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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 서석[蔚州 川前里 書石]

신라 지배층의 소풍지에 새겨진 옛 기억

미상

울주 천전리 서석 대표 이미지

울주 천전리 각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울주 천전리 서석(蔚州 川前里 書石)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2에 있으며,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선사시대로부터 바위 면에 조각·그림·명문 등이 새겨져 있는 유적을 말한다.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 川前里 刻石)으로 명명되어 있으나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다양한 동물 그림과 인물,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다수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에는 고대인의 삶과 정신, 신라 지배층의 동향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다.

2 발견 과정과 현황

울주 천전리 서석 혹은 울주 천전리 각석이라고 불린다.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며 1971년 4~5월과 11월 2차례에 걸쳐 정식으로 조사되었고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2.7m, 폭 약 9.5m의 연한 갈색 엽암으로 무른 암질을 가진 큰 판석에 다양한 문양의 조각과 암각화 및 여러 종류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각석은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주류 강안 암벽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경주와 울산을 잇는 길목에 해당하여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각석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한데, 먼저 각석의 가로 중심선을 기준으로 상단부에 위치한 각종 기하학적 문양과 동식물 문양, 인물상 등 각종 음각 문양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단부에 산재한 동물·인물·행렬 등의 그림이 새겨진 세선 암각화가 있다. 세 번째로 여러 서체로 기록된 각종 명문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두 번째 유형의 문양과 명문과 시기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이며, 하단부의 암각화와 각종 명문은 일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상부의 문양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마름모꼴 무늬·굽은 무늬·둥근 무늬·십자 무늬 등 다양한 형태의 무늬들이 홀로 혹은 겹쳐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신석기 시대 무늬 토기의 기하학 문양과 연결되고, 표현이 단순·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 토기 문양 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 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으며 사슴, 염소, 말 등이 있고 곡식 등의 모습도 나타난다. 중심부에는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종교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 밖에 상어나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이 그려져 있으며, 상부 왼편 끝에는 종교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도 그려져 있다.

인물상은 뚜렷이 보이는 것이 일곱 군데로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을 나타낸 것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데 종교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4 하부의 세선 암각화

석각 하부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는데,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는 인물·기마 행렬도를 비롯하여 상상 속의 동물이나 자연계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물·기마 행렬도는 세 군데 보이며, 상상 속의 동물로는 용과 같은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자연계 동물로는 말이 새겨져 있으며, 새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 외에 큰 돛을 단 배와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도 그려져 있다.

5 명문

대체로 서석의 가로 중심선 하단부에 산재한 명문들은 내용이나 서체 등으로 볼 때 5~6세기 무렵에서 통일 신라 말기에 걸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는 글자 크기나 새기는 방법 등이 판이한 것들도 섞여 있고, 시기를 달리하는 내용이 중복되어 기록되기도 하여 판독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 또한 간략하게 인명이나 간지만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까닭에 판독 가능한 명문들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221점이 분포하는데 그 가운데 3점은 근현대에 제작된 이름과 연도이다. 나머지 218점은 다수가 세선 긋기 형식으로 홀로 혹은 구획되어 표현되었으며, 바위면 쪼기 기법으로 새긴 것도 일부 눈에 띈다. 신라 시대 사람들이 남긴 대략 천 여자 가량의 명문은 도보 인물 및 기마행렬 위로 개성삼년명(開成三年銘), 병술명(丙戌銘), 을미명(乙未銘), 계해명(癸亥銘) 등이 새겨졌다.

하단의 중간 부분에 하체만 남아 있는 인물상 위로 이 암면의 중심 명문이 남아 있는데, 중심 명문 가운데 먼저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 뒤에 새겨진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 중심 명문 주변에 신해명(辛亥銘)을 비롯한 간지명과 승려 및 화랑의 이름들,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다수의 명문이 흩어져 있다. 여기에서 전체 명문을 살펴볼 수는 없음으로 주요 명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천전리서석」 원명
「천전리서석」 원명은 각석의 하단부 중앙의 왼편으로 조금 치우친 쪽에 자리하고 있다. 원명을 새길 때 새길 부분을 구획한 뒤 깎아 편평하게 다듬어 12행에 이르는 제법 긴 명문을 새겼다. 원명의 첫머리에 을사(乙巳)라는 간지를 통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 문헌 기록의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에 해당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을사년은 법흥왕(法興王) 12년(525)으로 비정된다. 명문에 의하면,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이 이름 없던 이 골짜기의 이름을 서석곡(書石谷, 돌에 글자를 새긴 골짜기)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2. 「천전리서석」 추명
위치와 명문의 내용을 통해 원명과 연속된 기록임을 알 수 있어 추명으로 불린다. 원명의 좌측에 이어서 네모지게 구획선을 넣었는데, 명문 새길 부분이 다듬어질 때 돌 위에 제법 크게 새겨진 귀족 복장 인물이 바위 면에서 제거되어 무릎 아랫부분만 남았다. 추명의 연대는 5행에 나오고 있는 기미년칠월오일(己未年七月五日)이 기준이 되는데, 이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비정된다. 명문에 의하면 14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녀랑왕(於史鄒女郞王),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이들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마음으로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 부걸지비(夫乞支妃), 심맥부지(心麥夫智) 왕자 일행이 새벽에 방문했다는 내용을 남겼다.

