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집안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

광개토왕비와 쌍벽을 이루는 고구려 비석

미상

집안고구려비 대표 이미지

집안고구려비 발견 위치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2012년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는 고구려 시대의 비석으로서 414년 장수왕 시대에 건립된 광개토왕비보다도 앞서 제작된 고구려 최고(最古)의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 볼 때, 비석은 광개토왕이 역대 선왕(先王)의 왕릉에 건립한 수묘비(守墓碑)의 하나로 파악되며, 비석 건립 시점은 397년 혹은 407년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 비석이 장수왕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비문의 서두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 대한 언급과 당시 고구려 왕릉에서 사시제사(四時祭祀)를 거행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또 그 뒤로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대에 그보다 앞서 제정된 율(律)에 입각하여 다시 왕명을 발포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제를 수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 비석의 발견 경위와 위치

2012년 7월 29일 오전의 일이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마셴향(馬線鄕) 마셴촌(馬線村)의 주민 마사오빈(馬紹彬) 씨는 마을에 있는 옛 다리 아래 약 100m 지점에서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비석은 높이 1m 73cm, 너비 60.6~66.5㎝, 두께 12.5~21㎝였으며 무게는 464.5㎏이나 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지점은 지금의 중국 지안시와 단둥시(丹東市)를 잇는 이른바 ‘지단(集丹) 도로’와 가까운 마셴허(馬線河) 인근이었다. 마셴허는 라오링산(老嶺山)에서 발원하여 마셴 분지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하천이다. 이 마셴 분지에는 고구려 시대 거대 적석총(돌무지무덤)인 천추총(千秋塚)과 서대묘(西大墓)를 포함해 많은 고구려 시대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비석을 발견한 마사오빈 씨는 곧바로 현지 문물 관리 당국에 보고하였고, 현장에 곧바로 전문가가 파견되어 비석에 대한 조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시조(始祖) 추모왕(趨牟王)”, “사시제사(四時祭祀)” 등의 글자가 확인되면서 이 비석이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와 연관 있는 고구려 시대 비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다. 이로써 비석은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비석 발견 이후 중국에서는 ‘집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領導) 소조(小組)’와 전문가위원회가 결성되어 탁본 및 비문 판독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석 명칭을 ‘집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로 정하면서 이후 학계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3 비문의 해석과 내용

집안고구려비에는 비석 전면에 총 10행 218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9행까지는 행당 22자, 마지막 10행은 20자가 새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신(碑身)의 오른쪽 윗부분이 발견 당시 이미 깨진 상태였기 때문에, 1행의 처음 4자, 2~3행의 처음 3자, 4행의 처음 1자 등 총 11자는 완전히 결실된 상태이다. 또한 비면의 마모도 제법 심한 편이어서 연구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확실한 추독을 포함하여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대략 150~170여 자 정도로 보고되고 있다. 또 비석 뒷면에도 글자가 새겨진 흔적이 보인다는 견해도 있는데,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미 집안고구려비에 대해서는 한·중 학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석이 진행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비문 판독과 해석에 대해서도 가지각색의 의견이 개진되었다. 아래는 학계에서 제시된 여러 견해 중 여호규(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성과를 참고하여 비문의 글자와 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자못 의견이 분분한 문제이지만, 비문의 구성은 ①고구려 건국 설화와 왕위계승을 기술, ②왕릉 제사 및 수묘제 문란, 국강상태왕 즉위에 대한 기술, ③수묘제 확립을 위한 광개토왕의 교언(敎言) 이렇게 대략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A. 고구려 건국 설화와 왕위계승을 기술
(원문)
■■■■世 必授天道 自承元王 始祖鄒牟王之創基也 日月之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継胤相承 (해석)
■■■■ 때에 필연적으로 하늘의 도(天道)를 내려주시니, 스스로 원왕(元王)을 계승하여,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개창하셨도다. 일월(日月)의 아드님이시자 하백(河伯)의 후손으로서 신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셨다. 후사(後嗣)로 이어져 서로 계승하였다.

B. 왕릉 제사 및 수묘제 문란, 국강상태왕 즉위에 대한 기술
(원문)
■■■■各墓烟户 以■河流 四時祭祀 然而世悠長 烟戶守■■ 烟戶■劣甚衰 當買■轉賣數 ■守墓者以銘■■ ■■■■ 國岡上太王 ■平■■王神亡, ■興東西■■■■世室 追述先聖功勳 彌高烋烈 継古人之慷慨
(해석)
… 사시(四時)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그렇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 연호(烟戶)가 열악해지고 쇠락하여 팔리거나 되팔리는 자가 많아졌다. 이에 수묘자(守墓者)를 … 하여 … 에 새겼다. … 국강상태왕(國岡上太王)께서 … 추술(追述)한다. “선성(先聖)의 공훈(功勳)이 아주 높고 매우 빛나며 고인(古人)의 굳센 의지를 계승하였다.”

