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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정[鐵鋌]

철 화폐로 경제와 권력을 장악하다

미상

철정 대표 이미지

덩이쇠

e뮤지엄(국립김해박물관)

1 개요

철(鐵)의 사용은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인류의 생활을 급격하게 바꾼 금속이다. 인간 사회는 철기시대를 맞이하면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고 잉여생산물이 창출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철기는 주변 지역(국가)과의 전쟁이나 권력 다툼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 자원으로서의 철, 철제품, 철 생산 도구와 기술을 소유한다는 것은 지배자(지배층)가 될 수 있는 자격 요건과도 같았다. 고대의 철제품은 완제품으로서 무기(칼, 창, 화살촉 등)나 공구(도끼, 낫 등), 갑주(갑옷과 투구), 마구류(재갈, 등자, 말띠꾸미개 등) 등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는 형태(철정)로 제작되기도 했다.

2 저승까지 가지고 간 철정(鐵鋌)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석탈해조에 탈해가 스스로 대장장이라 칭했다는 내용을 보면 당시 철을 다룰 줄 아는 대장장이는 매우 중요한 직업으로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直觀知)를 보면 경덕왕 대에 철유전(鐵鍮典)을 축야방(築冶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되돌렸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로 보아 궁중수공업 내에 단조작업을 하는 공인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더불어 물질 자료를 찾아보면 철을 추출하고 철제품을 만드는 제련·제철유적이 각지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완제품과 철제품 생산도구가 부장된 무덤도 많다. 무덤 속에는 엄청난 양의 고대 물질자료가 남아 있다. 무덤의 부장품에는 신분을 상징하는 화려한 금공 제품뿐만 아니라 무력과 경제력을 나타내는 철제품, 그리고 제사 음식을 담기 위한 여러 토기 등이 있다.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철제품은 갑옷이나 투구, 칼, 창, 화살촉, 도끼, 낫, 삽날, 재갈, 등자와 같은 완제품으로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무덤 부장품 중에는 물건(완제품) 외에 소재(素材) 또는 재료로서 활용할 수 있는 철정과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인 단야구(鍛冶具)도 있다. 단야구는 철제품 생산도구로 모루, 집게, 망치, 끌, 숫돌 등을 말한다. 이처럼 무덤 속 철제품과 철정은 권력과 부, 무력의 상징이었고 권력이 어디로 집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먼저 철광석 자체를 무덤에 넣는 경우가 있다. 창원 다호리 64호 목관묘에서 확인된 철광석은 무게가 약 6㎏이 넘는 것으로 철 소재나 철제품이 아닌 광석 자체를 무덤에 부장한 최초의 사례인데, 고대 사회에서 철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아마도 무덤의 주인공은 철광산에서 철광 채취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한 단계에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 자원과 철 생산 기술의 확보가 중요했는데, 그 증거는 무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에서 63매의 길쭉한 철제품이 바닥에 관대(棺臺)처럼 7열로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황남대총 단계에 이르면 철제품의 독점적인 소유를 극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무덤에서는 약 3,200여 점의 철기 중 주조(鑄造)로 만든 도끼와 철정이 1,700여 점이나 발견되었고 1,200여 점의 판상철정만 일렬로 세워도 그 길이가 약 243m나 되었다. 또 부산 복천동 1호분은 신라식 금동관이 나온 무덤으로 바닥에 각 10매씩 1세트로 묶을 수 있는 철정이 모두 10 세트이므로 총 100 매가 ‘⊏’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김해 대성동 29호분이나 양동리 유적에서도 무덤 바닥에 깔아놓은 철정이 확인되었고 함안 도항리 유적에서도 대형 철정을 확인할 수 있다. 호서 지역인 완주 상운리 무덤에서도 철정이 레일 모양처럼 깔려 있어 관대처럼 활용되었고, 충주 탄금대토성 내 저수시설에서도 철정이 5매씩 포개진 상태로 3열(15매)+2열(10매)+3열(15매)로 총 40매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물질 증거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 “(물건을) 사고팔 때 철(鐵)을 사용했는데, 마치 중국에서 전폐(錢幣; 화폐)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라는 기록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 백제왕(근초고왕)이 철정 40장을 일본왕에게 주었다”라는 기록 등과 잘 부합한다.

