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오녀산성

오녀산성[五女山城]

고구려의 첫 번째 왕성

미상

오녀산성 대표 이미지

환런 오녀산성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시(本溪市) 환런현(桓仁縣)의 오녀산(해발 806m)에 있는 고구려 왕성 유적이다. 오녀산의 정상부는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별도의 시설이 없어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다.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성의 전체 둘레는 4.57km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돌로 성벽을 쌓은 곳은 남벽과 동벽의 일부 구간에 불과하다.

오녀산성은 그간의 고고학 조사 결과와 문헌 연구를 토대로 고구려 초기 왕성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는 만큼, 고구려 초기 도읍(졸본)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4년에는 고구려의 다른 왕성·왕릉 및 귀족 무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 오녀산성의 고고학 조사 내용

오녀산성에 대한 고고학 조사는 20세기 전반에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인류학교실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조선총독부 교과서 편찬사업의 사료조사를 위해 1912년 사진사와 화가를 대동하고 오녀산성을 올라 성 내외의 여러 모습을 유리 건판과 스케치 등의 자료로 남겼다. 그렇지만 당시 도리이는 문헌 자료와 음운학적인 유사성, 그리고 답사의 내용을 토대로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인 국내성(國內城)으로 비정한 바 있다. 1944년에 발간된 『만주의 사적(滿洲の史蹟)』에 오녀산성을 비롯한 요동지역의 여러 고구려 산성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이미 만주 일대의 많은 고구려 성이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1964년에 북한과 중국의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팀(조중연합고고대)을 꾸려 유적에 대한 간략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뒤 오녀산에 TV 송신탑을 세울 때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다음 해인 1986년에 첫 번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지금까지도 자세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1996년부터 1999년, 2003년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2004년에는 이례적으로 발굴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같은 해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녀산성은 현재 정비가 완료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산성 아래에는 오녀산성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산성은 산 정상부와 산비탈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남북 600m, 동서 110~200m 가량의 넓은 평탄지로 이루어진 정상부에는 대형 건물지와 주거지, 샘, 저수시설, 요망대(장대), 서문지 등이 있고, 완만하게 경사진 동쪽 산비탈에는 남문지, 동문지, 성벽, 초소 유구 등이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4.57km이나, 대부분 자연 절벽이고 석축 구간은 565m에 불과하다. 성벽은 대형의 장대석으로 5단 가량의 기초를 마련한 다음, 쐐기꼴 돌과 북꼴 돌을 결합하여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축조는 쐐기꼴 성돌의 뒤쪽 뾰족한 꼬리 부분 사이를 안쪽의 길쭉한 북꼴 돌과 맞물리게 한 다음, 바로 윗 단에서는 성돌을 엇갈리게 놓아 쐐기꼴 성돌의 꼬리가 아랫단의 북꼴 돌을 누르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층층이 교대로 쌓으면 성벽이 견고해지면서 동시에 바깥으로 향하는 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외벽의 상부에는 너비 1.2~1.5m, 잔고 0.6m 가량의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여장의 바로 안쪽에는 평면형태 방형의 돌구멍(길이 0.3m 내외, 깊이 0.5m 내외)을 대략 2m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성벽의 윗면에는 판석을 깐 다음 점토를 채워 병사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하였다.

한편, 산성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고구려 전기, 고구려 중·후기, 금(金)에 해당하는 총 5기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전기 문화층에서는 대형 초석 건물지 1기와 주거지 3기가, 중·후기 문화층에서는 대형 초석 건물지 2기와 주거지 35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른 시기의 주거지에는 내부에 노지나 간단한 부뚜막 시설이 설치되었지만, 중기 이후의 주거지에는 내벽을 따라 쪽구들이 마련되었다.

