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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泰安 東門里 磨崖三尊佛立像]

백제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독특한 도상(圖像)의 마애불

미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대표 이미지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태안군 동문리에 있는 백화산(白華山)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백제(百濟)의 마애불(磨崖佛)이다.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의미하는데,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가로 약 5.5미터, 높이 4미터, 두께 1.5미터 되는 바위의 동쪽면을 다듬은 뒤 조각하였다. 삼존불(三尊佛)이 중앙에 본존불을 봉안하고 좌·우에 협시불(脇侍佛)이나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반해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중앙에 보관을 착용한 보살상을 배치한 후 보살상 좌·우에 여래상을 보살상보다 크게 만들어 놓고 있어 일반적인 삼존불 배치형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삼존불 배치방법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백제 장인의 창의적인 조각능력이 반영된 것이다. 태안반도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항로는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는 최단 항로이며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는 태안반도 일대에는 백제의 대(對)중국 항구가 있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백제 사람들이 위험이 상존하는 바닷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독창적인 도상을 통해 보았을 때 백제가 독자적인 교리해석을 조형화 할 만큼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2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현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오랫동안 무릎 아래가 땅에 매몰되어 있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었다. 바위가 갈라져 있는 상태여서 흙을 치우면 조각된 부분이 앞으로 넘어질 위험이 있었다. 1995년 여름 앞으로 기운 부분을 바로 세운 후 암벽에 접착시키고 무릎 아래의 흙을 제거하였다. 그 결과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일반적인 삼존불 형식에서 벗어나 중앙에 보관(寶冠)을 착용한 보살상이 위치하며 보살상의 좌·우에 여래상이 있는 독특한 배치 형식을 보여준다. 중앙의 보살입상은 원통형 보관에 가까운 삼산관(三山冠)을 착용하고 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보살의 머리카락(보발)은 귀 양쪽으로 늘어져서 어깨에 닿고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눈·코·입의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볼록한 양 볼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보살은 천의(天衣)를 착용하고 있으며 어깨부터 흘러내린 천의는 무릎 부근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무릎 아래의 다리는 두 다리가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양 팔에 걸쳐 흘러내린 옷자락은 다리 측면까지 내려온다. 보살의 손은 가슴부근에서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보주를 감싸고 있다. 두 손으로 가슴 아래 부분에서 보주(寶珠)를 감싸고 있는 형태의 보살상을 봉보주형보살상(捧寶珠形菩薩像)이라 한다.

삼국시대 보살입상 중에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아래위로 모아 둥근 보주를 마주 잡고 서 있는 보살입상이 다수 발견된다. 불교에서 보주는 여의보주 또는 여의주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니(摩尼)로 불리며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구슬을 의미한다. 불교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어두움 혹은 무지를 밝혀주는 힘이 있으며, 추우면 따뜻하게 하여 주거나 질병을 고쳐줄 수 있어 중생을 정신적인 고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는 불법의 무한한 공덕과 신통력을 갖추고 있는 상징체로 알려져 있다.

중앙 보살상의 대좌는 머리에 비해 얕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 발받침 아래에는 가운데 잎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연잎이 표현되어 있는 연화대좌이다. 보살상의 연화대좌 양 측면은 협시상처럼 표현된 좌·우 여래상의 연화대에 가려져 있다. 삼존불의 신체만 놓고 보면 동일한 선상에서 보살상이 중앙에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살상의 대좌 측면이 여래상의 대좌에 가려진 모습을 보면 보살상은 동일한 선상에서 중앙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여래상 뒤편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태안 마애삼존불상 중 보살상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병립한 여래상 뒤편에 물러나 서있는 보살상이다.