무덤 안에는 철기 제작과 관련한 도구인 단야구가 확인되기도 한다. 단야구는 철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인 망치, 집게, 줄(鑢), 철착(鐵鑿), 모루(鑕)를 말한다. 삼한·삼국시대 유적에서 간간이 일부 또는 1세트 정도 확인되는데 특히 완주 상운리 유적에서는 약 20세트가 출토되어 단일 유적으로 최대 출토량을 자랑한다. 단야구는 창원 다호리 유적의 단야구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마한·백제권에서는 4~5세기대, 가야·신라권에서는 5~7세기대 유적에서 확인된다. 다른 유물과는 달리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는데, 보아 생산도구로서의 실용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무덤의 주인공과 그 후계자들은 무덤 부장품으로 철소재인 철정을 선호하였고 철 생산과 관련 있는 지역의 무덤에서는 전문 공인(또는 공방)의 소유를 나타내는 단야구를 무덤에 넣기도 하였다.

보통 철정은 덩이쇠라고 하며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중간 소재(素材)로서 철의 유통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화폐나 위신재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형태는 단조(鍛造; 두드려서 만든 제품) 쇠도끼에서 판상철정(板狀鐵鋌)과 봉상철정(棒狀鐵鋌)으로 변한다. 판상철정은 얇고 긴 철판형 또는 가운데가 잘록하고 양쪽 끝이 넓어지는 형태가 있고 봉상철정은 긴 막대기(봉)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철정은 기본적으로 크기가 규격화되어 있고 5매나 10매씩 묶음 단위로 부장되었다.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 철정 중에서 약 80% 정도가 김해와 부산지역 출토품이고 그다음으로 함안지역이 많은 출토량을 보이고 있다. 이에 비해 대가야권에서는 철정의 출토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반도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덩이쇠가 확인된다.

3 철을 다루는 전문 공인들의 흔적

철(Fe)은 지구 전체의 35% 차지하는 중요한 원소로 자성(磁性)을 띠며 다른 원소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열을 잘 전달하며 탄소 함유량에 따라 단단한 정도가 달라진다.

철제품이 널리 사용되기 위해서는 제철 기술의 발전과 확산뿐만 아니라 철 자원의 생산지와 공방이 갖추어져야 하고 대내외적인 유통망이 형성되어야 한다. 먼저 제철(製鐵)을 위해서는 철이나 철광석, 목탄, 제련로와 송풍시설을 갖춘 제철로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철제품을 만들기 위해 단야구도 필요하다.

