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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

신라를 강국으로 만든 군주의 풍모

미상

진흥왕 순수비 대표 이미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새로 개척한 국경 지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하여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대부분은 자연석에 해서체로 음각하였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경상남도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 소재 북한산비, 함경남도 함주의 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비 등이 있다. 이 비석들은 신라의 관제·신분제·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설립의 배경과 현황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37년의 재위 기간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그리고 한강 하류 지역으로 나아가 서해안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 일대까지 경략하는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이 영토에 편입하였다.

진흥왕 순수비는 이렇게 확대한 신라의 영토를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핌과 동시에 국가에 충성하고 전쟁에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포하고 군신이 함께 경하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4개로 이들을 약칭하여 창녕비・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라고 한다. 이 비들은 당시의 삼국 관계와 신라의 정치·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으며, 건립연대는 561년(진흥왕 22년)이다. 비석의 규격은 높이 115.1~300㎝, 너비 175.7㎝, 두께 30.3~51.5㎝이다. 화강암을 다듬어 해서체의 글자를 새긴 것으로 글자의 크기는 고르지 않으나 대체로 4㎝를 넘지 않는다. 직선으로 글자를 둘러싸는 선을 그었으나 정연하지는 않다. 비문은 비석 앞면에만 새겼으며, 글씨를 새기는 과정에서 면을 다듬은 흔적이 있다. 비문은 16행으로 각행 26자 정도가 새겨져 있다. 다른 순수비들이 비 전체를 다듬어 사각형의 비신(碑身)을 가진 것에 비해 이 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형태상 차이가 있다.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다.

4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에 있었던 것을 경복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16년(순조 16년)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조사된 적이 있다. 비석의 재료는 질이 좋고 견치한 화강암이다. 건립연대는 글자의 마멸로 분명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와 함께 검토해본다면 아마도 568년 10월 이후로 추정된다. 비의 규격은 높이 154.0㎝, 너비 69.0㎝, 두께 16.6㎝이다. 비의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받침돌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금도 비봉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로 보아 본래는 덮개돌, 몸돌, 받침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두 12행으로 각 행에 32자씩 해서체의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비의 오른쪽 면에는 “차신라진흥대왕순수지비 병자칠월 김정희 김경연내독(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과 예서로 “정축육월팔일 김정희 조인영동래 심정잔자육십팔자(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라고 김정희가 새긴 글자가 남아 있다. 또한 “기미팔월이십일 이제현 용인인(己未八月二十日 李濟鉉 龍仁人)”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5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비의 재질은 흑색을 띤 단단한 화강암으로, 비신은 높이 146.9㎝, 너비 약 44.2㎝, 두께 30㎝이다. 건립연대는 568년(진흥왕 29년)이다. 현재 모습은 덮개돌과 받침대가 있으나 후대에 갈아 끼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앞뒷면에 글을 새긴 양면비이다. 비 앞면은 10행, 각행 26자로 되어 있고, 비 뒷면은 8행, 각행 25자로 되어 있다. 북한 국보 제11호이다.

6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현재 비석은 3개의 편을 접합한 상태이며, 상단 일부와 좌측 상단은 남아있지 않다. 비신은 대략 높이 92.4㎝, 너비 45㎝, 두께 20㎝이다. 글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도 많으나 「마운령비」와 비교하여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첫머리가 존재하지 않아 건립연대를 확정할 수 없으나 마운령비와 내용이 유사하여 진흥왕 29년(56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단단한 화강암을 물손질하여 세운 것으로, 현재 3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면에는 방격을 긋고 그 안에 12행, 각행 약 33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이다. 비편이 완전하지 않아 판독에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구성이 동일한 「마운령비」를 통해 상당 부분을 추정할 수 있다. 북한 국보 제110호이다.

