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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성[평양성][長安城[平壤城]]

고구려의 후기 도성

미상

장안성[평양성] 대표 이미지

조선시대 평양성도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장안성(長安城)은 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과 평천구역 일대의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고구려 후기의 도성 유적이다. 평양성(平壤城)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평양성과 구분하기 위해 후기 평양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586년에 천도하여 668년 고구려 멸망 때까지 사용되었다.

장안성(평양성)은 대동강 북쪽의 모란봉(해발 96.1m)과 을밀대, 만수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였으며, 나머지 3면은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활용하면서 자연 절벽과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성벽 외곽의 전체 둘레는 약 16km이며, 안쪽 성벽까지 포함하면 23km에 달한다. 산성과 평지성이 합쳐진 평산성(平山城) 구조로, 기존의 고구려 도성과는 달리 주민의 거주지역이 포함된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중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성은 크게 내성·중성·외성·북성으로 구분된다. 외성에는 정방형 단위의 격자형 구획이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당시 리방제(방리제)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로 고려와 조선을 거쳐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훼손되거나 개축된 부분이 많아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외성이 석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조사 결과 장안성은 축조 당시 전체적으로 석축성벽이었음이 확인된다.

2 장안성(평양성)의 고고학 조사 내용

장안성(평양성)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으로, 조선고적연구회 평양연구소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만수대 일대에서 문지와 건물지 및 성벽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평양성(장안성)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나, 한국전쟁 이후 복구과정에서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54년에는 평양역 동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도로 유구가 확인되었고, 1978년에는 고구려 평양성에 대한 단행본이 출간되었음에도 평양성의 구조와 축조 방법, 시설물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제시되지 않았다. 평양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0년대 이후로, 1994년에서 1996년까지 평양성 중성과 외성 몇 지점을, 2011년에는 외성 2개 지점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양성은 평양 시가지 북쪽의 금수산 모란봉에서 을밀대, 만수대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지를 북면으로 하고, 동-서-남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의 언덕을 따라 쌓은 복합식 성곽으로,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성은 평양성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지점에 이르는 구간으로, 현무문과 전금문, 동안문이 있다. 내성에는 칠성문과 장경문, 대동문, 주작문, 정해문과 북장대(을밀대)가, 중성에는 경창문과 보통문, 정양문, 함구문, 육로문 등이 있으며, 외성에는 선요문과 다경문, 거피문, 고리문 등이 있다. 내성에는 궁전건물, 중성에는 관청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성 동남부에는 남북도로와 동서도로가 남아있다.

중성 일부와 외성은 방형으로 구획된 도로와 시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성의 정양문에서 서남쪽의 다경문으로는 운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외성의 구획(방리)은 대·중·소의 도로를 통해 나뉘는데, 대로는 그 폭이 14m 내외, 중로는 4.8m 내외로 추정된다. 도로에 의해 구획된 방리는 한 변의 길이가 177.08m 가량인 방형이고, 그 내부는 한 변이 88.54m인 4개의 소구획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방리제는 중국 북위(北魏)의 평성(平城, 422년 축조)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방은 주변이 담장으로 둘러진 평면 방형의 공간으로, 평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목민이나 농경민을 사민하는 과정에서 주민 통제를 위해 도입되었다. 방리제는 이후 북위 낙양성은 물론 수·당의 장안성으로 이어져 고대 동아시아 도성제의 전형으로 정착되었다.

평양성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잘 가공된 성돌로 쌓은 석축 성벽이다. 조선시대에는 외성이 토로루 인식되었으나, 조사 결과 고려시대 이후 무너진 성벽 위에 흙을 덮어 고쳐 쌓았기 때문임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성벽의 입지에 따라 축조기법에서 세부적인 차이를 보인다. 일부 성벽의 경우 외면은 석축이나 내부에 토심(토축부)가 있는 토심석축공법으로 쌓았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구려 중기 이후에 새롭게 나타나는 축성 기법이다. 북한에서는 석성 내부의 토축부를 고조선 시기의 토성으로 보기도 하나, 국내성과 마찬가지로 성벽을 튼튼하게 축조하기 위한 기초부 내지는 석축 성벽 내부의 토심일 가능성이 크다.

3 장안성의 축성 과정

『삼국사기』에 따르면 양원왕 8년(552)에 장안성을 쌓고 , 평원왕 28년(586)에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고 한다. 문헌기록만 놓고 본다면, 성을 쌓고 30여년이 지난 후에 도읍을 옮긴 것이 된다. 그렇지만 평양성에는 축성 시점과 축조 구간, 관리감독자 등이 기록된 성돌(刻字城石)이 여러 개 발견되어, 당시의 축성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외성과 내성에서 발견된 각자성석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주로 소형(小兄) 정도의 관리가 축성을 감독하였으며, 축성 구간은 일정하지 않다. 성돌에 새겨진 간지는 기축(己丑), 기유(己酉), 병술(丙戌)인데, 552년에 장안성을 축조하였다는 문헌기록에 따라 6세기 후반으로 연대를 배열해보면 각각 566년(丙戌), 569년(己丑), 589년(己酉)에 해당한다. 여기에 따르면 장안성은 566년에는 내성을 쌓았고, 외성에 대한 공사는 장안성으로 천도한 이후인 589년에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평양속지(平壤續志)』 성지(城池) 북성조(北城條)에 따르면 “본 성은 4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북성에서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외성과 북성을 포함한 장안성의 축성 공사는 착수한지 42년이 지난 593년에 최종 완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장안성의 축조가 상당히 오래 걸렸다는 점과 축조 배경을 검토하여 최초 장안성은 별궁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 내성에 국한되었으며, 586년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 다시 중성과 외성을 축조하여 왕도의 공간을 재구성하고, 방어성의 개념으로 북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552년 장안성 축조가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내성이 축조된 것은 566년이며, 586년 내성을 완공하여 이도(移都)를 단행하였던 것이 된다. 이후 589년에 다시 외성과 중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시기에 북성의 축조도 시작되었으며, 최종 완료는 593년이었다.

4 장안성 축조의 의미

고구려 후기의 도성이었던 장안성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사를 시작한 지 40여년이 지난 6세기 말에 완공되었다. 외곽 성벽의 둘레가 16km에 달하는 거대한 성곽으로,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고대 도성은 통상적으로 왕이 머무르는 궁을 보호하는 내성과 거주민들의 취락을 둘러싼 외곽으로 구성된 방형의 큰 성곽도시의 형태였다. 그렇지만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고구려에서는 중기까지도 도시를 둘러싼 대형 성곽의 구조가 아니라 왕도 내에 왕이 거주하는 궁성만 존재할 뿐이어서 중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6세기 중엽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周書)』 고려전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장안성은 기존의 고구려 도성과는 달리 주민의 거주 지역을 외성에 포함시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외성에는 주민을 통제할 수 있도록 방리제가 실시되었다. 다만 중국의 도성이 방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장안성은 지형에 맞춰 성벽을 쌓는 등 고구려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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