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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도요지

고려의 예술혼이 깃든 땅, 강진 도요지

미상

강진 도요지 대표 이미지

강진 삼흥리 도요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강진 도요지(陶窯址)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에 광범하게 분포한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도요지란 ‘도자기를 굽던 가마의 터’라는 뜻이다. 1992년의 정밀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진군에서는 총 188개의 도요지가 확인되었으며, 도요지의 운영 시기 또한 9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고려 전시기를 포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적으로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고려청자를 논할 때 강진 도요지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핵심적 공간으로, 고려청자를 낳은 산실(産室)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강진의 역사와 도요지 운영

강진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신설된 행정구역이다. 고려시대에 강진은 도강군(道康郡)과 탐진현(耽津縣)으로 나뉘어 각각 전라도 영암군(靈岩郡)과 장흥부(長興府)에 예속되어 있었다. 태종(太宗)이 재위하던 1417년(태종 17) 도강군과 탐진현은 비로소 강진현(康津縣)으로 통합되어 탐진현의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강진 지역에 ‘대구소’와 ‘칠량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所)는 수공예품, 철, 금, 은 등의 특산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위하여 고려가 운영한 특수행정구역인데, 대구소와 칠량소는 다양한 품목 가운데 고려청자만을 전담 생산하던 곳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특산품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하여 고려시대 소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예속·관리되고 거주, 혼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신분이 천민인지 양인인지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소의 백성들이 부담하던 일들이 일반 양인층 사이에 고역(苦役)으로 취급되어 기피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즉, 소의 백성들은 신분상 양인이었을지라도 조선시대의 특수 신분층인 신량역천(身良役賤)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예술혼을 불태웠던 고려시대 장인들의 삶 이면에 이러한 어둠이 드리워졌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위대한 역작이 탄생한다는 인간사의 법칙이 고려청자의 역사에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강진군에 산재한 188개의 도요지는 대구소와 칠량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강진군 대구면의 경우 용운리에서 75개, 계율리에서 59개, 사당리에서 43개, 수동리에서 6개의 도요지가 확인되고, 칠량면 삼흥리에서는 5개의 도요지가 확인된다. 이 가운데 용운리와 삼흥리의 도요지는 고려 초기 유적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는 한반도의 중서부인 경기도·황해도와 남서부인 전라도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는데, 경기도·황해도의 도요지에서 중국 양식인 벽돌가마가 활용되었던 반면 전라도에서는 한국의 전통 양식인 진흙 가마가 사용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고려청자가 발굴된 강진 용운리와 삼흥리의 도요지 또한 진흙 가마로 확인된다.

고려중기로 넘어가면서 전국적으로 벽돌가마는 사라지고 진흙가마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벽돌가마를 쓰던 경기도·황해도의 청자 생산지들이 쇠락함에 따라 강진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전국 곳곳에 새로운 가마가 만들어졌으나 고려중기 이후 고품질의 청자는 강진 일대에서 집중 생산되었다. 물론 강진 내에서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진 내에서 청자 생산의 주도권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갔다. 강진 사당리와 계율리 도요지는 고려중기의 주요 청자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용운리 도요지에서도 고려중기까지 청자를 생산하였으나 그 명맥은 고려후기에 끊어졌고, 삼흥리 도요지는 고려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미 청자 산지로서의 입지를 잃었다. 고려후기에는 사당리, 계율리 도요지와 함께 수동리 도요지에서 고품질의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3 강진 도요지의 지리적 이점

강진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기술을 결합한 독창적이고 세련된 비색청자(翡色靑瓷)와 상감청자(象嵌靑瓷)가 생산되었다. 송(宋) 사신이었던 서긍(徐兢)이 고려를 왕래한 뒤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에 고려청자의 제작기술과 색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할 만큼 고려청자는 당대(當代) 외국인들로부터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외국 사신들이 접했던 상류층의 청자 대다수가 강진의 생산품이었다. 이처럼 강진에 유명한 도요지가 존재하고 또 그 도요지에서 훌륭한 청자들이 생산되어 명성을 떨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청자의 생산과 유통에 최적화된 지리적 이점이 강진 도요지 그리고 고려청자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강진의 지형을 보면 북쪽으로 크고 작은 산에, 남쪽으로 바다에 인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강진의 토양에는 고령토와 규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강진의 첫 번째 지리적 이점은 생산자원을 용이하게 얻을 수 있었던 자연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진에서는 도자기의 태토(胎土)와 유약의 원료인 고령토를 비롯하여 가마 운영에 필수적인 땔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점은 해상 교역망을 활용할 수 있는 독특한 지형에 있었다. 오늘날 강진은 내륙 깊숙이 침투한 남해안 해안선을 활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강진의 청자가 중앙 유력자에게 상납될 고급 특산품이었던 만큼 완성된 청자를 손상시키지 않고 운송하는 것이 중요하였는데, 내륙 깊숙이 바다의 물길이 들어오고 있었던 강진의 환경은 이러한 임무를 달성하는 데 최적이었다.

