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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발해 공주가 알려주는 발해인의 모습과 중경현덕부

792년

정효공주묘 대표 이미지

정효공주묘 벽화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발해의 3대왕인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넷째 딸이 묻힌 곳으로서, 현재 지린성 허룽현 용두산(吉林省 和龍縣 龍水鄕 龍海村 龍頭山)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의 주인은 무덤 내부에 있던 묘비(墓碑)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이를 비롯하여 그동안 문헌에는 전해지지 않던 발해 초기 역사와 관련된 중요 정보들을 파악하였다. 정효공주묘를 비롯한 용두산 고분군의 존재는 인근에 위치한 서고성(西古城)을 발해 시기의 수도였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비정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2 무덤의 주인과 생애

정효공주묘는 용두산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서, 1980년 10~12월과 1981년 5~6월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용두산은 허룽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져 있으며, 산 남쪽 비탈에는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만든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용두산 고분군은 발해 중경현덕부로 비정되는 서고성에서 동남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어서, 중경현덕부의 관할구역 범위 내에 속한 것으로 판단된다.

용두산 고분군 안에는 다시 몇 개의 고분군으로 구분된다. 가장 좋은 입지는 정효공주묘가 있는 용두산 남쪽 동편의 기슭이며 주변으로 용호(龍湖) 고분군, 용해(龍海) 고분군, 하남촌(河南村) 무덤 등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고분군 역시 무덤의 형태나 출토유물의 상황으로 보아 발해 귀족들의 무덤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발해가 구국을 수도로 하고 있을 당시 인근에 육정산 고분군이 왕실과 귀족 묘지로 사용되었음을 볼 때, 중경현덕부를 수도로 하고 있을 때의 왕실 및 귀족 묘지는 용두산 일대의 고분군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묘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 돌로 쌓은 방을 흙으로 덮은 무덤)으로 무덤 칸, 무덤 안길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 칸은 지하 4m 깊이에 남북 3.10m, 동서 2.10m, 높이 1.90m이며, 바닥의 가운데에 벽돌로 관대를 쌓았는데, 본래는 5층이었으며 표면에 회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대는 남북 2.40m, 동서 1.45m, 높이 0.40m이다. 무덤을 조사할 때 남자와 여자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나이는 25~45세로 추정되었다. 공주보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는 묘비의 내용을 참고하면, 이 무덤에는 정효공주와 그 남편이 같이 매장된 것으로 보이며 유골은 그들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무덤은 일찍이 도굴당하여 부장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부에서 토우 얼굴 부분 2점, 금동 구리 장식품 8점, 금동 구리못 7점, 쇠못 7점 및 칠기, 질그릇 파편이 발견되었다. 글자가 새겨진 벽돌 또한 발견되었는데 ‘會邦于廣’, ‘蘭書’, ‘屎尿産孝’라고 쓰여 있다. 무덤의 위에는 탑을 세웠던 흔적이 확인되는데, 현재 탑신은 무너지고 기초만 남아있다. 정방형에 가까운 기초의 크기는 남북 5.56m, 동서 5.50m로, 가운데는 남북 2.70m, 동서 2.60m 크기로 비워두었는데,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 칸의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았으며 남쪽 벽을 제외하면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안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천정은 평행 고임으로 쌓았으며 역시 회칠이 되어 있다. 무덤 칸의 네 벽에는 벽화가 남아 있다. 벽화는 세월의 흐름으로 인하여 색이 희미해진 부분이 있으나 대체로 잘 알아볼 수 있게 남아있다. 모두 12명의 인물을 다양한 색을 활용하여 그렸다. 남쪽의 동서 벽에는 무사가 한 명씩 그려져 있는데, 호위무사를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동쪽과 서쪽에는 네 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내시와 시위, 악사 등을 그렸다. 북쪽에는 두 명의 사람을 그렸는데, 이들은 망자를 보필하는 시종으로 보인다. 이 무덤 벽화는 현전하는 발해 무덤 가운데 유일한 벽화로서, 당시 발해인들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공주의 묘비는 1980년 발굴 시 무덤길 뒤쪽에 완전한 형태로 세워진 채 발견되었다. 비는 화강암 재질로서 규형비(圭形碑 :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난 형태)의 형태이며, 크기는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고, 정면에 18행 728자의 정효공주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비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비의 내용에 의하면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서,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비문은 당대(唐代)에 유행한 변려체(騈儷體 : 문장이 4자, 6자의 대구를 구사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적 감각을 주는 문체) 문장을 구사하여 서술되어 있고, 공주의 신상과 생애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면 언니인 정혜공주의 것과 차이가 없다. 비문에 의하면 정효공주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남편은 일찍 죽었고, 둘 사이에 낳은 딸 역시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공주 역시 장수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792년[대흥(大興) 56년] 여름 6월 9일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효공주라는 시호(諡號 : 왕이나 사대부 같은 자들이 사망한 후 그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추증하는 호) 역시 이때 붙여진 것으로, 5달 뒤인 11월 28일에 염곡(染谷)의 서쪽 언덕에 배장(陪葬 : 본 무덤 옆에 딸린 종속 무덤. 