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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 末伊山 古墳群]

아라가야의 아름다움을 말하다

미상

함안 말이산 고분군 대표 이미지

함안 말산리 고분군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사적 제515호로 지정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도항리 고분군과 말이산 고분군을 통합·관리하다가 최근 남문외 고분까지 사적으로 통합하였다. 지정 면적은 778,820㎡로 아라가야의 최대 고분 유적이며 국내 고분 유적 중에서 고령 지산동 고분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분군이 되었다.

함안군 함안읍 말이산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약 2㎞의 능선 정상과 주변에 127기의 봉토분과 1,000여 기 이상의 중소형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안라국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 변천과 문화의 발전 단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말이산 고분군은 대형 무덤들이 능선의 정산부를 따라 조성되고 중소형 무덤은 대형 무덤이 있는 곳을 피해 능선의 경사면에 배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덤 주인의 신분을 밝혀주는 갑옷류, 말갖춤류, 환두대도(環頭大刀) 뿐만 아니라 말갑옷이 출토된 마갑총(馬甲塚), 최근 사슴모양토기와 집모양토기 등 상형토기(象形土器)도 한꺼번에 확인되는 등 다양한 아라가야인의 다양한 생활 모습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이다.

2 아라가야의 지배계층의 무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1910년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최초로 지표조사를 진행하였고, 이후 1914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봉토분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말이산 4호분(구 34호)과 25호분(구 5호)을 조사하였다. 말이산 4호분과 25호분의 조사내용은 1920년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에 실렸다. 이 조사로 함안 일대의 고분군 분포와 각 고분의 입지,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고 도항리로부터 말산리 능선에 위치한 45호분까지의 무덤에 일련번호를 부여하였다. 먼저 대형분이었던 4호분과 25호분을 발굴했지만 발굴 기간이 약 10일 정도에 불과했고 봉분 구조에 대한 조사 없이 매장 주체부였던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의 형태와 순장, 내부 출토품에 대한 간략한 수습에 그쳤다. 또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1918년에 조사한 13호(구16호)와 12호(구26호)는 도면과 유리건판 일부만 남아 있다.

말이산 고분이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가야문화권 학술조사 당시 함안 도항리 14-1·2호분이 발굴되면서부터이다. 해방 이후 최초로 정식 발굴조사였으며 이를 통해 대형 봉토분의 매장주체부 구조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한 발굴조사로 능선에 있는 대형 및 중소형 무덤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면서 아라가야 지배층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 양상을 밝혀내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에는 말이산 고분 6호분을 조사면서 가야의 대형 봉토분 축조 방법과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1990년대 이루어진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발굴조사는 함안 마갑총(馬甲塚) 발굴이다. 신라 고분의 천마총이나 금관총처럼 별칭이 붙은 마갑총은 매장주체부인 목곽 안에서 말갑옷(馬甲)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마갑총은 아라가야에서 수혈식 석곽 이전 무덤 형태가 목곽묘였음을 밝혀준 무덤이다.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무덤의 바닥에 자갈을 깔고 무덤의 중앙에 마련한 관대와 관대의 한쪽 면에 놓인 말 갑옷의 부장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늘갑옷(札甲)으로 만든 말 갑옷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사례로 5세기대 아라가야의 마장문화(馬裝文化)에 대한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함안 도항리 고분군은 말이산 1호분의 북쪽 일대에 해당하며 청동기시대 주거지부터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까지 오랜 기간 조성된 구역이다. 석곽 이전 형태인 목관묘와 목곽묘 등의 조사를 통해 부산–김해지역의 목곽묘보다 세장한 형태의 목곽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통형과 나팔 모양의 대각을 가진 굽다리접시와 그릇받침, 화로 모양 그릇받침, 미늘쇠, 철창, 큰탈, 재갈 등 다양한 출토 유물을 통해 이 지역의 특징적인 부장품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 봉토가 없는 중소형 무덤이 말이산 구릉 내에 있으며 기원후 1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무덤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수혈식 석곽 내부는 유물·피장자·순장의 공간으로 구성되며 장단비가 큰 세장한 형태임이 확인되었다. 1997년에 조사한 도항리·말산리유적(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는 ‘ㅍ’자로 결구된 판재 목곽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와 함께 다양한 무기류와 삼각판혁철단갑(삼각모양의 철판을 연결한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이후 등장한 수혈식 석곽묘는 기존의 목곽묘를 파괴하면서 들어섰다는 점에서 아라가야의 고총이 축조되는 시점을 파악하는 데에 단서를 제공한다.