강진에서 생산한 고려청자가 해로를 통하여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2007년 발견된 태안선으로 증명되었다. 2007년 태안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용 통발에 고려청자가 걸려 나온 것을 계기로 태안 대섬 일대의 수중발굴이 이루어진 결과, 청자가 대량으로 선적된 ‘태안선’이 발견되었다. 배와 함께 화물이 통째로 침몰되었기 때문에 태안선 내의 청자들은 선적 당시 모습 그대로 크기와 모양을 맞춰 차곡차곡 쌓인 상태였고, 이를 통하여 태안선의 용도가 청자운반선이었음이 밝혀졌다. 흥미로운 것은 태안선에서 우리나라의 수중 발굴 역사상 최초로 화물의 발송처, 수취인, 수량 등을 기록한 목간(木簡)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목간에 “탐진□에서 서울에 있는 대정(隊正) 인수(仁守)의 호(戶)에 사기 80개를 보냄[耽津□在京隊正仁守戶付砂器八十]”이라는 글귀가 기재되어 있었던 점이다. 탐진은 조선시대에 강진으로 통폐합되었던 탐진현을 뜻한다. 즉, 고려시대 탐진현에서 생산된 청자가 곧바로 수도 개경으로 운송되었음을 목간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태안선 목간에서는 고려청자의 수취인으로 추정되는 개경 중앙 관리들의 이름이 다수 확인되었다.

4 고려왕조와 궤를 같이 한 강진 도요지

그 자체로 고려청자의 역사와 다름없었던 강진 도요지의 역사는 고려왕조와 함께 막을 내렸다. 강진 도요지의 쇠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왜구(倭寇)의 출몰이다. 14세기로 들어서면서 왜구는 불시에 고려 해안가에 나타나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공민왕(恭愍王) 즉위 이후 원(元)과 수차례 군사적 갈등을 겪었던 데다 설상가상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많은 전력까지 상실하였던 고려 정부는 왜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에게 민심이 집중될 만큼 고려말 백성들은 왜구의 폭력 앞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바다와 인접하여 청자 운송에 용이하였던 강진의 지리적 이점은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짐에 따라 거꾸로 큰 재앙이 되었다. 『고려사』에서는 1372년(공민왕 21) 왜구가 순천(順天)·장흥·탐진·도강군에 침입하였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왜구가 손쉽게 배를 정박할 수 있었던 해안가 일대는 해변으로부터 30~50리 사이에 연기 나는 집이나 농사짓는 사람을 찾아볼 수조차 없을 만큼 피폐해졌다. 그 여파로 훗날 강진으로 통합된 탐진현과 도강군에서는 청자 생산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도공(陶工)들이 내륙으로 흩어졌다. 설령 청자를 생산하더라도 바닷길을 활용한 운송 시스템이 파괴된 상황에서 청자들을 운송할 수도 없었다.

고급 청자의 산실이었던 강진의 쇠락은 고려청자의 쇠락으로 직결되었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청자는 그 예술적 가치를 잃어갔다. 종래의 화려한 문양은 흐트러졌고, 상감기법 등 고도의 기술은 후퇴하였다. 왜구 때문에 도자기 생산에 집중할 수 없었던 도공들의 고통이 그 당시 청자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뜸해지자 강진 삼흥리 등지에서 도자기 생산이 재개되었으나 더 이상 고려청자와 같은 고품질의 도자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전기 강진의 도요지에서 생산된 것은 분청사기 또는 하층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토기류였다. 강진에 깃들었던 고려인의 예술혼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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