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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

매금왕과 갈문왕의 사이

미상

포항 냉수리 신라비 대표 이미지

포항 냉수리 신라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신라 시기의 석비로 국보 제264호에 지정되었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와 관련된 분쟁을 처리하는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닌 비이다. 근접한 시기의 비석들과의 비교를 통해 신라의 국가 제도와 경제·사회 전반의 운영 및 발전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2 발견의 과정과 현황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1989년 3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옛 신광면) 냉수2리 밭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신광면 사무소에 비각을 세워 보관 중이다. 1991년 3월 15일에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발견자는 이 마을에 사는 이상운 씨며, 그의 조부가 이전에 발견하였다가 밭에 묻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 발견지로 알려진 밭은 본래 발견지가 아니기에 어디서 이전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석비의 성격으로 보아 신광면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4월 13일 각 일간지에 보도되면서 비석의 존재가 알려졌다.

3 비의 형태와 글자

석비는 화강암 재질의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앞면과 뒷면, 윗면에 글자를 음각한 3면비로써 고대 금석문으로서는 특이한 형식으로 글자가 새겨졌다. 글의 순서는 앞면을 먼저 쓰고, 다시 뒷면을 완성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윗면을 새기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자는 24행 231자인데,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로 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60.0㎝, 너비 70.0㎝, 두께 30.0㎝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 세우기에 편리하다.

자연석을 골라 사용하였으므로 면이 고르지 않아 새긴 글자도 줄의 간격이 맞지 않고 행마다 글자 수도 일정하지 않다.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아 전면의 가장 큰 글자는 길이와 너비가 각 5㎝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이며, 후면과 상면의 큰 글자의 경우도 5∼7㎝ 정도이다. 서체는 예서(隸書) 풍이 남아 있는 해서체(楷書體)로 보인다. 글자가 파손된 곳이나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부분은 별로 없어 판독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후면 제1행의 제7, 8자의 경우 글자가 불분명하여 판독상에 이견이 있고, 같은 후면 제6행의 제7, 8자도 판독하기 매우 힘든 글자이며 이 이외에도 판독상의 문제가 되는 글자들이 있다.

4 석비의 건립시기

이 비의 연대는 비문에 “계미년(癸未年)”이란 간지와 “내지왕(乃智王=內只王=눌지마립간)”,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마립간)”이 나와 이를 근거로 내물마립간 28년(383)설, 눌지마립간 27년(443)설, 지증마립간 4년(503)설 등이 제기되었다. 다만 비정된 연대를 문헌 기록과 비교해보면 503년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지증마립간은 500년에 64세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어 443년이면 7살의 어린 나이가 된다. 그런데, 7살의 나이에 갈문왕의 자격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전면 7행의 “전세이왕(前世二王)”은 죽은 두 왕인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을 뜻하는데, 443년 당시에는 내지왕[눌지마립간]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503년일 가능성이 크다.

계미년을 503년으로 볼 경우, 이미 500년에 즉위한 지증마립간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칭하는 문제가 있는데, 지증마립간의 즉위 과정에 관한 연구자들의 해석에 따른 논쟁이 있었다. 다만 지증마립간의 계보와 즉위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은 갈문왕의 지위로서 왕을 대신하다가 지증마립간 4년 10월에 정식으로 즉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아가 갈문왕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 함께 다양한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그중 갈문왕의 왕위계승권 유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이를 정상적인 즉위로 보기도 한다.

