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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한반도 안의 유일한 고구려비

미상

충주 고구려비 대표 이미지

충주 고구려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충청북도 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中央塔面) 용전리(龍田里)에 있는 사각 기둥 형태의 고구려비이다. 발견된 곳의 당시 행정 구역이 중원군(中原郡)이어서 중원고구려비라고 명명하였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주고구려비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있지만 5~6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2 충주고구려비의 발견과 그 형태

충주고구려비는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충주고구려비는 오랫동안 선돌[立石]로 여겨졌기에 비가 서 있던 마을 이름도 입석 마을이었고, 비를 조사할 당시에도 일부 주민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충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호인들의 제보가 있어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삼국 시대에 제작된 고구려비임이 확인되었고, 1981년에는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충주고구려비의 크기는 가장 큰 전면부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높이 203cm, 너비 55cm이다. 좌우측면은 너비가 31~38cm로 전면이나 후면에 비해 좁은 편이다. 서체는 예서(隷書)의 필의를 가진 해서(楷書)로 보기도 하고, 해서의 필의가 농후한 예서로 보기도 한다. 1행 당 23자씩 전면에 10행, 좌측면에 7행, 우측면에 6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부에 글자가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좌측과 우측면에도 글자가 확인되나 오랫동안 비바람에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다. 특히 후면은 마모가 심해 글자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여기에 더해 후면의 비신 아래 부분은 덜 다듬은 형태여서 3면비인지 4면비인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였다. 이 논란은 2000년에 있었던 정밀 조사를 통해 뒷면에서 일부 글자의 흔적을 확인하며 해소되었다. 현재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마찬가지로 4면에 모두 글씨를 새겼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충주고구려비의 비문이 시작되는 1면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가장 넓고 많은 글자가 남아 있는 전면을 1면으로 볼 경우 아무런 연대 제시 없이 “오월중(五月中)”이라는 문장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두 번째로 넓은 후면을 1면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후면은 비신의 하단이 덜 다듬어져 있어 1면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우측면이 시작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최근에는 후면을 1면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나 확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3 비의 건립 시기와 목적

충주 고구려비가 건립된 연대나 목적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판독문상으로는 직접적으로 건립 연대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내용과 일부 글자들을 근거로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문 중 보이는 “12월 23일 갑인(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는 일간지를 이용해 이러한 조건에 맞는 연도들을 비문 건립 연대의 후보군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시기, 장수왕(長壽王) 시기대, 문자명왕(文咨明王) 시기, 평원왕(平原王) 시기 등이 제기된 바 있는데 대체로 5세기 초~5세기 말의 범위에서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중에서도 장수왕대 말기 내지 문자명왕대 초기인 5세기 후반설이 우세한 편이나 최근에는 5세기 중엽 장수왕대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비의 성격과 건립 목적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태자(太子) 공(共)이 신라와 싸워 우발성을 재정복해 무훈을 세우고 만든 공적비로 보는 견해, 비문에 등장하는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의 기공비로 보는 견해, 장수왕의 공적 기념비로 보는 견해 등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가 신라와 국경을 확정하며 세운 정계비(定界碑)나 척경비(拓境碑)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왕의 순수비(巡狩碑)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 양국의 왕이 만나 세운 회맹비(會盟碑)로 파악하기도 한다.

4 비문에 등장하는 용어들

충주고구려비의 전면 시작 부분에는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고구려가 어느 시점부터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과 관계가 있다. 고려라는 국호는 장수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북위(北魏)의 조서에도 등장한 바 있으며, 중국 남조의 양(梁)에서도 문자명왕을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은 바 있다. “고려태왕” 바로 뒤에는 “조왕(祖王)”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는 장수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전면 마지막 행에는 “개로(盖盧)”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이를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백제 개로왕은 475년 장수왕의 한성 공격 시 살해된 인물이므로, 해당 글자가 개로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비석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담겨 있는 비에 백제왕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어색하므로 이는 고구려인의 인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충주고구려비에는 “동이매금(東夷寐錦)”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신라를 동이로 규정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관직명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는 고구려군의 존재를 짐작케 한다.

5 충주고구려비의 의의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비는 중국 집안(集安) 지역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릉비,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를 비롯하여 충주고구려비까지 3기뿐이다. 더구나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므로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선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충주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고 칭하며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내려 주는 등 당시 양국의 관계를 드러내는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판독에 어려움이 있어 내용에 대해 학자들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설이 제기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고구려가 신라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외교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과거 군신(君臣) 관계에 놓여 있다가 충주고구려비 단계에서는 형제 관계로 설정되는 등 양국 관계에 있어 변화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주목되는 측면이다.

충주고구려비는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깊숙하게 침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던 흔적이자, 한반도 내의 정세 변화에 따라 남진 경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 또한 고구려의 인명 표기법을 비롯하여 고구려식 한문 문장과 이두식 표기의 사례를 보여 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의문점들을 품고 있으나, 고구려사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 연구를 위한 가치 높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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