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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명 그릇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제례품

미상

호우명 그릇 대표 이미지

청동 호우 바닥면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호우명 그릇은 경주 노서동 140호 신라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1946년 발굴조사 당시 무덤에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 그릇이 출토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광개토왕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415년(을묘년)에 광개토왕을 기리며 만든 10번째 그릇으로, 광개왕릉비의 비문과 같은 서체이다.

광개토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400년에 5만의 병력을 내려 보내 가야와 왜를 격파하는 등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하였던 만큼, 광개토왕을 위한 제기가 이후 신라로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이 청동 그릇의 제작 연대를 중요시 여겨 그릇이 출토된 무덤(호우총)의 주인공을 내물왕의 아들이었던 복호(卜好)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같이 부장된 신라 토기의 연대로 볼 때 무덤은 청동 그릇이 제작된 지 100여 년이 지난 6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호우총의 고고학 조사 내용

호우명 청동 그릇이 부장된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일대에 위치한다. 청동 그릇의 명문으로 인해 호우총으로 명명된 노서동 140호분은 1946년 은령총과 함께 발굴된 신라의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이다. 호우총과 은령총은 1945년 해방된 후 한국인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고고학 발굴조사였다. 국립박물관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은 유적 조사 경험이 전무하였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직원이자 경주지역 신라 고분에 대한 발굴 경험이 있었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일본 패망 이후에도 국립박물관에 남아 자문을 하는 씁쓸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호우총과 은령총은 남북으로 인접하여 있었는데, 봉토는 발굴되기 오래전에 이미 삭평되어 주변보다 2m 가량 높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의 대지로 변하여 있었다. 그 위에는 2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무덤에서 나온 돌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에 자리한 호우총은 조사 결과 땅을 파고 목곽(나무덧널)을 안치한 다음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만든 신라의 적석목곽묘로 밝혀졌다.

묘광의 크기는 동서 길이 7.3m, 남북 너비 4.5m, 깊이 2m로,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두었다. 대형의 냇돌과 잔자갈을 40㎝ 두께로 깔아 바닥을 구축하고 그 위에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의 크기는 동서 길이 4.2m, 남북 너비 1.4m, 높이 1.2m 가량으로 추정되며, 붉은 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곽 내부에는 서쪽에 길이 2.4m, 너비 1m로 추정되는 목관을 안치하였으며, 목관 내부는 흑칠을 바탕으로 하고 붉은 안료(丹)로 덧칠되어 있었다. 목관의 동쪽에는 주요 부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서 원래는 나무상자에 담겨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곽과 묘광 사이는 냇돌로 채웠으며, 묘광 위로도 냇돌을 이용하여 넓게 덮었다. 묘광 위 적석부의 크기는 대략 동서 길이 9m, 남북 너비 6.4m 가량이었다. 적석부와 봉토의 높이는 이미 상부가 삭평된 관계로 확인이 불가하였다. 다만 적석부 남서쪽에서 봉분을 두르는 호석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봉분의 추정 직경은 대략 16m이다.