먼저 철광석이나 사철, 토철을 추출해내는 제련 과정으로 탄소의 함유량에 따라 괴련철·강철·선철로 구분한다. 철을 추출한 다음에는 정련과정을 통해 불순물을 제거한다. 그리고 정선된 철 소재를 얇은 철판이나 막대기 모양의 중간 철소재를 만든다. 그 다음 철소재를 가열하고 두드려서 단조 철기를 만들거나 선철을 완전히 녹여 거푸집에 부어 주조 철기를 만든다. 철소재는 판상철부, 주조철부(또는 괭이), 철정의 형태로 구분되는데, 삼한 시기에는 판상철부가, 삼국시대에는 철정(얆고 긴 판상형, 또는 막대기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제철 공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이 대표적이다. 선철(銑鐵)은 강철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고 단단하면서도 잘 부러지는 성질이기 때문에 주조용으로 사용하고, 괴련철(塊鍊鐵)은 탄소량이 매우 적어 두드려서 만드는 단조용으로 사용한다. 제련 과정은 철광석이 채취되는 곳의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효율적이며 정련이나 용해는 추출된 철 소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철광석 산지 근처가 아니어도 된다. 따라서 철산지를 알기 위해서는 제련 유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좋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경주부 감은포에 사철이 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신라가 가장 활용하기에 효과적이었던 철광석 산지는 울산 달천광산이었다. 비소가 함유된 울산 달천광산의 철광석은 경주 덕천리 유적의 철광석과 성분이 다르다.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의 철 원료는 울산 달천광산의 것으로 밝혀졌다. 울산 외에 제련 공정과 관련된 유적은 김해 하계리·여래리·우계리유적, 창원 봉림동, 밀양 사촌유적, 울산 중산동유적, 양산 물금유적, 울진 덕천리 유적 등이 있다. 밀양 사촌유적에서는 영남 지방 최초로 완전한 구조를 가진 7기의 제련로가 확인되었는데 긴 타원형의 평면구조와 원형의 노, 타원형의 배재구(排滓口; 불순물 배출구)로 이루어져 있다. 각종 슬래그(鐵滓)와 노벽편, 대형 송풍관과 일정한 간격의 노가 2-3기 이상 있는 것으로 보아 대량 생산체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양산 물금 가촌리 유적에서는 제철과 관련된 집단이 짧은 기간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수혈유구 내 패각류는 제련로에서 철을 만들 때 필수적인 융제나 용제로 사용한 순도 높은 탄산칼슘 분말을 구하기 위해 저장하거나 구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 용해로의 경우는 한 번 사용하고 폐기하는 일회성이었거나, 경주 황성동 유적처럼 적어도 3회 정도의 보수과정을 통해 여러 번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변한과 가야 지역의 철 생산과 관련된 직접적인 유적은 김해, 창원, 마산 지역에서 확인될 뿐이며 경주 황성동과 밀양 사촌·금곡 유적, 양산 물금 유적, 울산 달천광산 등과 같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신라 지역에 비해 유적이 제한적이다. 특히 울산 달천광산은 조선시대 세종 때에도 1만 2500근의 철을 조정에 바칠 정도로 유명한 광산이었다. 백제 지역인 진천 석장리 유적과 충주 칠금동 유적도 대규모 제철유적으로 제련로의 지하구조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제철과 관련해서 주목받는 유구는 목탄(숯)을 만드는 탄요(炭窯)이다. 즉 철광석을 녹이는 작업을 할 때 가장 많이 필요한 원료가 목탄이다. 제철 과정에서는 철 원료에 비해 3배 정도 많은 목탄이 필요하기 때문에 목탄 생산 유적과 철 생산 유적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탄 생산과 관련된 유적은 김해 산본리·여래리·우계리 유적, 창원 사림동 유적, 밀양 사포리·전사포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탄요의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며, 구조는 풍화암반층을 ‘L’자형으로 파서 만든 반지하식이다. 내부 구조는 연소부·소성부·연도부·측구·측면 작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4 국제적 교환가치를 지닌 실물화폐, 철정

철정은 영남 지역 무덤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며, 이와 함께 이 지역에 산재한 철광석 산지와 제련·제철유적은 신라 및 가야 사회가 우수한 철 생산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이 변한으로부터 철을 수입하였다”라는 기록과 “철이 중국의 화폐와 같이 사용되었다”라는 기록을 전하고 있어, 이로 볼 때 가야의 철자원은 중요한 교역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정은 지금의 금괴처럼 규격화된 쇳덩이로 실물 화폐로 활용되었고 교환가치가 높은 교역품이기도 하였다. 한반도 남부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및 왜(일본)와의 교역 네트워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의 철 소재의 교역은 특히 왜(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왜(일본) 또한 철 생산이 가능했지만, 제련 자체도 소규모였고 생산한 철의 완성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량을 가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로부터 수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문헌의 기록처럼 대외적인 교류 외에도 국내 철 유통도 활발하였다. 다량의 철정은 철제무기나 공구를 만들 수 있는 중간 소재였기 때문에 백제도 일정 부분의 수요가 필요했을 것이다. 호서지방에서 출토되는 철정은 변진한과의 교역 유통망을 통해 들어왔을 것으로 보이며, 남한강 상류의 충주와 지역 내 수장층이 집중된 미호천 유역의 청주를 중심으로 철기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진천이 철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쪽으로는 완주와 익산, 서산 등 호남지역에서도 철정의 존재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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