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장군총

장군총[將軍塚]

천 육백 년을 버티어 온 거대한 고구려 무덤

미상

장군총 대표 이미지

장군총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장군총(將軍塚)은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위치한 고구려 대형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무덤 양식은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으로서, 장군총은 고구려 적석총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알려져 있다. 또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무덤은 대략 4~5세기 무렵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현재 광개토왕 설과 장수왕 설로 나뉘어 있다.

2 고구려의 전기를 대표하는 무덤, 적석총

고구려 전기 무덤 양식을 대표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은 지면을 고른 후 그 위에 돌을 깔아 주검을 안치하고, 돌을 덮어 매장하는 무덤 양식이다. 이러한 적석총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 졸본(卒本)이 자리했던 중국 환런현(桓仁縣) 및 전기 왕도 국내성(國內城)이 있는 지안시(集安市)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 일대를 흐르는 압록강 중하류 및 혼강(渾江) 유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다. 적석총의 무덤 양식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안치하였던 중국 동북 지역의 여타 무덤 형식과 뚜렷이 구분되어,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무덤 양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적석총은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과 축조 기술에 따라 여러 형식이 있다. 하나의 무덤에 한 사람의 시신만 안치하기도 하지만, 한 무덤 안에 매장 공간을 여러 개 시설하여 여러 기의 시신을 안치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또 무덤에서 시신이 안치된 곳이 돌구덩이 형태[석광 시설]로 남아 있는 사례도 있으나, 돌로 상자 모양을 만든[석곽 시설] 사례, 또 합장이 가능하도록 한쪽에 입구를 낸[석실 시설] 사례 등 여러 형식이 있다. 무덤 축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고구려 적석총의 외형은 단단한 돌무지 형태[무기단 적석총]로부터 기존 돌무지무덤 형태에 잘 다듬어진 돌로 가장자리를 두르는 기단이 나타난 형태[기단 적석총]로 변화하였으며, 최종적으로 계단 모양으로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형태[계단 적석총]로 발전하였다. 장군총은 이러한 ‘계단 적석총’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못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의 적석총은 기원전 2세기 전으로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조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에 따른 고구려 적석총의 전개 양상을 대략 살펴보면,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기원 전후 시기까지는 대략 돌무지 형태의 무기단 적석총이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 돌무지무덤에 기단이 시설된 기단 적석총이 출현하고, 3세기 이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계단 적석총이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4세기 이후로는 태왕릉(太王陵), 천추총(千秋塚), 장군총(將軍塚) 등 왕릉급의 초거대 적석총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초거대 적석총의 출현은 4세기 이후로 단단히 확립된 고구려 왕권과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 고구려 적석총의 최종 형태, 장군총

장군총은 능원(陵園)과 배장묘[배총]가 있는 ‘계단 적석 석실분’으로 만 여기가 넘게 보고된 고구려 적석총 중에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무덤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 국내성 유적으로부터 동쪽으로 7.5km 떨어져 있으며, 초거대 적석총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용산(龍山) 남쪽 기슭에 자리하는 장군총의 남쪽으로 1.5km 거리에는 임강총(臨江塚)이 위치하고, 서남쪽으로 2km 거리에는 우산(禹山) 일대 고구려 적석총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태왕릉이 자리한다. 중국 측에서는 1966년 지안시에 있는 고분 유적을 조사한 이후 이 무덤에 ‘우산하(禹山下) 1호’라는 유적 번호를 지정하였다.

장군총은 지면을 파고 그 안에 작은 강돌을 채워 넣어서 기초를 다진 뒤 돌로 지대석을 만든 다음 계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지대석 아래에는 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수 시설을 마련하였고, 쌓아 올린 계단 내부에는 다시 강돌과 산돌을 채워 넣었다. 계단을 이루는 석재는 화강암을 규격에 맞게 자른 다음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들었는데, 석재 하나의 길이는 2.4~3.5m, 폭은 0.9m 내외로 비교적 균일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석재의 밖으로 드러난 면을 약간 경사지게 다듬었고, 상면 가장자리에 홈을 주어서 위에 놓인 돌이 밀려 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장군총의 계단은 총 7층으로 그 전체 높이는 약 12.4m에 달하며, 계단 각 층을 한 칸씩 올리면서 1m 정도 안으로 들여 쌓기를 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가장 아래 계단을 기준으로 무덤 한 변의 길이는 약 31.5m에 달하며, 각 변마다 커다란 돌을 3매씩 기대어 놓아 돌의 무게로 인해 무덤 하층부가 바깥으로 밀려나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장군총 계단 축조에 사용된 돌은 총 1,177매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31매가 결실되어 1,146매만 남아 있다. 7층 계단 위는 백회를 섞은 흙으로 봉하였으며, 7층 계단석 둘레에는 작은 둥근 홈이 비슷한 간격으로 돌아가며 확인되고 있는데, 이 홈은 고분 조사에서 철제 연결고리가 수습된 점을 통해 볼 때, 아마도 난간을 세웠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장군총의 7층 계단 위에는 목조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신이 놓여 있었을 널방은 3층 계단 위에서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널길이 5층 계단과 연결되는 구조로 조성되었다. 널방은 잘 다듬은 돌로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게 벽을 쌓은 후 평행 고임을 하고 한 장의 돌로 천장을 막은 형태로 되어 있다. 널방 바깥쪽 천장 주위에는 강돌과 황토에 짚풀·백회 등을 섞어서 봉하여, 널방 안쪽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널방 바닥에는 돌을 깔고 그 위에 관대 2기가 동-서 양쪽으로 배치하였다. 널길은 밖으로 가면서 조금씩 넓어지는데, 널길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도 확인되고 있다.

