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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

숨어있던 신라사의 비밀을 엿보게 한 비석

미상

포항 중성리 신라비 대표 이미지

포항 중성리 신라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신라사 연구의 커다란 변곡점이 된 비석이다. 포항 중성리에서 발견되었으며, 왕을 포함한 신라 육부가 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을 처리하는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통해 이 시기 신라의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근접한 시기의 석비들과 비교를 통해 신라의 국가 제도와 경제·사회 전반의 운영 및 발전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2 발견과 명명 과정

2009년 5월 11일 김헌도 씨가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도로 개설공사 중 한쪽에 치워져 있던 큰 돌을 집에서 사용하기 위해 옮겨 놓았다. 빗물에 씻겨지면서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주변 전문가들에게 보여주면서 고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발견품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13일에 포항시에 신고하였고, 다음 날 포항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발견 문화재로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처음에는 발견된 지역을 학성리(鶴城里)라고 인지하여 “포항 학성리비”로 알려졌으나, 정밀 측량을 통해 출토지점의 행정구역이 포항 중성리로 밝혀지면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정식 명명되었고 이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이관 조치되어 보관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신라 시대 석비로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4월 22일 국보 제318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3 비의 형태와 글자

비석은 6세기 초의 다른 신라 비석과 같이 다듬지 않은 자연 형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비의 윗부분은 가장자리를 따라 일부 결손이 있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변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대 높이 105.6cm이며 너비는 47.6~49.4cm, 두께는 13.8~14.7cm, 무게 115kg이다. 비의 형태는 상부가 약간 넓고 하부가 좁은 형태를 띠고 있다. 왼쪽 옆면은 직선의 형태이지만 오른쪽 옆면은 곡선을 그리며 아래쪽이 오목하게 되어있다.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나 일부 훼손의 흔적이 확인된다. 특히 왼쪽 상부와 오른쪽 옆면의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글자는 앞면에서만 확인되고 있으며 면을 약간 다듬은 후 새긴 것으로 보인다.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적게는 6자에서 많게는 21자까지 새겨놓았고 총 203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의 글자가 판독 가능할 정도로 보존이 양호한 상태이다. 글은 위에서 아래로 새겼는데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윗면에 맞추어 새겨 각 행 첫 글자의 높이가 제각각이며, 중간 부분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새겨놓아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비뚤어졌다. 비의 아랫면에는 약 19~22cm 정도 폭으로 글자가 없는 공간이 있는데, 아마 받침돌에 끼워 세우는 부분일 것으로 보인다.

서체는 대부분 예서(隷書)체이지만 6세기 중반 무렵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해서(楷書)의 흔적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글자 크기는 최소 2×2cm, 최대 3×5cm 정도이다.

4 건립시기는 언제인가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맨 첫 부분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나와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비의 내용상 503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기에 501년(지증왕 시기) 혹은 441년(눌지마립간 시기) 중 하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비석 발견 초기에는 첫 행의 일부 글자를 “지절로(只折盧)”로 판독하여 지증왕 시대의 비로 보아 501년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가 다수였다. 하지만 “只折盧”로 판독하였던 부분의 첫 글자가 ‘지(只)’가 아닌 ‘중(中)’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으며, 석비가 반영하는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이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와 확연한 차이가 있어 441년 건립설도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5 비문의 내용과 쟁점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글자의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판독상에 어려움이나 이견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비문에서 구사된 문장 구조가 명확하지 않고 명사·동사·주어·서술어 등의 구분이 어려워 해석과 내용 파악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체로 냉수리비나 봉평비와 내용 구성 면에서 유사할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그 세부적인 해석에서는 연구자마다 이견이 많은 편이다. 대체로 당시 이 지역에서 어떤 분쟁이 벌어졌고, 그것을 신라왕을 포함한 6부의 핵심 지배층이 함께 의논하여 그 처리를 결정하고 판결을 내렸다는 점, 그 결과 이 지역에 명령(교)을 내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정도에서 많은 연구자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분쟁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 당사자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최종판결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며, 그와 함께 비에 보이는 인명과 지명, 부명의 구분도 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한편, 비의 건립 시기도 441년 설(눌지마립간 25년)과 501년 설(지증왕 2년)로 나뉘고 있는데, 어느 시기로 보는지에 따라 비문의 해석 방향도 달라진다는 점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앞으로도 연구의 진전과 치열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는 비석이다.