C. 수묘제 확립을 위한 광개토왕의 교언(敎言)
(원문)
丁■■好太■王曰 自戊■定律 教內發令 更脩復 各於先王墓上立碑 銘其烟户頭廿人名 垂示後世 自今以後 守墓之民 不得擅買更相轉賣 雖富足之者 亦不得其買賣 因若違令者 後世継嗣■■ 看其碑文 与其罪過
(해석)
정■년에 호태왕(好太■王)이 이르시기를 “무■년에 율(律)을 정한 이래로 교(教)하여 영(令)을 발포하여 다시 수복(修復)하였다. 각 선왕의 묘상에 비석을 세우고 연호두(烟戶頭)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여 보인다. 지금 이후로 수묘하는 백성은 함부로 사거나 다시 서로 되팔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권력자(富足之者)라도 매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영(令)을 어긴 자는 후세토록 ■■를 이어받도록 하고, 비문을 보아 죄과(罪過)를 부여한다.”고 하셨다.

[여호규의 2013년 판독 및 해석을 참고]

4 비석의 건립 시기와 성격

비석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현재 광개토왕 시대로 보는 학설이 우세를 점하는 가운데 이와 함께 장수왕 시대로 보는 견해도 개진되고 있다. 우선 비석 건립 시기를 파악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절은 위의 비문 C 단락의 “각 선왕(先王)의 묘상(墓上)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두(烟戶頭)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여 보인다.”는 부분이다. 이는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 조에서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만이 모든 조선왕(祖先王)을 위하여 묘상(墓上)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차착(差錯)되지 않도록 하였다[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라는 구절에 상응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盡爲祖先王, 墓上立碑’라는 구절이 집안고구려비에서는 ‘各於先王墓上, 立碑’로 변형되었지만, 두 문장 모두 역대 선왕의 왕릉에 비석을 건립한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 이전에는 왕릉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이 광개토왕 시대에 세워졌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역대 선왕의 왕릉에 수묘인연호의 명단을 새긴 비석은 광개토왕 시대에 처음 세워졌고, 이 비석은 그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이 비석이 광개토왕 시대에 건립된 비석일 가능성이 크다면, 그 구체적인 건립 시점은 위의 비문 C 단락 첫 구절에 보이는 정■(丁■)년을 주목할 수 있다. 위의 C 단락은 당시 광개토왕이 집안고구려비를 비롯한 여러 왕릉 수묘비를 세우면서 내린 왕명을 기술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왕명이 내려진 정■(丁■)년을 바로 집안고구려비가 건립된 시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광개토왕 시대에 정■(丁■)년에 어울리는 해는 정유년(丁酉年)인 397년(광개토왕 7)과 정미년(丁未年)인 407년(광개토왕 17)이 있다. 즉 이 비석은 광개토왕 시대인 397년 혹은 407년에 건립된 비석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이 비석이 장수왕 시대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비문의 7행 4~8자[위의 판독문에서 ‘好太■王曰’로 쓴 부분]를 “丁卯歲刊石”으로 판독하고, 이를 근거로 이 비석이 정묘년인 장수왕 15년(427)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중국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판독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지만, 집안고구려비에는 무덤 주인공에 대한 서술이 없고 수묘인의 매매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어느 한 왕릉에 세워진 ‘수묘연호비’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집안고구려비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其碑文”이 광개토왕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며, 집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비보다 뒤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더불어 광개토왕이 조선왕(祖先王)을 위해 능에 세운 비석들을 장수왕 시대에 다시 수복한 뒤 수묘인 매매 금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공시(公示)하기 위해 수묘인들의 집단 거주지에 다시 비석 하나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집안고구려비라고 파악하고 있다.

한편, 비문 C 단락에는 “무■년에 율(律)을 정한 이래로[自戊■定律]”라는 구절에서 보듯 무■년(戊■年)이라는 시점도 보인다. 이는 수묘(守墓)에 관한 율(律)을 정한 시점으로서, 무■년에 대한 판독과 그에 따른 시기 비정은 무자년(戊子年, 고국양왕 5년, 388년), 무신년(戊申年, 광개토왕 18년, 408년), 무오년(戊午年, 장수왕 6년, 418년) 등의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이중 학계에서는 이를 무자년(戊子年)으로 읽고 고국양왕 5년인 388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즉 광개토왕의 부왕인 고국양왕은 자신의 치세 말년에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는 등 국가 제사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는데, 이것이 그에 앞서 고국양왕 5년인 388년 무자년에 제정하였다는 율(律)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러한 의견을 집안고구려비가 광개토왕 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설과 연관하여 보면, 광개토왕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무자년(戊子年)인 388년에 제정한 율(律)에 근거하여 왕릉에 수묘비(守墓碑)를 건립하고 수묘제(守墓制)를 대대적으로 보완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비석의 성격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앞서 언급한 대로 가장 많은 연구자의 지지를 받는 비석의 건립 시점을 광개토왕 시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집안고구려비의 성격도 대체로 광개토왕이 여러 선조 왕[祖先王]을 위해 세우게 한 ‘묘상입비(수묘인연호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한편, 비석의 건립 시점을 광개토왕 시대로 보는 견해를 취하면서도 집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이 시행한 1차 수묘제 개편의 내용을 담은 것이고,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이 시행한 2차 수묘제 개편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아 집안고구려비는 수묘제 개편의 내용과 근거를 새긴 수묘율령비(守墓律令碑)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혹은 고구려 율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교령비(敎令碑)’라는 의견도 있다. 반면, 비석의 건립 시기를 장수왕 시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수묘인 매매 금지법을 상기시키고 처벌 규정을 강조하기 위해 세운 행정적인 기능과 성격이 강한 일종의 경고비(警告碑)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自戊■定律” 부분에 대한 판독 견해에 따라 ‘정률비(定律碑)’로 바라보는 의견도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