도항리 6호분에서는 단벽 상단에 들보시설이 확인되었고 주피장자와 직교로 놓인 순장자의 배치구조와 투구나 말갑옷, 재갈, 발걸이, 미늘쇠, 환두대도 등 피장자의 위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6호분의 봉분을 세밀하게 조사하였고 이후에 100·101호분까지 발굴한 결과 무덤과 봉분을 어떻게 쌓아올렸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무덤을 만들 공간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봉분 하부흙을 쌓아 올린 다음 석곽을 축조하였다. 그다음 석곽의 뚜껑돌을 설치하면서 완전히 밀봉하고 그 상부를 비롯한 봉분의 윗부분까지 견고하게 흙을 쌓아 올렸다. 특히 봉분의 흙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봉분을 감싸는 흙담(周堤)을 돌리고 돌과 흙을 섞어서 석곽 상단까지 쌓아올린 후 뚜껑돌 윗부분부터 제방상으로 나누어 올리는 구획성토로 봉분의 외형을 만들어나갔다. 대형 석곽의 경우에는 벽석에 들보시설(단벽 1개씩, 장벽 2개씩)로 사용되었던 들보구멍 6개가 확인된다.

가야의 매장습속 중에는 가장 뚜렷하게 확인되는 것이 순장이다. 순장자는 피장자의 측근에 있던 인물들로 구성되며 1명에서 많게는 6명 이상도 확인된다. 말이산 고분군의 대형급 무덤에서도 순장이 확인되는데, 특히 말이산 25호분에서는 순장자의 배치 방향이 ‘직교→평행’으로 이행되는 과정이 보인다. 순장 외에도 무덤 내부를 붉은색 안료로 칠한 주칠(朱漆)의 흔적도 확인된다. 말이산 13호분의 경우는 무덤 벽석을 쌓고 점토로 마감한 후 붉은색 안료를 칠한 채색 고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혈식석곽에서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주칠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석실분이나 신라 적석분에서 주로 확인되는 현상으로 가야의 수혈식 석곽에서 보이는 주칠은 말이산 13호 사례가 유일하며, 이 밖에 가야의 왜계 석실묘로 알려진 고성 송학동 1B-1호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또 말이산 13호분의 뚜껑돌 안쪽에 별자리로 추정되는 약 125개의 성혈도 확인되어 아라가야 사람들의 천문학적 인식이나 내세관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간혹 일부 토질 등의 환경이 좋은 경우에는 인골 등의 유기물질이 남아 있어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유출해 낼 수 있다. 함안 오곡리 5호 석곽묘의 고배 안에서 물고기 뼈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말이산 고분을 비롯한 아라가야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류는 제사 음식을 담는 용도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말이산 고분의 분포를 살펴보면 남북으로 긴 능선과 좌우로 뻗어나가는 8개의 가지 능선 정상에 (초)대형급 무덤이 조성되고 주변 능선 사면에 중소형 무덤을 배치하는 양상이다. 주로 시기 차에 따라 조성한 것 같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며 수혈식석곽 단계에서는 왕의 묘역을 미리 정해두고 주변에 배장묘를 배치하여 짧은 시간에 아라가야 고총 고분을 조성함으로써 왕묘의 경관을 형성하고 그 위상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3 모방을 넘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 상형토기

어떤 형태를 본떠 만들거나 그리는 행위는 모방이다. 모방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의식적·무의식적 반복 행위이며, 이것은 어떤 개인·집단의 행위나 표현이 다른 개인·집단에 의하여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사회의 결합 관계를 강화하게 되고, 또 어린이의 학습 과정이나 사회적 유행, 혹은 전통의 계승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모방한다는 것은 사회적 결합 관계를 강화하고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실체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실체를 대신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욕망의 코드를 공유한다는 것과 그것을 통제하는 코드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함을 반영한다.

