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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蔚珍 鳳坪 新羅碑]

최고(最古)가 되지 못한 비운의 석비

524년(법흥왕 11)

울진 봉평 신라비 대표 이미지

울진 봉평 신라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 鳳坪 新羅碑)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비석으로서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비이다. 524년(법흥왕 11) 울진 지역에서 모종의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해당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죄인을 처벌하는 등 사건의 종결처리 내용이 담긴 비이다. 여기에는 신라육부와 성문법의 시행 문제 등 다양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부를 초월하지 못한 신라 왕권의 한계, 신라의 영역, 관등 제도, 지방통치조직과 촌락의 구조, 의례 행사 등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2 발견 과정과 현황

발견 이전 비석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에 있는 주두원 씨 소유의 논에 일부만이 드러난 채로 거꾸로 박혀있는 상태였다. 논 주인은 평소 농사를 짓는 데에 이 비석이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1988년 1월 20일 인근에서 작업 중이던 굴착기를 불러 돌을 드러내어 도로 옆 개울가에 버렸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 빗물에 의해 돌에 묻은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글자 일부가 드러났다. 이를 발견한 이장 권대선이 1988년 3월 20일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우연히 확인하고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에 신고하였다. 3월 26일 울진군 문화재계장 이규상에 의해 고비임이 확인되었고 4월 7일 향토사가 윤현수에 의해 처음으로 탁본과 판독문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1988년 4월 15일 자 대구 매일신문에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 기사에는 전문가의 도움 없이 판독과 해석이 이루어져 오류가 많았으나, 이후 연구자들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상당량의 오류를 수정·보완하였다.

1988년 4월 16일 한국고대사연구회에 소속된 연구자들이 비문을 조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다음 날 매일신문을 통하여 재차 보도되었다. 다만 비석을 들어내는 과정에서 비석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었음이 추후 확인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학술회의를 거치면서 ‘울진 봉평 신라비’로 명명되었으며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비석은 2008년 8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에 있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안에 옮겨 전시되었다.

3 비의 형태와 글자

울진 봉평 신라비는 6세기 초 신라 비석들과 같이 다듬지 않은 사각 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긴 것이다. 비석의 높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 위쪽 너비는 32cm, 가운데 너비 36cm, 아래쪽 너비 54.5cm이다.

비문은 앞면만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전체 10행으로 1행 31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이고, 전체 글자 수는 398자 내외로 보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1행을 32자 또는 33자로 보아 399자 또는 400자로 보기도 한다. 최근 1행 마지막 부분 비석을 들어내는 과정에서 깨져나간 비편에 ‘오(五)’자가 새겨져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 유행한 북조풍(北朝風)의 해서(楷書)로 쓰여 있으나, 자획의 형태는 예서(隷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대체로 비문은 양호하나 이체자(異體字)를 많이 사용하였고 마멸된 부분도 많아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 자에 달한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 형식이 아닌 신라식의 한문을 사용해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이 어렵다.

4 비의 건립시기와 경위

석비의 건립연대는 비문 제1행에 나와 있는데, “갑진년정월십오일(甲辰年正月十五日)”이라는 부분을 통해 갑진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탁부모즉지매금왕(喙部牟卽智寐錦王)”이 있는데, 여기서 “매금”은 신라 마립간(麻立干)의 다른 명칭이며 마립간의 새로운 왕호인 “왕”을 결합하여 “매금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모즉지”는 「울산 천전리 각석」 추명(539년)의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 과 같은 이름의 왕으로 보인다. 『남사(南史)』 신라전에서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하였으며 “모진”과 “모즉”은 발음이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즉지 매금왕”은 바로 법흥왕을 가리키며, 법흥왕 재위 기간 중 갑진년은 11년(524) 뿐이므로 이때 비석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5 비문의 내용

비문의 전체 내용은 524년 정월 국왕인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立宗葛文王)을 비롯한 14인이 합의하여 중대한 사건을 살펴 논의·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무슨 사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당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며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거벌모라 지역을 새로 편입하게 되었는데, 비가 세워지기 1년 전인 523년 이 지역에 대군을 동원해야 할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신라 지배층은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처결하고자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이 지역과 관련된 거주민 및 지배층을 대상으로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하여 알리는 한편,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석비를 세웠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비의 성격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국왕이 순행한 것으로 보고 순행비(巡行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율령과 관련되는 내용에 기초하여 건립된 율령비(律令碑) 혹은 교사비(敎事碑)라고 파악하고 있다.

6 비문의 쟁점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발견으로 학계에서는 신라 6부에 대한 이해가 많이 진전되었다. 당시까지 신라사 연구에 있어 큰 화두 중 하나는 왕경의 육부(六部)에 대한 문제였는데, 그 성립연대나 성립과정 및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특히 육부의 성립 시기를 대체로 6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이 비에 신라 육부라는 글자가 확인되고 있어 육부 성립의 하한선이 6세기 초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5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볼 수도 있게 되었다.