여래입상은 턱이 발달한 둥근 얼굴에 장대한 체구를 하고 있다. 살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며 여래상의 머리 위에는 좁고 높은 형태의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두 여래상 모두 양쪽 어깨를 덮는 통견 형태의 대의(大依)를 착용하고 있는데 가슴 부근이 크게 열린 형태이며 대의 안쪽에는 내의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가슴 부근에는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있으며 매듭 한 쪽이 위로 올라간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여래상의 양 발은 수평으로 일직선상에 놓아 움직임이 없는 꼿꼿한 자세이다. 여래상의 대좌는 보살상의 대좌에 비하여 크기가 더욱 크며 볼륨감이 있다. 광배는 보주 모양의 두광이 양 여래상에서 확인된다. 삼존불상이 있는 바위 면은 안쪽으로 파여져 있어 마치 감실에 안치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향 우측의 여래상 측면에는 목조를 결합시킨 구멍이 남아 있어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에는 목조 건물이 함께 조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래입상의 머리와 상체는 환조(丸彫)에 가깝게 입체적으로 조각되었으며 하체는 얕게 조각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마애불 제작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향 우측의 여래입상은 왼손 위에 둥근 지물을 올려놓고 있다. 두 여래입상의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 중지를 피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은 상태로 손바닥이 밖으로 보이게 들고 있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여래상의 왼손은 향 우측의 여래상의 경우 손 위에 지물을 들고 있으며 향 좌측의 여래상은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보인 채 손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시무외인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원인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꼽힌다. 바위의 재질이 거친 관계로 상대적으로 풍화가 빨리 진행되어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긴 목에서 어깨선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체구에 굵직하고 자연스럽게 흘러 팔목에 걸쳐진 주름의 대의 자락은 상당한 수준의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몸에 칠해진 붉은색과 군데군데 남아 있는 녹색 안료의 흔적이다. 이러한 채색이 마애불을 만들던 당시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미 바위에 스며든 부분을 보면 상당히 오래전에 채색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더불어 백제 불상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삼국시대 불상은 명문기록이나 문헌기록 등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상의 조성시기는 6세기 말, 600년경, 6세기 후반, 7세기초, 7세기 전반 등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크게 보았을 때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는 6세기 말과 7세기 전반으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을 6세기 말로 보는 의견은 태안 마애삼존불이 취하고 있는 장신의 키에 어깨가 넓고 풍만한 특징과 옷주름 등을 주목하고 있다. 태안 마애불삼존불입상의 장대한 외관과 크고 둥글며 육계가 작은 두상 및 굵은 옷주름 등의 특징은 중국 청주(青州) 용흥사지(龍興寺址)의 북제(北齊)대 여래입상과 같은 새로운 인도풍의 불입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 청주 용흥사지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 6세기 후반경 백제의 불교조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를 600년경으로 보는 의견은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에 대한 가장 이른 연구 성과에서 피력된 의견이다. 이 의견은 1962년 황수영 박사에 의해 주장되었다. 한국미술사가 아직 학문으로 충분히 성숙되기 이전에 주장된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연구성과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 역시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를 7세기 초반이나 7세기 전반으로 보는 견해의 근거 역시 북제 및 북주(北周)와 수나라의 불상과 비교를 통해서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기로 나누어지는 이견의 차이는 중국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 백제로 전달되는 시차에 대한 견해차가 주된 이유이다. 근래의 연구성과는 백제 불교계의 6~7세기 상황을 살펴보며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이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과(觀世音菩薩普門品)」과 「견보탑품(見寶塔品)」을 근거로 6세기 말경에 조성되었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주장되고 있으나 각 주장의 시기차이는 크다고 볼 수 없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60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성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의 불보살상 명칭과 조성의미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은 중앙에 보살상을 배치하고 보살상의 양 측면에 여래상이 배치된 특이한 형태이다. 또한 향 우측의 여래상은 왼손 위에 지물을 들고 있어 지물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불보살상 명칭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불보살상 명칭에 대한 의견은 향 좌측–중앙–향 우측의 순서로 정리하면 석가여래-관음보살-약사여래 의견이 황수영에 의해 1962년에 가장 먼저 제시되었다. 이후 불보살상 명칭은 다보여래-미륵보살-석가여래, 아미타여래-관음보살-약사여래, 미륵불-관음보살-약사불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근래의 연구성과는 중앙에 보주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봉보주보살상을 미륵보살로 보지 않고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여래상의 경우는 중앙의 보살상이 대좌의 형태로 보아 여래상과 같이 동일선상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래상의 뒤에 물러나 있는 모습인 점에 착안하여 이불병립상(二佛竝立像)으로 보고 있다. 이불병립상이나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의 경우는 『법화경』과 연관지어 도상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태안 마애불은 중앙의 관음보살상이 무진의 보살에게 받은 구슬과 영락을 석가불과 다보불에게 바쳤다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석가불·다보불이 병존하는 『법화경』 「견보탑품」을 도상적 근거로 하여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에 현존하는 불상 중 여래상과 보살상이 광배를 사이에 두고 앞·뒤에 배치된 예와 심장모양의 심엽형보주(心葉形寶珠)를 지물로는 관음보살을 중앙의 입상으로 배치하고 그 상단 불감에 여래상 두 구를 조각한 비상(碑像)이 주목된다. 전자는 대영박물관 소장 북위(北魏) 〈황흥(皇興) 5년(471)〉 관음입상이고 후자는 중국 고원(固原)박물관 소장 북위 〈건명(建明) 2년(531)〉명 비상이다. 두 상 모두 태안 마애삼존불입상보다 이른 시기의 사례이지만 건명 2년명 상은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처럼 세상이 나란히 배치된 것은 아니지만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상과 석가와 다보불이 같은 공간 속에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이 현재의 자리에 조성된 이유는 대중국 항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안반도 일대는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는 최단 항로의 출발지역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중국 사신단과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항행의 안전과 무사한 귀국을 기원하기 위해 백제인들이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을 출항지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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