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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백제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른 무왕의 고향

미상

익산 왕궁리 유적 대표 이미지

익산 왕궁리 유적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익산 왕궁리(益山 王宮里) 유적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와 금마면 동고도리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1998년 사적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백제 시기의 절터로 파악하고 발굴을 시작하였으나, 발굴 결과 나타난 거대한 건물터와 정원·공방·대형 화장실 등은 이곳이 백제 무왕(武王)의 왕궁, 혹은 별도(別都)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2 왕궁리 유적에 대한 다양한 학설

익산 왕궁리 유적은 현재 터만 남아있고, 그 안에 백제계 석탑의 특징이 반영된 오층석탑(왕궁리 오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초기 조사 과정에서는 주변에 있는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 시기의 대표적 사찰 유적으로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이곳에서 고대 도읍이 갖추어야 할 궁(宮)·사원(寺院)·왕릉(王陵)·성(城) 등의 시설이 확인되면서 고대의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익산에 도읍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고대국가들이 주목되며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관련 학설은 크게 네 가지로, 시기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한 기준(箕準) 도읍설이다. 이는 서기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한반도 남쪽으로 피신하여 왕이 되었다는 기사에 주목하고 익산 왕궁리 유적이 바로 그가 도읍하여 세운 왕궁터라는 학설이다. 둘째, 백제 무왕 시대(600~640)에 천도를 시도하고자 지었거나 혹은 별도(別都)로 기능하였다는 학설이다. 이는 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무왕이 서동이던 시절 금마(金馬, 익산의 옛 이름) 출신이어서, 부여에서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세운 혹은 익산을 별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왕궁이라는 학설이다. 셋째,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 또는 安舜) 도읍설이다. 고구려 멸망 후 신라는 고구려 왕족 출신인 안승을 소고구려국(후에 보덕국(報德國)) 왕으로 삼아 익산에 정착시켰는데(670~684), 익산 왕궁리 유적은 이때 세워진 왕궁이라는 학설이다. 마지막으로 후백제 견훤(甄萱) 도읍설이다. 통일신라 말에 일어난 지방세력으로서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며 후백제를 건국했던 견훤이 익산에 도읍하여 왕궁을 세웠다는 학설이다.

이처럼 익산 왕궁리 유적을 둘러싸고 서기전부터 10세기까지 대략 천 여 년에 걸쳐 여러 정치세력이 유적의 주인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은 해당 유적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점차 발굴이 진행되면서 바로잡히고 유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있게 된다.

3 왕궁리 유적은 사찰이자 왕궁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실제 건물이 세워지고 사용된 시기가 좁혀지며 해당 학설들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우선 익산 왕궁리 유적은 오랜 시기에 걸쳐 활용되었으며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성격도 바뀌어갔는데, 대체로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동·서 방향의 축대를 쌓고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을 조성하여 궁성을 운영한 단계이다. 대표적으로 성벽을 들 수 있는데, 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성벽의 평면 형태가 고구려 안학궁에서 보이는 평면 장방형 구조와 매우 유사하였다. 이에 백제 문화권의 중심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식 건축물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이 성벽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의 보덕국 시절, 즉 통일신라시기에 세워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서벽을 따라 확인된 수레바퀴 자국도 이 단계에서 남게 된 흔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단계는 궁성의 구조를 완전하게 갖추는 단계이다. 석축에 덧붙여 추가적인 건물을 설치하고 궁성 내부 시설을 보강하였다. 1단계의 유구와 선후 관계가 명확하여 단계적으로 구별되지만, 시기는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2단계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이 파괴되고 그 위치에 대형 화장실·대규모 공방 등을 조성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대형 화장실은 규모도 규모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조영된 구조물이어서 흥미를 더한다. 화장실 내부의 오물이 일정 높이가 되면 인근의 동·서 석축 배수로로 흘려보내는 저류식과 수세식 화장실이 뒤섞인 독특한 형태였다. 또 뒤처리용 나무막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유래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3국에서 모두 사용된 것이다. 또 화장실 유적뿐만 아니라 변기형태의 토기도 2점 출토되어 신분에 따라 화장실 이용방식이 달랐던 점도 알 수 있다.

또한 1, 2단계 시기와 관련하여 서벽의 암거(暗渠)와 뒤에 덧붙여진 동·서 석축 배수로에서 시기를 비정할 수 있는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암거는 1단계 구조물로 파악되며 여기에 덧붙여져 있는 동·서 석축 배수로는 2단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동·서 석축 배수로를 조사한 결과 배수로는 크게 2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며, 상층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하층부에서 부여 등 백제시대 도읍에서만 확인되는 ‘上部乙瓦’·‘下部乙瓦’·‘首府’ 등의 인장와, 대부완, 전달린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어 성벽 축조 시기를 7세기 전반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배수로보다 앞 시기에 축조된 암거에서는 중국 청자 연판문육이병 편이 출토되었는데, 이 청자의 형태가 6세기 중반 유적인 봉자회묘(封子繪墓)의 연화준과 동일하다. 따라서 암거의 초축 시기는 6세기 중반~후반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또 유적에서는 후원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 후원은 백제식 정원 양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1, 2단계 시기의 상한은 6세기 중후반, 곧 백제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3단계는 궁성 관련 시설이 파괴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시기이다. 즉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과도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궁궐의 중심 공간을 부분적으로 파괴하고 남북 방향으로 축대를 쌓은 후 사찰의 금당과 강당 등이 조성되었으며, 북쪽 지역부터 대형 건물지 및 주변 시설들이 파괴·매립되어 간다. 강당의 경우에는 동·서 길이가 최소 50여 미터로 그 규모가 미륵사지 강당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사찰에 있어야 할 회랑이 확인되지 않는 대신 기존 궁성의 외곽을 둘러싼 성벽이 확인되고 있어 해당 성벽을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회랑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해당 유적층에서도 통일신라시대 유물과 함께 백제시대의 인장와·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볼 때, 이 시기는 익산의 영향력이 감소했으리라 추정되는 무왕 사후 의자왕 즉위 시점이나 백제 멸망 직후로 추정된다. 따라서 3단계 시기의 상한은 백제 말, 하한은 안승의 보덕국으로 설정할 수 있겠다.

