고구려의 사절이 중원을 경유하여 사마르칸트로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 사절이 사마르칸트로 가기 위해서는 초원길을 통하여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5~6세기에 이미 초원의 유목국가였던 유연(柔然)·돌궐(突厥) 등과 교섭하고 있었다. 이들의 중심지는 오르콘강 일대였으므로, 7세기 중엽에는 이 일대의 교통로에 대해 고구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서 보낸 사절단이 초원길을 이용하여 서역을 갔다면 먼저 오르콘강 유역에 도달한 다음 더 서쪽으로 나아가 사마르칸트에 도달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서 오르콘강으로 가는 방법에는 세 가지 경로가 있었다.

첫째는 실위(室韋) 지역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실위는 현재 중국 흑룡강성 눈강(嫩江) 중류 일대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다양한 집단의 총칭이었다. 일찍이 고구려는 실위에 철을 수출하면서 교류하고 있었다. 한편, 6세기 중엽 돌궐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실위를 세력권에 둠으로서 몽골 초원과 실위의 교섭 역시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평양을 출발하여 북류 송화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눈강 유역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오르콘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둘째는 말갈(靺鞨) 지역을 거쳐 가는 길이 있다. 당시 말갈은 7개의 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속말수(粟末水) 유역에 살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은 고구려와 돌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속말수는 북류 송화강을 가리키는데 고구려 영역에서는 북류 송화강의 지류인 이통하(伊通河) 유역의 농안(農安)을 거쳐 돌궐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위의 사례와 같이 고구려는 속말>말갈의 영역을 지나 몽골초원으로 진입하여 오르콘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셋째는 거란(契丹) 지역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거란은 서쪽으로 나 있는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西刺木倫) 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거란과 충돌·교섭을 반복하였는데, 6세기 후반에 이르면 돌궐이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거란 지역을 통해 몽골초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로를 따르게 되면 평양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요하와 시라무렌강을 따라 내몽고로 들어간 다음 오르콘강 유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르콘강 상류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단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알타이산맥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일찍이 흉노를 비롯한 초원의 유목세력들은 알타이 산맥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이 교통로 역시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를 주 무대로 삼던 소그드인들 역시 초원길을 통해 교역 활동을 전개해왔으므로, 소그드인의 안내를 통해 사마르칸트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오르콘강 상류 유역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단은 셀렝게강을 거쳐 알타이산맥을 넘고, 이식쿨 호수와 시르다리야 강을 거쳐 사마르칸트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 고구려가 사마르칸트에 사신을 보내게 된 배경

아프라시압 벽화의 연대가 7세기 중엽에 해당한다면 당시의 국제 정세를 통해 사절단 파견 목적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의 고구려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고구려가 7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강국과의 교섭을 추진한 목적은 새로운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당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645년 고구려는 당 태종의 친정을 막아내었지만, 이 전쟁은 고구려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이 이후로 당은 한 번의 대대적인 원정이 아닌 여러 차례에 걸친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의 국력 약화를 노렸고, 이것은 고구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당에 독자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당의 지배에 저항하는 주변 세력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서 전쟁의 부담을 줄이고 당의 압박으로부터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려 했다. 645년 고구려가 말갈을 통해 철륵(鐵勒) 세력인 설연타(薛延陀)와 연계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고구려 사절단의 파견 시점을 추측해보면,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가지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첫째, 650~657년 무렵을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649년 5월, 고구려 원정을 주도했던 당태종이 사망하였다. 그는 고구려 원정 중단을 유언으로 남겼고, 때문에 한동안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 직후인 650년, 서돌궐 방면에서 아사나하로가 부락을 통합하여 당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은 아사나하로를 제압하기 위해 3차에 걸친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657년에 보낸 당의 3차 토벌군에 의해 아사나하로의 서돌궐 세력은 제압되었고, 당은 이 지역에 다시 기미지배를 시행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로 가기 위해 초원길을 이용했다고 하면, 당과 대립하던 서돌궐 아사나하로의 활동기간인 650~657년 사이를 유력한 시점으로 지목해볼 수 있다.

둘째, 663년 무렵을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655년 무렵부터 당은 다시 대외적으로 강경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661년에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때 당은 고구려 평양성 포위에 성공하였고, 이 공격은 몇 달에 걸쳐 공격을 지속되었다. 그런데 661년 9월에 당에 복속해 있던 북방의 철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여파로 662년 2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군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 고구려는 후퇴하는 당의 후미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당시 고구려는 당군의 후퇴와 연관하여 철륵이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도 인지하였을 것이다. 이에 서둘러 철륵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연계를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철륵의 반란은 663년 정월 당군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이에 고구려 사절단은 또 다른 연계 세력을 찾고자 사마르칸트까지 갔던 것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시점이 사실에 가까운지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벽화의 인물을 통해 이 무렵 고구려의 국제정세 인식과 대외 활동이 동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넓은 외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초원 세력과의 교섭을 지속해왔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교통로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정학적 여건 상 고구려는 중원 왕조 뿐만 아니라 초원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아프라시압의 궁전벽화 역시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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