3. 「천전리서석」 계사명
10행에 이르는 계사명(453년, 눌지왕 37)은 공간 구획 없이 바위 면 오른쪽에 치우쳐 매우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새겨졌는데, 글자의 크기가 대자(大字)에 속하고 행간 간격이 상당히 넓어 과연 10행의 명문이 상호 전후 관계를 갖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이로 인해 하나의 연속된 기록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이 때문인지 명문에 개의치 않으면서 후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훼손되거나 삭제된 부분이 많다. 고구려 관등인 대형가(大兄加)는 이 명문에서만 확인된다. 이 관등은 아마도 고구려 관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4. 「천전리서석」 갑인명
계사명 첫 글자 바로 위에 2행으로 새겨졌는데 선이 깊고 굵으며 글자체가 반듯하여 알아보기 쉽다. 명문의 대왕사(大王寺)는 법흥왕의 명으로 창건되어 진흥왕(眞興王)으로부터 대왕흥륜사라는 사액을 받는 ‘흥륜사(興輪寺)’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5. 「천전리서석」 을묘명
을묘명 역시 계사명 위쪽 공간을 활용하여 새겨졌는데, 4행을 이룬 을묘명의 글자 새김 방식은 갑인명과 같다. 명문에서 ‘성법흥대왕절(聖法興大王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법흥왕 연간임을 알 수 있고, 시기는 535년(법흥왕 22)으로 비정된다. 내용은 간략하지만, ‘성법흥대왕절’이라는 구절을 통해 신라 국왕이 대왕을 칭했음을 알 수 있으며 승려의 호칭도 살필 수 있어 신라 불교사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6. 「천전리서석」 계해명
바위 면 왼쪽 아래 치우쳐 새겨졌다. 첫머리에 계해년(癸亥年)이 있어 543년 혹은 603년으로 볼 수 있는데, 관등명 소사(小舍) 다음에 존칭 어미인 제지(帝智)가 소멸된 점, 아내를 의미하는 용어로 부(婦)를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원명보다는 확실히 그 시기가 늦고 추명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사훼부 □능지 소사의 부인 조덕도(兆德刀)가 각석에 명문을 남긴 사람이다. 명문 아래 말과 사람의 행렬을 묘사한 세선 각화가 있어 관련 여부가 주목된다. 소사는 신라의 경위 13관등에 해당한다.

7. 기타 명문
이외에도 을축명, 술년명, 상원2년명, 왕7년명, 개원명, 병술명, 병신명, 개성명, 을미명, 신해명, 병명 등 다수의 명문이 남아있다. 또한, 기년이 없이 새겨진 명문도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승려, 귀족, 화랑의 이름이 다수 남겨져 있다.

6 울주 천전리 서석의 의의

울주 천전리 서석은 신석기 시대부터 종교적 주술행위의 대상이었으며, 청동기인들은 이곳에 기하문을 그려 넣었고, 삼한시대 사람부터 삼국시대 신라인에 이르기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림과 글자가 새겨진 장소다. 또한 525년(법흥왕 12)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왕을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바위와 골짜기에 서석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서석곡은 신라 왕경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 되었다. 539년(법흥왕 26) 왕자 심맥부지가 어머니 지몰시혜비, 할머니 부걸지비와 이곳에 다녀간 뒤 진흥왕으로 즉위한 후 신라 왕경의 귀족, 승려, 화랑이 잇달아 각석에 이름을 명문으로 남겼다. 기년과 인명 관등이 명기된 6세기의 긴 명문들은 7세기 이후 인명 중심의 짧은 글로 바뀐다. 8세기 이후, 귀족이나 승려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 또한 드물어졌으나 일반 백성들의 주술행위로 용이나 새 등을 새기기도 하였다.

천전리 서석은 이렇듯 오랜 시대의 흐름이 기록으로 남겨진 장소이며,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은 명문들과 그림들이 다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여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정치사뿐 아니라 문화사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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