고구려 전기의 문화층에서 출토된 토기는 조질의 태토로 손으로만 성형하였으며, 소성 온도가 비교적 낮다. 세로의 작은 띠 손잡이가 부착된 심발 토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 밖에도 삽날과 괭이와 같은 철제 농공구와 오수전(五銖錢),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 반량전(半兩錢), 화천(貨泉) 등과 같은 중국 동전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중·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는 회전대를 이용하여 제작한 토기 외에도 무기, 마구, 농공구, 조리용기 등의 각종 철기와 소량의 청동기,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호, 옹, 심발, 동이, 시루, 병, 반, 접시, 뚜껑 등으로 그 이전 시기에 비해 기종이 매우 다양해졌으며, 점토띠를 테쌓기 하면서 회전대를 이용하여 성형한 것이 특징이다. 보고서에서는 이들 유물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남한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과 비교해볼 때 평양 천도 이후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3 초기 왕성으로서의 오녀산성

문헌에 기록된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은 졸본(卒本)이다. 〈광개토왕비〉에는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웠다’ 는 내용이, 『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 『삼국사기』 동명왕 즉위년(기원전 37년) 기사에는 ‘졸본천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4년 뒤(기원전 34년)에는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문헌에 기록된 졸본은 어디였을까. 무엇보다 고구려 산성과 적석총을 비롯한 이른 시기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일 것인데, 이러한 조건에 들어맞는 곳은 현재 중국의 환런과 지안 지역밖에 없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가 소재한 지안 지역이 국내(國內)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환런 일대를 졸본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환런 지역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환런 지역에는 평지성인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과 산성인 오녀산성은 물론 혼강을 따라 망강루고분군(望江樓古墳群), 고력묘자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 상고성자고분군(上古城子古墳群) 등 고구려 이른 시기의 주요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환런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오녀산성은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고도 방어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이자 환런 분지 어디에서나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상징성을 갖기에 충분하다.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고구려 초기에 활용되었음이 밝혀진 만큼, 건국 당시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다.

특히 고구려 전기 문화층에서 확인된 1호 대형 건물지는 길이 13.8m, 너비 6~7.2m인 6칸 규모의 초석 건물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전기 유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지인 만큼, 당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초기 산상 도읍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에 소개된 『구삼국사(舊三國史)』 인용문에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 사람들이 그 산을 볼 수 없었다. … 7일이 지나 운무(雲霧)가 스스로 걷히자 성곽과 궁실 및 누대가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은 험준한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평상시에 왕이 머무는 거처로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눈과 추위로 인해 오녀산을 등반하는 것이 쉽지 않아 산성에서의 정주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평상시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보는 곳이 평지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혼강 변에 있는 하고성자토성이 오녀산성과 함께 초기 도읍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토성의 시기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토루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구덩이에서 이른 시기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어 토성이 고구려 건립 이후에 축조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토성 주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인근의 상고성자고분군의 경우 고구려 초기의 무기단적석총이 아닌 기단적석총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그 시기가 늦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홀본의 서쪽 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오녀산성의 서쪽에 위치한 하고성자토성은 여러 면에서 졸본의 평지 도읍으로 비정하기 어렵다.

한편, 국력이 약했던 고구려 건국 당시에는 대규모 노동력과 재력을 투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평상시 거점에 성곽이 축조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산 위의 군사방어성이 평상시 거점보다 중시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에 따르면 오녀산성의 동쪽이 졸본(홀본)이었을 것인 바, 현재는 환런댐으로 수몰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규모 고구려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는 고력묘자촌 일대가 졸본의 평지 거점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력묘자고분군은 환런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무기단, 기단, 계단으로 이어지는 모든 형식의 적석총과 봉토석실분도 확인되는 등 고구려 전기간에 걸쳐 무덤이 조영되었기 때문이다.

4 국내 천도 이후의 오녀산성

발굴조사에서 오녀산성은 국내 천도 이후에도 여전히 이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조사단은 오녀산성의 성벽이 고구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일정 높이 이상의 성벽을 쌓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석재 가공과 토목건축 기술이 필요한데, 환런 지역에서 당대 최상위 무덤으로 비정되는 망강루 4호분이나 6호분의 경우에도 강돌 등의 미가공 석재로 울타리를 돌리듯이 쌓은 것을 보면, 오녀산성의 석축 성벽은 국내 천도 이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고구려는 중기 이후부터 행정 관청을 비롯한 중요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오녀산성에서는 기와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국내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방어성으로만 기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오녀산성은 건국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졸본의 방어를 위해 계속 유지되었으나, 수도로 향하는 주 방어선에서 멀어지면서 그 활용도는 국내 도읍기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