부의 성격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어, 이를 혈연적인 성격의 씨족 혹은 부족 조직으로 보거나 아니면 왕도의 지역적 구분으로 보기도 하였는데, 비서에서는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啄部)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은 사탁부(沙啄部)를 관칭(冠稱)하고 있어 형제가 부를 달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부’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검토해볼 여지를 마련해주었다. 이에 대해서 눌지왕(訥祗王) 시대부터 탁부 소속의 매금왕(寐錦王)이 사탁부까지 통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 특히 이사금기(尼師今期)에 갈문왕(葛文王)에 봉해진 인물들은 주로 왕비나 왕모의 부(父)였으나, 마립간기(麻立干期)부터는 왕의 동생이나 친족이 갈문왕에 봉해졌으며, 매금왕은 탁부에 갈문왕은 사탁부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본피부(本彼部), 사피부(斯彼部), 잠탁부(岑喙部) 등 다른 4부의 우두머리는 “간지(干支)”라는 이전 시기의 독자적인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이 칭한 간지를 부의 지배자인 부주(部主)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관등(官等)이나 직명(職名)의 의미로 이해해서 왕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관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간지는 4부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이자 지방민에게 주어진 외위(外位)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므로 우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6세기 초반 신라 육부의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국 운영 방식이나 지배구조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부 ∼간지’의 성격을 부주로 본다면, 당시 육부가 단위 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때 신라는 부 집단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체제였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이들을 후자의 성격으로 본다면, 당시 육부는 단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만 기능하였고, 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를 기초로 하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경위(京位)는 탁부와 사탁부 출신에게만 주어지고 있어서 신라 중고기에는 두 부(部)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흥왕 시대에 경위 17관등이 성립되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으나, 이 비문을 통해 이미 법흥왕 시대 경위 17관등이 성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명을 표기할 때에도 출신지인 육부의 순서가 아닌 관등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음도 관찰된다. 다만, 비석의 내용은 당시까지 신라 국왕이 아직 초월적 권력자로 부상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왕도 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다른 관료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비석은 당시 신라 국왕의 지위와 왕권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신라가 524년 단계에 이미 법령을 통하여 사회를 이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보다 전 시대인 법흥왕 7년(520)에 신라에 율령이 반포되었다고 전하나 그 자세한 모습을 알기 어려웠는데, 비석에서 확인되는 “교법(敎法)”, “별교령(別敎令)”, “장백(杖百)” 등을 통해 법령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비에는 영(令)뿐만 아니라 율(律)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장육십·장백 등의 표현도 보여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비에는 당시 울진 지역에 존재하던 지역 집단, 신라 국가의 지방지배와 수취체제 등 사회·경제상을 반영하는 내용도 확인된다. 지역 집단의 존재 양상과 관련하여 “노인(奴人)”, “대노촌(大奴村)”, “노인법(奴人法)” 등의 용어가 나오며, 지방지배와 관련하여 “도사(道使)”, “사인(使人)” 등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공치오(共値五)”와 같이 촌에 부과된 수취량에 대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촌(村)과 관련하여 등장하므로 이를 통해 신라 중고기 촌락사회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된다.

이 비에서 나타나는 신라 지방 사회는 울진 부근에 있던 거벌모라(居伐牟羅), 아대혜촌(阿大兮村), 갈시조촌(葛尸條村), 남미지촌(男弥只村) 등 4개 이상의 촌(村)이다. 울진지역에는 거벌모라에 경위를 가진 왕경인인 도사가 파견되었고, 나머지 촌에는 외위를 가진 지방민인 사인(使人)이 있었다. 당시 신라가 모든 촌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일부 촌에만 중앙에서 도사를 파견하고, 나머지 촌은 지방민 중에서 유력자를 사인으로 임명하여 지방통치에 기여하도록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거벌모라에서는 촌주(村主)라는 직명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이지파(異知巴)는 하간지(下干支, 외위 7)라는 간(干) 계열 외위를 소지한 것으로 보아 촌주에 해당함을 알 수 있으며, 촌주의 예하에서 외위를 가진 호민층(豪民層)은 이모리(尼牟利) 일벌(一伐, 외위 8), 신일지(辛日智) 일척(一尺, 외위 9), 이의지(尒宜智) 파단(波旦, 외위 10), 탄지사리(䋎只斯利) 일금지(一金智) 등이 있다.

지역 이름인 거벌모라와 남미지가 본래 노인(奴人)이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은 “신라육부(新羅六部)”로 표현된 왕경 육부인과 구별되는 존재였으며 당시 왕경 육부인들은 육부와 신라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할 정도로 지방민과 자신들을 구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민에게 경위와 구분되는 외위를 내렸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비문에 의하면 노인은 노인법의 대상이 되는데, 노인의 성격에 대해서는 새로이 신라 영토로 편입된 변방 지역의 집단적 예속민, 피복속민이나 집단 예민으로서 차별 편제한 특수 지역민, 지방민 일반, 국왕에 대한 신민(臣民) 일반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7 울진 봉평 신라비의 의의

울진 봉평 신라비가 발견된 지 1년 만에 다시 포항 냉수리 신라비(501)가 발견됨에 따라 울진 봉평 신라비는 최고(最古)의 금석문이라는 수식어를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게 빼앗긴 비운의 석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석에 담겨있는 내용은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포항 중성리 신라비와 함께 상호 면밀한 비교 검토를 통하여 신라 사회의 변화상과 신라의 정치·사회·경제·제도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즉 울진 봉평 신라비는 신라사 연구에 있어 단순히 기록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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