4단계는 사찰 공간이 확대되는 시기이다. 현존하는 왕궁리 5층 석탑이 이 시기 축조되었고, 강당의 규모는 축소되었으며 2기의 기와 가마터가 확인된다. 그 외에 승방 등 다양한 건물지가 세워지는 등 처음 궁성의 중심 영역에 위치하던 사찰 공간이 넓게 확대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 단계의 출토유물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다. 당초문·괴운문 암막새, 복엽복판 연화문수막새 등 기와류와 주름무늬병, 인화문토기 등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또 왕궁리 5층 석탑 내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제작시점이 통일신라시기에서 고려 초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영역 내에서 고려시대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4단계 시기의 상한은 안승의 보덕국이 설치된 7세기 중반, 하한은 고려가 개창되기 직전인 10세기 초로 볼 수 있다.

5단계는 외곽의 성벽과 5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된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는 동벽의 내측에 있던 고려시대 건물지 2기와 우물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기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정 중 사찰이 폐지되고 건물들도 폐기된 것 같다. 이는 근처의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말~통일신라시대까지 익산 왕궁성 및 사찰을 운영하던 세력은 고려라는 새로운 정권과는 친밀하지 않은 관계였고, 이 때문에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4 왕궁리 유적의 주인은 백제 무왕

익산 왕궁리 유적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해당 유적이 왕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처음에는 고구려 왕족 안승이 세운 보덕국의 궁궐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에 정착시켰고 그곳에 보덕국을 세웠다는 문헌 기록이 있는데다가, 당시까지 유적을 백제 궁궐로 볼 근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백제시대에 천도를 위해 궁궐을 조영한 것이라면 응당 관련 문헌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 또 왕궁리 유적이 한 나라의 도읍을 상징하는 궁궐로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라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때문에 이 유적이 만약 궁궐이라 해도 왕도의 궐이라기보다는 별궁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제기된 정도였다.

그러나 앞서 확인하였듯이 발굴 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보다 앞선 백제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면서 유적의 실체와 관련하여 백제 무왕과 익산의 관계가 다시금 대두되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었던 자료는 일본 교토의 쇼우렌인(青蓮院)에서 발견된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이다. 이 자료는 익산이 백제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가장 직접적인 기록이다. 여기에는 “백제의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새로 [제석]정사([帝釋]精舍)를 경영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이이서 정관13년(639년) 벼락으로 제석사에 화재가 발생하였다는 사실과 불탑 아래 불사리(佛舍利)·채색한 수정병·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을 안장하였지만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는 등의 내용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왕궁리 5층 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금강반야경과 사리병 등의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왕궁리 유적 근처에 있는 1탑 1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 제석사지의 존재, 그리고 제석사지 발굴조사 결과 화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관세음응험기』 기사에서 말하는 지역은 바로 익산이며 기사 내용 자체도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 ‘무광왕’이란 왕호는 『삼국유사』 권2 무왕(武王) 조에 “옛 책(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라는 기사와 『삼국유사』 권1 왕력편(王曆篇)에서 무왕에 대해 “무왕 혹은 무강” 이라고 하는 부분과 통한다. 즉 백제 무왕은 기록에 보이는 무광왕·무강왕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고 그는 익산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무왕 시대에 익산에 왕궁을 지었을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왕궁리 유적의 발굴 결과나 관련 사료를 종합하면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의 왕궁이었으며 백제 말, 특히 무왕 시대에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규모나 기록의 부재를 보았을 때, 아직까지는 천도를 위한 왕궁 조영이었다기보다 별도 혹은 별궁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도읍에서 나타나는 필수 요소인 궁·사원·왕릉·성은 보이지만 그 외 왕도로서 기능할 제반 시설들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경영된 사찰 역시 정확히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익산 지역이 무왕 시대에 이르러 정치·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큰 사찰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볼 때 통일신라시기까지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기능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익산 왕궁리 유적과 관련하여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이 유적이 본래 백제 왕궁으로 조영되었다는 사실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언제까지 활용되었는지, 이후 경영된 사찰은 누가 어떻게 경영하였는지 등의 문제는 아직도 명쾌하게 해명되지 못하였다. 향후 연구를 통해 아직 풀리지 않은 많은 수수께끼들이 밝혀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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