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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稼亭集]

두 나라의 관리로 살았던 14세기 고려인의 삶을 담다

1364년(공민왕 13)

가정집 대표 이미지

가정목은선생문집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가정집(稼亭集)』은 14세기 고려(高麗)의 정치가였던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의 시와 글을 모아 펴낸 문집이다. 원(元)과 고려를 오가며 관리로 활동하였던 이곡의 삶에 대한 내용은 물론, 당시의 역사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역사적·문화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문집이다.

2 가정 이곡의 생애와 가정집 편찬·전승

이곡은 14세기 고려의 역사상을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한산군(韓山郡)의 향리(鄕吏) 집안에서 태어나 고려와 원(元)에서 각각 시행된 과거 시험에 모두 급제하여 두 조정에서 관직을 받아 활동하였던 당대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팍스 몽골리아’라는 명칭이 제기될 정도로 몽골 즉 원(元)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미쳤던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이곡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그의 삶이 담긴 문집인 『가정집』을 통해 당시의 역사상에 대하여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가정집』은 현재 20권 4책으로 편찬된 목판본이 전해진다. 처음 이곡의 시와 글을 모아 문집을 펴낸 사람은 아들 이색(李穡)이었다. 1364년(공민왕 13)에 윤택(尹澤)이 초간본에 쓴 발문에 따르면 1361년(공민왕 10)에 이색이 아버지의 시와 글을 20권으로 엮고 매부 박상충(朴尙衷)에게 부탁하여 정서하고 판각하였다고 한다. 이때 간행된 초간본은 여말선초의 여러 전란을 겪으며 어느 시점에 크게 훼손 혹은 소실되었던 듯하다. 1422년(세종 4)에 유사눌(柳思訥)이 이곡의 후손들로부터 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다시 간행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적은 발문이 현재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중간본 역시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에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후손인 이보(李甫)가 문집 한 질을 구해서 판각·간행하고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보관하였는데, 이후 1635년(인조 13)에 다시 후손 이기조(李基祚)가 판각하였다. 하지만 한 번 흩어진 문집을 다시 모으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1658년(효종 9)에 후손 이태연(李泰淵)이 전질을 우연히 찾아내어 1662년(현종 3)에 전주(全州)에서 완질로 다시 판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해져 내려온 『가정집』은 1939년에 근대식 활자본으로 인쇄되었다. 이후 다시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사간본을 대본으로 하고 『목은집(牧隱集)』 및 『인재집(麟齋集)』과 함께 영인하여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 시리즈 중 하나로 펴내었다. 현재는 전질이 한글로 번역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권1 ‘잡저(雜著)’에는 9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중 특히 「죽부인전(竹夫人傳)」이 가전체 소설로 유명하다. 권2부터 권20까지는 ‘기(記)’, ‘비(碑)’, ‘서(書)’, ‘계(啓)’, ‘서(序)’, ‘표전(表箋)’, ‘소어(疏語)’, ‘청사(靑詞)’, ‘제문(祭文)’, ‘묘지명(墓誌銘)’, ‘행장(行狀)’, ‘정문(程文)’, ‘고시(古詩)’, ‘율시(律詩)’, ‘사(詞)’ 등 다양한 스타일의 시와 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 연보(年譜)와 잡록(雜錄) 몇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3 섬세한 관찰과 묘사, 다양한 생활상을 후세에 전하다

『가정집』은 14세기 고려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꼽히는 이곡의 문집이다. 따라서 『가정집』에서도 주로 고려와 원(元) 두 나라에서 관리로 활동했던 이곡이 정치가로서, 또 문인으로서 살았던 모습에 대한 부분들이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내용은 물론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여러 연구를 통해 상세하게 검토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정집』에 담긴 모든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생활상에 대하여 그가 기록하여 둔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도 당시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가령 아래 내용을 살펴보자.

조씨는 13세에 대위 한보(韓甫)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시부(媤父)인 수령궁녹사(壽寧宮錄事) 광수(光秀)는 동쪽으로 일본 원정에 나섰다가 신사년(1281, 충렬왕 7) 여름에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그리고 신묘년(1291, 충렬왕 17) 여름에는 한보가 또 합단(哈丹)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조씨는 과부가 된 뒤에 언니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딸이 출가하자 그 딸에게 의탁하였다. 그런데 그 딸이 1남 1녀를 낳고 또 일찍 죽자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내용은 「절부 조씨전」의 한 단락이다. 고려시대의 친족 관계와 가족생활에서 아버지 집안과 어머니 집안 양쪽이 모두 중요했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윗글의 주인공인 조씨는 남편이 사망한 후 언니에게 의지해 살았고, 이후 딸이 결혼하자 그 부부와 함께 지냈다. 이후 안타깝게도 딸이 먼저 사망하자, 이번에는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거주 양상은 우리가 옛 시대에 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통념, 즉 한반도의 친족 거주 형태가 지난 수천 년간 부계친족집단을 기준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는 통념을 교정할 수 있는 한 예가 된다.

