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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七支刀]

백제와 왜를 이어주는 신물

미상

칠지도 대표 이미지

칠지도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철로 만든 칼로, 7개(七)의 가지(支)처럼 칼날(刀)이 달려있어서 칠지도라고 부른다. 백제에서 왜(倭: 지금의 일본)에게 준 것으로 전해지며, 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칠지도가 지니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작 시기와 칼날에 새겨진 명문(銘文: 금석이나 기물 등에 새겨진 글)의 내용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2 칠지도의 발견과 독특한 형태

칠지도 는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후루쵸[布留町]에 위치한 이소노카미신궁에 소장되어 있으며, 철로 만든 조금 특이한 형태의 칼이다. 이소노카미신궁에 잠들어 있던 칠지도는 1874년 신궁의 궁사(宮司)였던 칸 마사토모[管政友]의 발견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물의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 본체의 길이는 65cm이다. 칠지도는 형태가 매우 독특한데, 본체에 가지처럼 양쪽에 세 개씩 칼날이 엇갈려 붙어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발견 당시에는 칼이 부러진 상태로 발견되어 정확한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처음 칠지도를 발견한 칸 마사토모는 이를 쇠창으로 생각하고 육차모(六叉鉾 : 6개의 엇갈린 창)라고 기록해두었다.

이후 1890년대에 들어서 칼 본체에 금으로 상감(象嵌)된 글자(명문)가 발견되어 이 칼의 이름이 ‘칠지도(七支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확인된 명문에는 ‘백제왕(百濟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세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칼날이 자루에서 빠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장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의도 혹은 의미를 가지고 제작된 의식용 또는 주술용 칼이었으리라 추정하였다. 칠지도는 이와 같은 귀중한 가치가 인정되어 1953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칠지도와 관련하여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칠지도가 곧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9월 기사에 등장하는 칠지도(七枝刀)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견해는 칠지도가 일본이 신라 및 한반도 7국을 점령하고 다스렸다 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며, 한때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은 물론 일본학계에서도 『일본서기』의 해당 부분은 윤색(潤色)하였거나 시기를 앞으로 당겨 작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현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위의 주장을 긍정하는 연구자는 드물다(무엇보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는 되어야 등장한다).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는 현재까지도 완벽히 판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문을 풀이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3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 : 명문(銘文)과 해석

칠지도의 본체에는 표면(앞)에 34자(35자 : 표면의 □□月의 앞을 1글자로 볼지 2글자로 볼지에 따라 달라짐), 이면(뒤)에 27자, 총 61자(62자)가 금으로 상감 되어 있다. 그러나 철면의 녹과 상감의 박락(剝落 : 돌, 쇠 따위에 새긴 그림이나 글씨가 오래 묵어 긁히고 깎여서 떨어지는 현상)으로 글자가 뚜렷하지 않아 확실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자는 20여 자 정도이며, 표면 아래쪽의 4글자는 아예 알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연구자마다 조금씩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비교적 최근에 칠지도를 새롭게 판독하여 출판한 “권인한ㆍ김경호ㆍ윤선태, 2015, 『〈한국목간학회 연구총서 02〉 한국고대 문자자료연구 백제(하) - 주제별 -』, 주류성, 603~614쪽”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판독 결과,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다.

(표면)
泰和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이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해석]
(표면)
태화 4년 (□□)월 16일 병오 한낮에 백번이나 제련한 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후왕에게 주기 알맞다. □□□□가 만들었다.
(이면)
선세 이래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이 대대로 뛰어난 성음(聖音)을 내어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여라.

칠지도의 명문은 표면에서 일시, 재질, 명칭, 길상구(吉祥句), 제작자(제작소)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면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등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혀줄 수 있는 내용이 남아있다. 명문의 서체는 전체적으로는 4~5세기 석각(石刻)에 보이는 해서체(楷書體 : 정자체)에 가깝지만, 일부는 2~3세기 석문(石文)에 자주 보이는 팔분서(八分書 : 한자 자체의 하나. 소전(小篆)과 예서(隸書)의 중간체)의 예서에 가까운 예서체(隸書體 : 간결하고 부드러운 서체)와 행서체(行書體 : 반흘림체)가 섞여 있다.

4 칠지도 명문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

칠지도는 ‘백제왕이 대대로 뛰어난 성음을 내어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는 문장 때문에 제작 시기 및 전달 시기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 백제와 왜가 어떤 관계[宜供供侯王]였는지, 명문 중 ‘기생성음(奇生聖音)’은 무엇인지 등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여러 방면에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① 칠지도의 제작시기
칠지도의 명문이 공개된 이후, 가장 먼저 관심이 쏠린 부분은 연호(年號)이다. 칠지도 표면의 가장 앞 문구는 ‘泰和四年(□□)月十六日丙午’로 시간을 나타내고 있어, 칠지도가 만들어진 시기를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태(泰) 뒤의 화(和)는 글자가 확실히 보이지 않아,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일본에서는 처음에 『일본서기』가 기록하고 있는 시기를 그대로 신뢰하여, 칠지도(七枝刀)가 언급된 신공황후 시대(3세기 중반)를 칠지도의 제작 시기로 생각하였다. 이에 해당 문구를 태초(泰初)로 보아 서진(西晉) 무제(武帝, 재위 266~290년)의 태시(泰始) 4년, 즉 268년으로 보았다.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는 태화(泰和)로 읽어 369년인 동진(東晉) 태화 4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본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한국학계에서는 삼국시대의 금석문에서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들어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년) 시대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호 뒤의 일시를 5월 13일이나 11월 16일 등으로 읽고, 해당 날짜가 병오(丙午)가 되는 408년으로 보거나, 연호인 태화를 북위(北魏) ‘태화(太和)’ 4년으로 보아 480년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태(泰)가 아닌 봉(奉)으로 읽어 ‘봉□’ 4년으로 보고 504년인 무령왕(武寧王, 462~523) 4년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연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제작 시기가 3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300년 이상 차이가 나게 된다.백제의 경 백제의 경우, 『한원(翰苑)』 이나 그 밖의 사료, 발견된 금석문, 목간 등에서 확인되는 기년(紀年 : 일정한 기원으로부터 계산한 햇수)을 기록하는 방식은 60갑자(甲子) 표기가 일반적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간지를 이용하였다고 해서 다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석조사리감 명문에는 ‘창왕(昌王) 13년’과 같은 형식으로도 기재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제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경우가 칠지도 외에 확인이 되지 않고 있어 시기를 비정하는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백제와 왜가 처음으로 통교(通交)하는 기록 이 나오는 4세기 말 무렵에 칠지도가 제작, 전달된 시기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특히 『일본서기』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근초고왕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일본서기』 신공황후 조의 기록은 대체로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발생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고 보고,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100년 뒤인 4세기 후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즉 ‘칠지도’ 언급 기사를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 시대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시 근초고왕은 동진(東晉)으로부터 책봉호(冊封號)를 받고 있어 백제만의 독자적인 연호가 아닌 동진의 연호인 ‘태화’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도, 현재 칠지도를 동진 태화 4년인 36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보는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다.

