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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발해 초기의 도읍지와 발해 공주의 삶

777년

정혜공주묘 대표 이미지

정혜공주묘 표지석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는 발해의 3대왕인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둘째 딸이 묻힌 곳으로서,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吉林省 敦化市 六頂山)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의 주인은 무덤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묘비(墓碑)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무덤의 주인뿐만 아니라 그동안 문헌에 전해지지 않던 발해 초기 역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현재 정혜공주의 묘비는 중국 장춘시 지린성 박물관(長春市 吉林省博物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무덤의 주인과 생애

묘는 지린성 둔화시 남쪽 육정산에 있으며 이곳에는 다수의 고분이 분포해 있다. 육정산이라는 이름은 동서로 뻗은 여섯 개의 봉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를 따라 2개의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이 중 정혜공주묘는 서쪽인 제1고분군에 있다. 묘는 1949년 8월 연변대학 주도로 9개의 고분을 정리하면서 발견되었는데, 이때 무덤 안에서 정혜공주묘비가 발견됨으로써 그 주인이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임을 알 수 있었다.

무덤은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 돌로 쌓은 방을 흙으로 덮은 무덤)으로 잔존 높이는 1.5m이고, 깊이 2m에 무덤칸이 조성되어 있다. 무덤칸은 남북 2.8~2.94m, 동서 2.66~2.84m, 높이 2.68m이다. 네 벽은 흙을 발라 다듬었고, 바닥에는 벽돌을 깐 다음 큰 평면석을 놓아 관대를 만들었다. 천정은 모줄임(네 벽의 모서리에 판돌을 얹어 가운데가 마름모형이 되도록 쌓는 방식)의 형태로,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으나 복원되었다. 묘비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통로 안에서 일곱 조각으로 깨진 채 발견되었는데, 화강암 재질의 규형비(圭形碑 :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형태)로 만들어졌다. 비의 크기는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로서, 앞면에 무덤의 주인인 정혜공주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는 본래 21행 725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이미 깨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러 군데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1980년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의 묘와 묘비가 발견됨으로써 확인이 불가능했던 부분의 내용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 두 묘비의 내용이 거의 동일했기 때문이다. 정혜공주의 묘는 내부의 형태나 무덤의 방향 등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고구려 후기의 고분 양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1959년에는 무덤을 재정리하면서 봉토 안에서 다수의 암키와 파편이 출토되었고, 이를 통해 무덤에 기와를 쓴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높이 60cm의 돌로 만든 한 쌍의 사자가 출토되었는데, 무덤 입구에 돌사자를 두는 것은 당시 당(唐)에서 유행하던 방식이었다. 이는 규형비로 제작된 정혜공주묘비의 형태와 함께 발해가 당시 중원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1년 중국은 정혜공주묘를 포함한 육정산 고분군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분류하여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다.

묘비의 내용에 의하면 정혜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로서,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비문은 당대(唐代)에 유행한 변려체(騈儷體 : 문장이 4자, 6자의 대구를 구사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적 감각을 주는 문체) 문장을 구사하여 서술되어 있고, 공주의 신상과 생애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면 동생인 정효공주의 것과 차이가 없다. 비문에 의하면 정혜공주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남편은 일찍 죽었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역시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영향일지 모르겠으나 공주 역시 장수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777년(보력(寶曆) 4년) 여름 4월 14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혜공주라는 시호(諡號 : 왕이나 사대부 같은 자들이 사망한 후 그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추증하는 호) 역시 이때 붙여진 것으로, 3년 뒤인 780년(보력 7년) 11월 24일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陪葬 : 본 무덤 옆에 딸린 종속 무덤. 주로 신하나 가족 등이 안장됨)되었다고 한다. 정혜공주의 비문이 후대에 발견된 여동생 정효공주의 비문과 비슷한 것은 당시 발해에서 묘비를 세우기 위해 미리 비문의 대강을 작성해두고 망자의 신상에 관련된 내용을 첨가하여 완성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3 발해의 구국(舊國)과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의 발견은 초기 발해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먼저 3대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의 묘가 돈화시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됨에 따라, 대조영이 당의 영주에서 탈출하여 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발해를 건국했다고 하는 구국(舊國)의 위치가 현재의 둔화시 일대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구국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가리킨다. 구국의 구체적인 위치와 관련해서는 육정산 인근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과 오동성지(敖東城址)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오동성지는 여러 학자에 의하여 발해의 첫 도성인 구국으로 지목되어 왔으며, 그 이유로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근거가 제기되어 있다.