이번에는 이곡이 평소에 생활했던 모습에 대해 살펴보자.

경사(京師)의 복전방(福田坊)에 가옥을 임대하였는데, 거기에 공한지(空閑地)가 있기에 이를 일구어서 자그마한 채마밭을 만들었다. 세로 2장(丈) 반, 가로는 그 3분의 1, 종횡으로 8, 9개의 고랑을 만들고는, 채소 몇 가지를 앞뒤로 때에 맞게 번갈아 심으니, 절임이 떨어져도 보충하기에 충분하였다. 첫해에는 비가 오고 볕이 나는 것이 제때에 맞았기 때문에, 아침에 떡잎이 돋고 저녁에 새잎이 나오면서 잎사귀는 윤기가 돌고 뿌리는 통통하게 살졌는데, 매일 캐어 먹어도 다하지 않았으므로 남는 것을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관리였던 이곡도 퇴근한 후에는 일상적인 생활을 해야 했다. 이곡은 자신이 빌려서 살던 집의 한 귀퉁이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어 반찬거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훌륭한 학자이자 정치가라는 근엄한 이력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소탈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문집 읽기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채소를 돌보고, 혼자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수확물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이웃에게 나눠주는 이곡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그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유명한 문인이었던 이곡에게 글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랫글은 이곡에게 글을 의뢰한 사람의 집안 형제들이 모여 일종의 기금을 만들고 이를 운용하여 집안 행사와 구휼에 사용하려 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이다.

나에게는 가까운 형제와 먼 형제를 모두 합쳐서 20여 인이 있는데, 그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낸다. 지금 각각 기금을 약간씩 출연하여 의재(義財)라고 이름짓고는, 해마다 두 명씩 교대하여 번갈아 가며 주관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달이 그 이자를 받아서 경조사와 손님맞이·전별 비용에 대비하는 한편,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장차 어려운 사람을 돕는 밑천으로 삼으려 하는데, 앞으로 자손들로 하여금 이 법을 계속 지키면서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원간섭기라 지칭되기도 하는 고려 후기의 정치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정치적 난맥 속에서 조정의 관청마저 제대로 수리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을 아래의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단락은 한림원(翰林院) 등 이른바 ‘금내(禁內) 6국’이 조정이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돌아온 뒤에도 제대로 청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소속 관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공사를 했던 사연에 대한 글의 한 부분이다.

이에 공해(公廨)의 돈을 약간 받았으나,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자 인가에서 다시 돈을 차용한 다음에 즉시 재목과 기와를 사들였다. 그리고는 관아에 인부를 청구하였으나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적으로 공장(工匠)을 고용하는 한편, 각자 집안의 하인들을 부역시키면서 각자 먹이고 각자 감독하였다.

이렇게 소소하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내용이 『가정집』 곳곳에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고려사(高麗史)』 같은 공식 역사서에서는 찾기 어려운 14세기 고려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한층 더 풍부한 점들을 찾을 수 있다.