무덤 속의 화려한 잔치, 의례의 흔적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틀에 대한 해석과 연계되고, 또 권력이라는 매커니즘과 연관하여 고려해야 한다. 권력은 곧 공유라고 생각한다. 무덤 속 화려한 물건 중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류가 먼저 주목받지만 다종다양한 토기 중에서는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토기를 으뜸으로 여긴다. 일단 수많은 토기 기종 중에서 가장 희소가치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그림이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의 물건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다양한 물건이나 집, 동물의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상형토기는 주로 동물이나 집, 배, 신발 등을 본떠 만들며, 주로 무덤에서 확인되고 간혹 수혈과 같은 의례와 관련된 구덩이에서도 출토된다. 출토 사례가 적고 무덤에서도 주로 1점 정도만 확인되며 새 모양토기의 경우는 2점이 세트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주로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확인되는 상형토기가 최근 들어 함안과 마산 지역의 가야 무덤에서도 출토되었다. 함안 지역에서 출토된 상형토기로서 말이산 4호분에서 새 모양토기와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알려져 있었고, 도항리 25호분에서 출토한 7개의 등잔이 달린 등잔 모양토기, 도항리 35호에서 출토한 등잔 모양토기도 보고된 바 있다.

2019년에 말이산 45호 목곽묘를 조사하면서 사슴 모양토기, 배 모양토기, 집 모양토기가 한꺼번에 나왔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사슴 모양토기이다. 사슴인지 노루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일단 사슴의 뿔이 없고 짧은 꼬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암사슴일 가능성이 높다. 사슴 모양토기는 현재까지 유일한 사례이고 사슴이 뒤돌아보는 찰나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형태 자체도 매우 아름답다. 사슴 등에 양 갈래로 각배가 붙어있는데, 3D 스캔 결과를 보면 각배와 사슴 몸통이 뚫려 있는 채로 연결되어 있어 액체를 담아 따라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슴 몸통 아래의 대각은 함안 아라가야 고배의 특징인 불꽃 모양 굽구멍(透窓)이 나있고, 나팔상으로 부드럽게 뻗어내린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사슴은 예로부터 매우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며 흰 사슴의 경우는 왕에게 진상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무덤에서 확인되는 동물뼈 중에서 사슴 뼈는 매우 드물고 합천 옥전 M3호분에서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을 만큼 매우 진기한 자료이다.

집 모양토기도 함안 아라가야의 집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집의 형태는 고상식으로 9개의 기둥이 집을 받치고 있으며 앞쪽에 빗장이 달린 문이 있고 뒤쪽에 주구가 달려있다. 지붕은 띠를 둘러 초가지붕을 고정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각배의 끝부분처럼 생긴 굴뚝이 있는데 아마도 액체를 붓는 주입구로 보인다. 집의 표면에는 사격자문을 새겨 넣어 장식을 더했는데 이와 가장 비슷한 집 모양토기는 진해 석동 415호의 것이 있다. 그러나 45호 목곽묘 바닥을 조사하면서 집모양토기의 문과 주구가 달린 앞면 부분 조각이 추가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집 모양토기는 1쌍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닥에서 확인된 집 모양토기 편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행위(일부러 토기나 철기를 부수고 일부 편만 무덤에 넣은 행위)의 결과물일 가능성도 있다. 또 배 모양토기도 있는데 마산 현동 유적과 대구 달성 평촌 유적의 것과 비교할 수 있으며 첨저형의 준구조선 형태를 띠고 있다.