발굴 당시에는 호우총과 은령총 호석의 범위가 일부 겹치는 것으로 보고, 두 무덤의 봉분이 겹치는 표형분(표주박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그간의 조사 성과로 볼 때, 신라 적석목곽묘의 봉분 평면이 반드시 원형이 아닐뿐더러 두 무덤의 호석을 원형으로 복원하더라도 겹치는 부분이 미미하여 두 고분은 단순히 인접한 단독분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목곽 내에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였던 금동관과 금제 장식, 금제 세환식 귀걸이, 구슬제 목걸이, 금동제 허리띠, 금제 팔찌와 반지 등의 장신구와 백제나 가야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단룡문 환두대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피장자 착장품 외에 머리맡에는 호우명 청동 그릇만 따로 놓여 있는 채로 발견되어, 피장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관 밖 서쪽에서는 금동신발과 도깨비 얼굴장식을 한 화살통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목관 동쪽에서는 철솥과 철제 항아리, 백제계 연화문 뚜껑이 덮인 이형 청동용기, 칠기, 마구, 청동방울, 나무빗, 그리고 고배와 장경호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목관 주변에서도 각종 철기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목곽 상부의 적석부에서는 등자와 안장 등 마구류가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목곽 상부에 매납한 유물로 추정된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신라 토기의 연대로 보면 대체로 6세기 초에 해당하기 때문에, 을묘년 기년명이 있는 청동 호우는 고구려에서 제작된 후 한 참 뒤에야 신라의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보인다. 호우총은 무덤의 규모와 출토된 유물의 수준으로 볼 때, 금관이 출토되는 신라의 왕릉 다음 급으로, 그 피장자는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호우명 청동 그릇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있는 무덤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제사와 관련된 청동 그릇이 출토되었다. 이 청동 그릇은 피장자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만큼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릇의 바닥에는 ‘乙卯年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16자의 명문이 찍혀 있었는데, ‘을묘년(에 제작한)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을 기념하여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다. 광개토왕릉비문과 같은 서체인 점과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을묘년은 광개토왕의 사후 3년인 415년으로 비정된다. 즉, 광개토왕 사후에 왕을 기념하고 그의 사묘(祠廟)에서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해당 명문이 찍힌 청동 그릇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 그릇은 몸체(완)와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의 크기는 높이 9.1㎝, 직경 22.8㎝이다. 보주형 꼭지를 따로 만들어 뚜껑 중앙의 구멍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부착하였다. 꼭지 결합부 주변으로는 10엽의 연꽃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몸체의 높이는 10.3㎝, 최대경은 23.8㎝이다. 구연부에는 1조의 돌대가, 동체 중앙부와 하단부에는 3조의 돌대가 돌아간다. 바닥에는 굽이 있는데, 내부에는 4자 4행으로 구성된 16자의 명문이 찍혀 있다. 뚜껑을 가진 이러한 형태의 그릇은 보통 합(盒)이라고도 하는데, 경주 서봉총 출토 은합에 ‘합우(盒杅)’라는 명칭이 있어 참고가 된다. 고구려에서 청동 합은 중국 지안(集安)의 칠성산 96호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뚜껑에 십자형(十字形) 꼭지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중국 중원이나 삼연(三燕) 유적에서는 출토 예가 없다.

한편, 경주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로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청동 항아리를 비롯하여 황남대총 북분의 금귀걸이와 금동 신발 등이 있다. 금관총 출토 청동 항아리는 띠형 손잡이가 네 개가 달린 것으로, 몽촌토성 등에서 토기로 출토된 것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 그리고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은 왕비의 무덤인데, 고구려 양식의 3쌍의 금귀걸이와 1켤레의 금동 신발이 출토되었다. 금제 귀걸이는 굵은 고리 아래에 조롱박 모양으로 생긴 드림 장식을 매달았는데, 신라 귀걸이와는 달리 드림 장식이 너무 작아 매우 간결해 보인다. 금동 신발은 신발 바닥에 수십 개의 금동 못을 스파이크처럼 박았는데, 신라의 금동 신발 바닥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과 큰 대조를 보인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의 무덤에 고구려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 것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긴밀하였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고구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는데, 특히 400년에 광개토왕은 5만의 군사를 경주로 내려 보내 백제·가야·왜로부터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무덤에서 다수 확인되는 고구려 또는 고구려계 유물은 이러한 국제관계의 산물로, 충주에 있는 고구려비 역시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호우명 청동 그릇은 바닥에 찍힌 을묘년(415년)이라는 제작 연대로 인해 그릇이 부장된 적석목곽묘 즉 호우총의 피장자를 내물왕의 아들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다가 418년에 신라로 돌아온 복호(卜好)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라 토기의 연대를 근거로 호우총의 축조 연대를 6세기 초로 보고 있어, 청동 그릇은 고구려에서 제작된 후 약 100년 가까이 전세(傳世)된 후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과 같이 호우명 청동 그릇은 고구려와 신라 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실물 자료로 매우 의미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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