4 고려와 원(元) 두 나라의 관리 이곡, ‘팍스 몽골리아’ 시대의 모습을 남기다

지방의 향리 집안 출신이었던 이곡은 고려의 과거와 원의 과거에 모두 급제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 조정의 관리 자격과 원 조정의 관리 자격을 각각 획득하였고, 실제로 두 나라 모두에서 관리로 활동하였다. 특히 원에서 제2갑(第二甲)이라는 높은 석차로 급제했다는 점이 그의 일생을 독특한 모습으로 빚어내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아’라고도 불리는, 우리 역사에서 ‘원간섭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가정집』에는 그가 원에서 관리 생활을 하며 보고 들었던 이야기는 물론, 원과 고려 두 나라를 오가며 정치 활동을 펼쳤던 모습에 관한 기록들, 고려 출신인 이곡에게 원의 문인들이 선사한 글 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원에서 살고 있었던 고려 사람들의 정치적·사회적 모습들, 두 나라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 양국 관리들 간의 교류상 등에 대하여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령 아래의 단락에서 우리는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 국왕위를 양위한 후 원(元)의 수도에서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를 짓도록 후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우(延祐) 정사년(1317, 충숙왕 4)에 고려 국왕 휘(諱) 모(某)가 이미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 경사(京師)의 저택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성(故城)의 창의문(彰義門) 밖에다 땅을 구입하여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3년이 지난 기미년(1319, 충숙왕 6)에 공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승려가 거처할 곳을 비롯해 재를 올리고 법회를 열 때의 도구 등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지자, 사찰의 이름을 대보은광교사라고 내걸었다. 그리고는 전당(錢塘)의 행상인(行上人)에게 명하여 천태교(天台敎)의 강석을 펴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이 다시 산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이듬해에 화엄교(華嚴敎)의 대사 징공(澄公)을 초빙하여 사찰의 일을 주지(主持)하게 하였다.

이곡은 원에서 학교를 장려하는 조서를 내리자 이를 받들고 고려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관리로 임명되어 고려에 머물며 관직 생활을 한 시기도 있었다. 그러한 이곡의 삶에 대하여 당시 원의 관리가 써서 선사한 글이 있다.

중보(中甫)는 당초에 향리에서 녹명(鹿鳴)을 부르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춘관(春官)에서 기예를 겨루고 천자의 뜰에서 책문에 응한 결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장고휘정원(掌故徽政院)으로 옮겨졌으며, 얼마 있다가 정동행승상부원외랑(征東行丞相府員外郞)에 발탁되었다. 아름다운 시대를 만나 그동안 배운 실력을 발휘하면서 시종으로 들어왔다가 번방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5 명망 높은 정치가, 그 여정 이면의 비애와 고뇌를 글로 전하다

시와 글에는 쓴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 『고려사』 같은 공식 역사서에는 담기지 못한 개인의 내면적인 고민과 생각, 감상들이 자신이 쓴 글에는 훨씬 풍부하게 담길 수 있다. 두 나라를 오가며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로 활동했던 이곡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에는 그 이면에 있었던 고뇌와 노력이 담겨 있다.

이곡이 고려와 원의 과거에 모두 급제했다는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의 삶이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흘러갔던 것은 아니다. 이곡은 1320년(충숙왕 7)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 이미 경전과 역사에 대한 소양이 깊어 주변에서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그는 복주(福州)의 사록참군(司錄叅軍)과 예문검열(藝文檢閱)을 역임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서는 권세가와 연이 닿지 않으면 관직 생활이 쉽지 않았던 듯하다. 과거 급제 동기에게 글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관직 얻기를 청했던 모습이 문집에 보인다. 그 답답한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런 상황 속에서 이곡은 원의 과거에 응시한다. 여기에 합격하여 원(元)의 관리가 되면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와 절박함이 그의 마음속에 담겨 있지 않았을까. 한 차례 실패를 쓴맛을 본 후, 1333년(충숙왕 후2)에 그는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를 이룰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두 나라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지위를 얻었지만, 먼 타향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이곡은 외로움과 고향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자주 토로하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던 이곡은 자신이 원으로 와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깝고 죄송해하였다.

황제의 도성에서 지낸 지 어언 삼 년
새봄을 만날 때마다 저절로 서글퍼져
어버이 늙으셨는데도 멀리 떠나오고
아이는 어려서 따라오지도 못하였네

객지에서 벼슬하며 어느덧 노년으로
황경에 체류하며 봄을 또 맞았네
(중략) 북당의 늙은 어머님이 더욱 뵙고 싶어라

만리 멀리 고향 산천 오래도록 소식 없어
늙고 병든 나머지 꿈속엔 언제나 어머님
옛사람 많이 양지했다는 말을 잘못 믿었나니
겨울 죽순과 얼음 잉어가 참으로 부끄러워라

위의 단락들은 몇 편의 시에서 일부만을 추린 것이다. 『가정집』에는 이 외에도 비슷한 정서를 담은 여러 편의 시들이 담겨 있다. 이렇듯 옛사람들의 문집에는 실록이나 공식적인 문서에는 담기지 못한 다양한 감정과 일상생활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 시대를 이해하려 할 때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유력 정치가들의 활동에만 주목해서는 충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문집 자료에는 풍부하게 담겨 있다. 14세기의 한 인물인 이곡이 남긴 글을 모아 펴낸 『가정집』도 이러한 측면에서 소중한 문화유산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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