집은 영혼의 안식처로서의 역할, 배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 사슴은 영혼 불멸의 신성한 존재로서의 보호 역할, 등잔은 어두운 무덤 속을 밝히는 역할 등이 상징적으로 부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물건이나 형태를 본떠 만드는 주체 대상의 상징성은 매우 중요하다. 또 무덤 의례에 사용되는 물건의 제작과 사용, 폐기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최상위 계층의 죽음과 계승이라는 행위의 결과물에 속하기 때문에 관념적인 측면에서도 그 의미와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말이산 45호 목곽묘에서 4점의 상형토기 외에도 마갑과 안교, 종장판주와 대도 등 위세품도 함께 확인되었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의 신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머리 위를 장식하는 금동관(金銅冠)이다. 45호 출토품 중 금동장식을 보존 처리한 후 검토를 거친 결과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 보고 있는 장식으로 밝혀졌고, 그 봉황장식은 관테두리(帶輪)에 세워진 세움장식(立飾)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장식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있어 금관처럼 달개 장식 등을 추가로 매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봉황장식 금동관(鳳凰裝飾金銅冠)의 봉황처럼 마주보는 대칭적 구조와 관테에 구멍이 뚫려 있는 점 등은 삼국시대 금공품 중 최초의 사례이다. 금동관을 비롯하여 마갑과 안교, 종장판주와 대도, 상형토기까지 갖춘 말이산 45호는 5세기 초 아라가야의 최상위 계층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

4 아라가야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말이산 고분군

함안 지역에서 말이산 고분군과 비교할 수 있는 대형급 무덤으로는 남문외 고분이 있다. 말이산 고분에서 약 0.7~1㎞ 떨어진 곳의 삼봉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또 고분의 북쪽으로 전 안라왕궁지라 불리는 유적이 있다. 남문외 고분은 말이산 고분군과 근접한 대형급 무덤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남문외 11호분도 봉분 지름이 약 30m에 달하는 대형급으로 매장주체부는 횡혈식 석실분이며, 묘도부를 보호하는 목주(木主)시설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아라가야 토기와 소가야계, 대가야계, 신라계, 백제계 유물을 부장하고 있어 피장자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라가야 세력권의 고분군은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과 남문외 고분 등 대형 무덤으로 구성된 중심 고분군을 두고 칠원·마산·진동·의령 등을 아우르는 주변 중소형 고분군으로 구성된다. 대형 무덤인 거대 고총 고분이 있는 말이산 고분군을 조성한 아라가야의 지배계층은 내부를 통합하고 주변과의 대외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만의 정체성을 구축하였다. 이 시기는 대략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아라가야의 최전성기로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 분포로 보면 가장 넓은 세력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함안 지역 내 말이산 고분군 외에 중요한 유적으로는 남문외 고분군을 비롯하여 오곡리, 황사리, 장지리 유적 등의 고분 유적, 추정 왕궁지인 가야동과 그 주변에서 확인된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된 토성과 목주열, 건물지, 가야리 제방유적, 충의공원부지 유적과 같은 생활유적, 아라가야 토기 생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우거리, 묘사리 가마 유적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적들은 아라가야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다.

말이산 고분군의 조사로 최상위 계층의 수혈식석곽묘는 평균 길이 10.2m, 너비 1.8m이며 유물과 피장자, 순장자의 공간으로 분할된 구조 및 벽석 상단에 마련된 들보 시설(보공, 도리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상위 계층의 무덤이기 때문에 순장자의 신분도 일정 수준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제(南齊)의 견사 기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에서 ‘가라왕’, ‘안라왕’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의 왕에 해당하는 최상위계층의 중심묘역이 말이산 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함안 주변의 오곡리 유적, 의령 예둔리, 마산 현동 유적에서도 최상위 계층의 고분이 축조된다는 점은 아라가야의 위계와 사회문화 전반이 신라와 백제와 같은 완전한 고대국가체제까지는 아니지만 일정한 수준의 고대국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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