② 백제와 왜의 관계(宜供供侯王)
칠지도의 명문 중에 ‘의공공후왕(宜供供侯王)’은 백제와 왜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던 문구이다. ‘의후왕(宜侯王)’을 제외한 ‘공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백제가 왜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였다는 ‘백제하사설’, 백제가 왜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백제헌상설’로 양분되고 있다. 즉, ‘공(供)’을 ‘주다’로 해석할 것인지, ‘바치다’로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전자와 후자로 견해가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해당 표현을 길상구로 볼 것인지, 군신 관계라는 신분질서를 표현하는 문구로 볼 것인지로 나눠볼 수 있다.
칠지도의 표면과 이면의 문구는 각각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결성도 보인다. 표면의 ‘칠지도(七支刀)’가 이면의 ‘차도(此刀)’와, 표면의 ‘후왕(侯王)’이 이면의 ‘왜왕(倭王)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결하면 왜왕이 곧 후왕이 되어, 백제에서 왜왕을 후왕으로 여겼다고도 해석된다.
이면은 실제로 칠지도가 제작된 이유를 적고 있는 것과 달리 표면에 언급된 ‘의후왕’의 경우 중국 한대(漢代)의 유물인 칼이나 거울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이를 길상구라고 한다. ‘의후왕’은 이 물건을 소지할 후왕에게 행복을 기원하거나, 받는 사람이 후왕 혹은 그것에 준하는 높은 지위를 얻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길상구이다. ‘의공공후왕’은 ‘의후왕’에서 유래한 문구라고 본다. 이렇게 보면, 표면의 내용은 길상구가 중심이 되는 문장이 되므로 표면의 문구를 전체적으로 길상구라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의공공후왕’은 ‘후왕에게 주기 알맞다.’ 혹은 ‘후왕처럼 신분이 높은 자에게 주는 물건으로 알맞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신속(臣屬)하였거나, 반대로 왜왕이 백제왕에게 신속하였다는 의미로 읽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칠지도는 현재로서는 백제와 왜가 당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 정도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③ 기생성음(奇生聖音)
‘백제왕세세기생성음(百濟王世-奇生聖音)’ 역시 많은 쟁점을 안고 있는 문구이다. 한편에서는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으로 읽고, ‘기생’을 백제 왕세자 귀수(貴須) 또는 구수(仇首), 즉 근구수왕으로 보고, ‘성음’을 왕자를 의미하는 경칭어 세시무(せシム)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 왕세자 기생 왕자’라고 왕세자와 왕자가 같이 언급되는 점이 어색하다. 게다가 ‘기생’을 ‘귀수’나 ‘구수’로 보는 점도 의문이 든다.
현재는 ‘기생성음’을 보통명사로 보는 경우가 많다. 크게 3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성스러운 덕’이나 ‘신성한 계시’, ‘성상의 말씀’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백제가 왜왕의 은택을 받고 있어’, ‘백제 왕세자가 기이하게 태어나 성스러운 덕이 있기 때문에’ 등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이것은 ‘백제왕세세기생성음(百濟王世-奇生聖音)’을 ‘백제왕세자기생성음(百濟王世子奇生聖音)’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자(子)’가 ‘-’로 판독되면서 해당 문구는 왕세자가 아닌 ‘왕세-(王世-)’, 즉 ‘왕세세(王世世)’가 되어 위와 같이 해석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두 번째는 불교와 관련한 문구로 보는 것이다. ‘불타의 소리’, ‘석가의 은택’ 등으로 해석된다. 칠지(七支)가 불교에서 말하는 칠각지(七覺支)나 칠각분(七覺分)이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7가지 수행방식 또는 7가지 죄과를 상징한다고 보고, 성음은 부처의 말씀으로 본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를 384년이라고 보고 있어, 시기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불교는 국가에 공인되기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384년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점이 아니라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시점으로 보기 때문에 시점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도교와 연결된 문구로 보는 것이다. ‘신선의 가르침’으로 보고, 칠지도의 형상이 도교의 수목숭배신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당시 기록에서 왕과 신하의 대화 중 『도덕경(道德經)』의 내용을 인용하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 지배층에게 도교가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여 칠지도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칠지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종교가 불교인지 도교인지는 특정하기 어려우나, 현재로서는 칠지도의 제작에 당시 백제 지배층의 신앙생활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국가 간의 교섭에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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