① 성이 내외 두 겹의 성으로 이루어지면서 성 내부에서 발해 시기의 기와나 질그릇 조각이 출토된 점
② 성의 형태가 발해의 다른 수도였던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및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와 비슷하다는 점
③ 돈화 분지의 가운데 있으면서 육로와 수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는 점
④ 주변에 위성들이 존재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오동성을 지키고 있다는 점
⑤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구국의 거리(300리)가 현재의 두 지역과 일치하는 점
⑥ 왕실 및 귀족의 고분군으로 비정되는 육정산 고분군이 가까이 위치한 점

그런데 정혜공주가 사망한 777년에 발해는 건국 당시 수도였던 구국, 즉 현재의 둔화시를 떠나 닝안시(寧安市)의 상경용천부로 천도한 상태였다. 왕의 딸이라는 정혜공주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공주 역시 천도를 따라 상경으로 이주했을 법도 하지만, 그녀의 무덤은 구국에 조영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발해에 귀장(歸葬 : 타지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에 장례 지내는 것) 풍습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비문의 내용 중 그녀가 생전에 궁중에 있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구절(薨于外第 : 궁 밖 내지 수도 바깥에 위치한 사저에서 사망함)을 통해 볼 때, 애초에 그녀가 본래 상경에 거주하지 않고 구국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정혜공주묘의 배장 대상이 된 진릉의 경우 현재 육정산 제1고분군의 6호분으로 비정되는데, 실제 무덤의 주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왕실의 구성원인 공주를 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일 가능성이 높은데, 현재는 2대왕인 무왕 대무예(武王 大武藝, 재위 717~737)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진릉이 정혜공주의 아버지인 문왕의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녀의 사망 당시 문왕 대흠무는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이 될 수는 없다. 왕의 무덤에 붙이는 이름은 그가 사망한 뒤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발해의 제도가 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려할 때, 배장의 방식도 당의 그것과 비슷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해볼 수 있다. 당에서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의 묘 옆에 배장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감안하면 발해에서도 공주는 선대 왕의 무덤에 배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더불어 당에서 증조부, 고조부의 곁에 묻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공주의 증조부인 대조영 역시 가능성이 떨어진다. 결국 진릉은 정혜공주의 할아버지인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으며, 무왕의 재위기에 발해가 구국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즉, 무왕이 먼저 사망하여 진릉에 매장된 후, 정혜공주가 구국에서 사망하게 되면서 예법에 따라 할아버지인 무왕의 능 곁에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정혜공주묘가 위치한 육정산 고분군은 구국을 수도로 삼은 시기뿐 아니라, 상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왕족의 묘지로써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비문에 의하면 정혜공주는 대흥보력효감□□□법대왕(大興寶曆孝感□□□法大王)의 둘째 딸인데, 이는 여동생인 정효공주의 비와 비교해볼 때, 본래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당에서 황제에 대한 존호(尊號)로서 ‘~孝感皇帝’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당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당에서 비문에 보이는 존호를 쓴 황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이는 대왕은 발해의 왕일 가능성이 높은데, 정혜공주가 사망한 날짜에 맞는 왕은 문왕뿐이므로 비문의 대왕은 문왕을 가리킨다. 그런데 왕의 존호는 일반적으로 왕의 생시에 그를 칭하는 호칭으로써 불렸기 때문에, 공주의 묘비에서 이와 같은 존호가 확인된다는 것은 공주가 사망할 당시 왕이 생존해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사서에 전하는 문왕의 재위 기간은 793년까지이므로, 묘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비문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구절은 보력(寶曆)이라는 연호이다. 『신당서』에는 발해 문왕 시대의 연호로서 대흥(大興)이 있었음은 확인되지만 보력은 당의 황제인 경종(敬宗, 재위 824~826)의 연호로만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 기간도 7년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비문에 보이는 보력은 발해의 연호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문왕은 아버지인 무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후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쳤다고 하므로 보력이라는 연호는 적어도 37년간 사용된 대흥 연호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비문에 따르면 정혜공주는 보력 4년인 777년에 사망하여 보력 7년인 780년에 매장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발해에 3년상을 치르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3년상의 풍습은 고구려에서 3년상을 치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고구려와 유사한 풍습을 가진 측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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