5 비문의 내용과 쟁점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의 “재물(財物)”에 대한 권리와 그 분쟁 및 상속을 판결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3면으로 된 비의 전·후면에는 촌민인 절거리가 국가에 의해 재물에 대한 권리와 상속을 인정받았는데, 이에 대해 촌민인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가 이의를 제기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지도로갈문왕을 비롯한 7명의 유력자는 그 소유권이 절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절거리가 죽은 뒤에는 동생의 아들인 사노에게 그 권리가 상속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외위(外位)를 받지는 못했지만, 재물에 대한 권리와 분쟁을 제기할 정도의 유력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 재물은 토지 또는 토지에 대한 수조권, 지역 특산물인 광물이나 광물에 대한 수취권, 해산물의 수취권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는 석비에는 여러 가지의 중요한 사항을 담고 있다. 먼저 지증왕이 왕이 되기 이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으며 그가 사탁부(沙啄部)였다는 점을 통해 탁부(喙部)와 사탁부(沙喙部)가 다른 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로갈문왕이 탁부 소속이 아니라 사탁부 소속이라는 사실, 왕이 소속된 탁부와 갈문왕이 소속된 사탁부가 같은 성씨라는 점도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이것을 탁부가 사탁부를 장악한 증거로 보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다음으로 신라 6부 중 습비부(習比部)에 비정될 수 있는 사피(斯彼)라는 부의 이름이 이 비에서 최초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중앙의 고위 유력자 가운데 본피부(本彼部)와 사피부 출신자의 관등과 촌주(村主)의 관등이 ‘간지(干支)’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또한, 왕이나 7인이 유력자가 내린 명령을 “교(敎)”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교는 중국에서 제후왕이 내리는 명령을 뜻한다. 비문에서 교(敎)는 3번 등장하는데, “전세 2왕”이 내린 것과 7인의 유력자가 공동으로 내린 두 번의 교가 확인된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7인의 유력자가 공동으로 내린 교이다. 바로 “차칠왕등공론교(此七王等共論敎)”라는 부분인데, 이 구절의 해석에 따라 당시 신라에서는 7명의 왕이 존재하였다고 보아 이 시기 육부에 소속된 각 부의 위상이 대등했다는 학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공론(共論)이 중요한 의사결정 수단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후면 끝부분에 등장하는 전사인 7명은 육부 출신이면서 1명을 제외하고서는 관등 표기가 없으며, 이 이후 시기의 금석문에서는 다수의 귀족관료를 열거할 때 동일한 직명을 소지하였을 경우 관등(官等)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관등의 고하(高下)가 아니라 부(部)를 중심으로 인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정치 운영에서 부가 하나의 단위 정치 집단으로 기능하고 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비석에서는 촌주와 도사(道使) 등의 지방 관직명이 나와 당시 신라의 지방통치조직의 일면을 볼 수 있게 하는데, 종래에는 도사 등 행정촌에 파견되는 지방관이 6세기 초 군주제 시행 이후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두어진 것으로 보았으나,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발견으로 신라 지방제의 기원을 훨씬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5세기 무렵부터 신라 전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처음에는 왕도와 가까운 인접 지역에만 한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6세기에 들어와 점차 전국으로 확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에서는 상면에 촌주인 유지(臾支) 간지(干支)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 2인이 일정한 공무를 마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들의 출신지는 진이마촌(珍而麻村)이라는 견해와 탐수(촌)이라는 견해로 나뉘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촌에 촌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 중 수지 일금지에 대해서는 수지와 일금지라는 2인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는데,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발견됨에 따라 수지는 인명이고 일금지는 문헌 사료에 나오지 않는 외위(外位)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진이마촌의 성격과 촌주·지방지배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우선 촌을 도사가 파견되는 곳과 촌주가 존재하는 촌으로 나누어 도사가 파견된 촌을 행정촌이자 중심촌으로, 촌주가 존재하는 곳을 자연촌으로 보았다. 여기서 촌주가 존재하는 진이마촌 같은 경우를 그냥 자연촌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행정적 성격을 지닌 촌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나아가 진이마촌 촌주를 진이마촌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도사가 파견된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는 세력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이 석비의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인 ‘재(財)’의 경우 개인의 재산 소유 및 상속에 관한 사항과 재산 분쟁 당시 이를 해결하는 절차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재를 놓고 벌어진 재지세력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그들 가운데 중앙에 좀 더 충성심을 보이는, 즉 지방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유력자에게 촌락지배권을 인정해주고 그를 매개로 지방을 직접 지배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다만 재와 관련된 소송이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사이에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절거리가 죽고 난 뒤 사노와 말추, 사신지간에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같은 혈족 간의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재지세력 간의 이권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명도 이 시기 신라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비의 마지막 부분에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는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풍속 제도의 실상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6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의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형태 및 내용상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내용상으로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과 개인의 재산 소유 및 상속 문제를 다루고 있어 고대 신라의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육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다수 새겨져 있어, 중앙제도와 지방제 등 다양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이 비는 바로 전년인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와 포항 중성리 신라비(441, 501)의 사이에 세워져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연구에 기초적인 자료이자 중요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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