주로 신하나 가족 등이 안장됨)되었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먼저 발견된 정효공주의 언니 정혜공주의 비문과 몇 군데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데, 이는 당시 발해에서 묘비를 세우기 위해 미리 비문의 대강을 작성해두고 망자의 신상에 관련된 내용을 첨가하여 완성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3 정효공주묘와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비문에 의하면 정효공주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넷째 딸로서 이를 통해 공주가 정혜공주와 자매이며, 정혜공주묘에서 읽을 수 없었던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당에서 황제에 대한 존호(尊號)로서 ‘~孝感皇帝’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당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당에서 비문에 보이는 존호를 쓴 황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이는 대왕은 발해의 왕일 가능성이 높은데, 정효공주가 사망한 날짜에 맞는 왕은 문왕뿐이므로 비문의 대왕은 문왕을 가리킨다. 왕의 존호는 일반적으로 왕의 생시에 그를 칭하는 호칭으로써 불렸기 때문에, 공주의 묘비에서 이와 같은 존호가 확인된다는 것은 공주가 사망할 당시 왕이 생존해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존호 가운데 금륜성법(金輪聖法)이라는 표현은 불교적 용어로서 발해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표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공주의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형태 역시 불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당시 발해 왕실이 불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비문에는 불교적 색채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의 문학작품에서 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이로 보아 문왕 시기 발해의 유교 문화 수준 역시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다른 구절은 대흥(大興)이라는 연호이다. 『신당서』에는 발해 문왕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쳤음을 전한다. 그런데 언니이자 먼저 사망한 정혜공주묘비에 의하면 대흥 연호를 37년간 사용한 뒤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로 바꿨음을 알 수 있는데, 정효공주가 사망했을 때에는 다시 대흥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정혜공주가 사망한 이후 어느 시점에 발해는 다시 대흥 연호를 썼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연호 사용과 관련하여 비문에서는 황상(皇上)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문맥상 이는 당시 왕이었던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며 그가 황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정효공주는 사망 후 염곡(染谷) 서쪽 언덕에 배장 되었다고 하는데, 정효공주묘가 위치한 곳은 용두산의 협곡 서쪽 산 위에 있다. 이로 보아 이 협곡이 비문에서 말하는 염곡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염곡 일대가 발해 왕실 구성원들이 묻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궁금해지는 것은 정효공주묘가 누구의 무덤에 배장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구국(舊國, 현재의 중국 둔화시이자 발해의 첫 수도)에 묻힌 언니 정혜공주는 진릉(珍陵)에 배장 되었다고 하는데, 이 진릉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무왕 대무예(武王 大武藝)의 무덤일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효공주가 묻힌 염곡에도 그녀의 묘를 배장한 능이 있을 것인데, 현재로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의 능에 배장되는 경향이 있었던 당(唐)의 상황과 이에 영향 받은 발해의 상황을 생각하면, 정효공주 역시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의 무덤에 배장 되었겠으나 그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한편 정효공주묘를 비롯한 용두산 일대의 고분군을 관할 범위 내에 두고 있는 주요 지역으로서 인근의 서고성이 주목된다. 성은 장방형의 형태로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외성은 동서 630m, 남북 730m이며 둘레는 2720m이고, 내성은 외성의 북쪽에 치우친 장방형으로 남북 310m, 동서 190m이며 북쪽이 외성의 북쪽 성벽과 70m 가량 떨어져 있다. 성 내부에서는 수많은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내부 건물지의 배치로 보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와 같이 발해 시기의 수도들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어 수도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형 역시 강에 접해 있던 오동성의 경우처럼, 서고성 역시 해란강을 끼고 위치해 있으며 건너편 산기슭에 용두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문헌 기록상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구국의 오동성과 육정산 고분군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정효공주묘가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과 서고성은 그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곳을 중경현덕부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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