7 순수비의 내용과 성격

먼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창녕지방을 영토로 편입한 뒤 이곳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다만 다른 3개의 순수비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문구가 있어 순수비라 부를 수 있으나, 본 비에는 그러한 문구가 없어 척경비(拓境碑)라 칭하기도 한다. 내용상 순수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순수비로 분류한다. 비문의 내용 중 주목되는 것은 경제와 관련된 부분으로 “토지가 협소하였으나 … 수풀을 제거하여 … 토지와 강역과 산림은 … 대등과 군주, 당주, 도사와 외촌주가 살핀다.”로 해석이 되는 부분이 있다. 토지와 산림을 중앙관·군지휘관·지방관·재지 세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사를 통해 국가에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기존의 황무지를 국가가 앞장서서 활용 가능한 토지로 개척함과 동시에 국가에서 토지나 임야의 지목을 파악하였던 모습을 전해준다. 또한 “해주백전답(海州白田畓)”, “산염하천(山鹽河川)”의 문구를 통해 산지, 소금땅, 하천 등으로의 구획이 이루어질 정도로 국토의 이용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논과 밭이 구별되었는데, 논은 “답(畓)”이라는 우리식 한자로 표현하고 밭은 “백전(白田)”이라고 한자로 표현하고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한편, 비문 상에서 진흥왕이 어려서 즉위하였다는 사실이 나오고 문헌에 나오지 않는 “대일벌간(大一伐干)”을 비롯한 경위가 등장하였다. 또한 군주(軍主)·당주(幢主)·도사(道使)·사대등(使大等)·조인(助人) 등 지방의 중요 관직의 명칭이 나와 중앙과 지방의 관등 및 관직 제도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판독이 미비한 부분이 많지만, 비문 구성은 대체로 다른 비와 같이 제기(제1행)·기사(제2∼7행)·수가인명열기(제8·9행)·영사(詠辭, 제10∼12행)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가 건립된 북한산 지역은 진흥왕이 551년에 백제 성왕(聖王)과 합세해 고구려 점령지였던 한강 유역을 탈환해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553년에 나제동맹을 파기한 뒤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신라 영토가 되었다. 이 비는 한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곳을 순수관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 첫머리에서 “진흥태왕(眞興太王)”, 당시 연호였던 “태창(太昌)”, “제왕건호(帝王建號)”, “짐(朕)”, “순수(巡狩)” 등의 용어가 보이는 것은 6세기 들어 성장한 신라의 자신감을 반영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석굴에 거주하는 “도인(道人)”의 존재를 통해 새로 편입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음도 알 수 있다. 진흥왕이 단지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도 힘썼음을 볼 수 있다.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 구성은 앞면에 제기(제1~2행)와 기사(제3행~제10행) 내용이 나오고 뒷면에 수가인명열기(제1~8행)이 새겨져 있어, 전체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는 ㅍ이 이원 지방을 순행한 뒤 군신이 더불어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북한산비와 같이 비문 첫머리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보이며, ‘제왕건호’·‘짐’·‘순수(巡狩)’ 등의 용어가 보여 당시 신라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비의 경우 비문 판독이 거의 완전한데, 황초령비와 같은 해에 세워졌고 또 황초령비에 보이는 수가인명이 이 비에도 보이고 있어 황초령비의 마멸된 글자를 판독하고 보충하는 데 좋은 비교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수가인명의 표기에서 일정한 원칙을 찾을 수 있는데, 관직명(官職名)-출신지명(出身地名)-인명(人名)-관등(官等)의 순서로 쓰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관직과 출신지가 동일할 경우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관등은 높은 순서대로 기록하되 중복되더라도 생략하지 않았다.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구성은 제기(제1행)·기사(제2행~제7행 15자)·수가인명열기(제7행 17자~제12행)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비는 진흥왕이 함흥지역을 순수하고 나서 군신이 모여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의 파손 및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나 판독되는 부분이 마운령비와 구성이나 내용이 같아 전체적인 구성 등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관학자들은 황초령비의 진위를 의심하기도 하고 윤관(尹瓘)이 철령(鐵嶺)에 있던 것을 여진 정벌의 때에 옮겼다고도 보았으나, 후에 더 북쪽에 위치한 마운령에서 순수비가 발견되면서 진흥왕의 순수비로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8 진흥왕 순수비의 의의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한 금석문 자료이다. 건립연대에 관한 문제, 비의 건립 취지에 관한 문제, 비에 등장하는 상대등·대등에 관한 문제는 현재도 연구자들 사이에 마땅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4개의 비는 단양적성비와 더불어 진흥왕 시대 지배층의 동향과 중고기 신라의 조직체계, 통치체제, 인명 표기, 관등제 등을 비롯하여 육부의 운영실태 등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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