4 장군총 주변 배총 및 제대 시설과 능원

조사를 통해 장군총 주변에서는 두 기의 배장묘[배총]와 제대(祭臺) 시설이 보고되었다. 1930년대 조사보고서에서는 장군총의 북쪽에 동-서 방향으로 4, 5기의 배장묘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두 기의 배장묘만이 확인된다. 배장묘의 형태는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총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규모는 장군총보다 훨씬 작은 편이다. 1호 배장묘는 장군총의 북동쪽 방향으로 43m 정도 떨어져 있으며, 2호 배장묘는 장군총의 북쪽으로 35m 정도 떨어져 있다. 잘 보존된 것은 1호 배장묘로서 무덤 주위에서 연화문(蓮華門) 와당과 기와, 철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2호 배장묘 주위에서는 황색 유약을 바른 잔편과 말발굽 등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지안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초거대 적석총의 주변에서는 왕릉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시설인 제대 유구가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장군총의 제대 유적으로 보고된 시설은 2호 배장묘와 연접해 있다. 제대 시설은 평평한 대지에 얇은 장방형 평면으로 터를 닦은 다음 그 둘레에 가지런히 돌을 놓아 돌리고, 다시 그 내부가 강돌로 채워져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보고에 따르면, 제대 시설의 동남쪽에서 금동신발 바닥과 마면, 금동권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장군총 주변으로 담장 시설이 뚜렷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장군총 둘레를 돌아가면 30m 폭으로 강돌을 깐 흔적이 보여 본래 장군총에도 능원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서남쪽에서는 낮은 돌담이 발견되고 있어서 본래는 담장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무덤의 서남쪽으로 100m 되는 곳에서 붉은색 기와와 와당, 담장, 문지, 배수구 홈통 등이 확인되어 이것을 장군총과 관련된 건물지로 추정하고 있다.

5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장군총은 일찍부터 왕릉으로 지목되어 동명왕릉·산상왕릉·광개토왕릉·장수왕릉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는데, 특히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와 장수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장수왕이 즉위한 뒤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 본인의 능으로 조영한 ‘수릉(壽陵)’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이와 함께 광개토왕의 무덤으로는 장군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우산하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태왕릉을 지목하고 있다. 그 유명한 「광개토왕비」가 태왕릉 동쪽 인근에 서 있으며, 장군총의 경우 태왕릉에 비해 비석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점도 고려된 의견이다. 반면, 근래 한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에서 왕이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조영하는 ‘수릉제’가 시행되지 않았다고 보아 국내성 지역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장군총이 바로 광개토왕릉이라고 보는 의견도 많다.

고구려에서 적석총의 규모가 거대화되는 것은 4세기 후반 무렵인데, 그중에서도 장군총과 인접해 있는 태왕릉이 다른 무덤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이 시기 고구려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적석총은 태왕릉과 더불어 천추총을 들 수 있는데, 천추총은 무덤 한 변의 길이가 80m를 상회하며, 태왕릉도 60m를 상회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장군총은 태왕릉 한 변의 길이에 절반 정도밖에 안 되며, 무덤이 차지하는 면적도 태왕릉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 국내성 시기를 장식한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광개토왕의 무덤은 그 규모로만 놓고 볼 때, 태왕릉이 보다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석의 규모나 절석 가공 등 기술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태왕릉보다 장군총이 보다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또 고구려의 초거대 적석총이 태왕릉을 정점으로 하여 축소되기 시작하는 동시에 무덤의 내부 석실은 거석화·정형화되는 양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군총의 석실에 보이는 석재 가공기술의 수준, 묘실 구조의 정형화와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태왕릉의 그것보다 장군총이 오히려 완성도가 높다. 이로 보아 광개토왕릉은 거대한 무덤 규모를 과시하는 태왕릉보다 크고 견고한 묘실을 가지고 있는 장군총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구려의 초거대 적석총 발전 방향은 거대한 규모의 태왕릉에서 그보다는 작은 규모로 조영된 장군총으로 이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왕릉이 그 거대한 규모로 권력을 상징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한층 더 기술적으로 진보한 왕릉을 조영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