여기서 비문의 구조와 해석 및 내용 전반에 대하여 세세하게 다루기는 어렵지만, 현재 학계에서 쟁점이 되는 몇몇 주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는 있다. 먼저 비문에서 확인되는 육부의 명칭과 표기법에 대해서 연구자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비문에서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모단벌(牟旦伐)”에 대해 많은 연구자가 ‘모단벌탁(牟旦伐喙)’으로 읽고 이를 신라 육부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로 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일군의 연구자들은 모단벌을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모단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분쟁의 당사자를 개인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부라는 공동체로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비석 전체에 대한 해석의 향방을 가른다. 또 “쟁인”과 관련된 구절 가운데 보이는 “금평(金平)”의 경우도 이를 부명으로 보아 한기부(漢岐部)로 이해하는 견해와 습비부(習比部)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혹은 별도의 지명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와 달리 금평(金平)을 인명으로 보고 본피부(本彼部)에 있었던 복수의 간지 중 1인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 보이는 난해한 구절들은 오히려 연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육부의 성립 시기나 성격·명칭·표기법에 관한 문제, 신라의 국가발전단계, 육부 사이의 역학관계와 존재 양태 등 여러 문제를 놓고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이 비석에 새겨진 내용이 441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501년의 것인지에 대한 이해에 따라 신라의 국가발전단계나 국가 운영 양상 등 신라 국가체제와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어 앞으로 향후 연구가 주목된다.

다음으로 이 비석을 중심으로 신라 관등 문제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관칭하는 관등은 냉수리비에 나오는 양상과 대체로 유사할 것이라고 보아왔다. 그런데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는 그간 외위(外位)로 이해되었던 일벌(壹伐)이 탁부와 사탁부를 제외한 4부의 지배층이 소지한 것으로 나타나 기왕의 시각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마련되었다. 한편, 지방의 촌에 두어졌던 간지 아래 ‘일금지(壹金知)’라는 관등이 새롭게 확인됨에 따라 냉수리비와 봉평비에 등장하는 일금지의 해석도 인명이 아닌 관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위(京位)의 성립과정과 시기 및 외위(外位)와 관계를 중심으로 신라 관등제에 대한 고찰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외위의 성립과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한편, 비석에는 비가 세워진 지역의 촌과 그곳의 수장으로 보이는 간지(干支), 일금지 등의 위호를 소유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분쟁 지역과 관련한 실무를 담당하거나 판결에 따른 처분을 받은 대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신라의 지방지배방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특히 학계에서는 현재 이 비석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신라 중고기 촌(村)과 간지(干支)의 실체와 성격에 대한 논쟁, 그리고 자연촌설과 행정촌설의 대립이 다시 부각하고 있다.

나아가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서는 ‘교(敎)’를 통해 문제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의 최고 결정권자에 대한 부분은 판독이 불분명한 상황이라 이 부분 역시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서 분쟁의 대상 혹은 당사자로 여겨지는 “일부지궁(日夫智宮)”과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의 성격과 실체 역시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궁(宮)을 재화 혹은 유력자의 집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 명확한 논거를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비석 뒷부분에 등장하는 “작민(作民)”과 관련하여서도 농장으로 보는 견해, 수조권으로 보는 입장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판결의 결과와 분쟁의 승자에 관한 문제도 현재까지 논쟁 중이다. 이 부분이 비문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금광, 주민, 식읍, 토지에 대한 권리(수조권), 궁(宮) 등을 돌려준다는 의미로 추론하기도 한다. 이는 두 개의 궁 이하의 글자를 빼앗을 탈(奪)로 석독하여 해석한 결과인데,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를 냉수리비 ‘칠왕등(七王等)’에서의 ‘등’과 동일한 이체자로 석독하여 모자 지역의 지방민이 왕경 탁부와 사탁부에 속하였다가 쟁인의 협의를 통해 다시 본래 지방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풀이하는 등 다양한 논의가 있는 상황이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석비에 글을 쓰고 새겨서 세운 무자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지막 글자의 판독과 해석이 불분명하다는 문제도 남아 있다.

6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의의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가장 오래된 신라 석비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건립 시기에 대한 비정조차 불분명하다. 또한 육부의 명칭이나 지배층에게 주어진 관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때문에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여러 쟁점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연구 향방에 따라서 신라 육부의 성립과정과 신라의 국가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역시 그에 앞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울진 봉평 신라비와의 면밀한 비교를 통하여 관찰되는 신라 사회의 변화상을 차분하게 검토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통한 신라사 연구가 앞으로 가져다줄 연구의 결과물은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한편, 국가체제의 변화상과 경제·사회의 발전 양상을 새롭게 가늠하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으나 신라사 연구를 넘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치 높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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