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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開泰寺]

태평한 시대를 향한 태조 왕건의 꿈을 담다

미상

개태사 대표 이미지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초기에 지어진 절이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고 태평한 시대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세웠다. 이후 태조를 기리는 진전(眞殿)이 설치되어 높은 위상을 지녔다. 당시의 개태사는 지금 터만 남아 있고, 지금 볼 수 있는 개태사는 후대에 인근에 새로 세워진 절이다.

2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개태사 창건

“저는 태어나 온갖 근심을 만났고 자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군병들이 북쪽에서 얽히고, 재난이 남쪽을 어지럽게 하니 사람들은 생업에 힘을 쓸 수 없었고, 집은 온전한 담이 없었습니다. (중략) 위로는 부처님의 힘에 기대고 다음으로는 신령의 위력에 의지하여 20여 년간의 수전과 화공에서 몸은 화살과 돌을 맞았고, 천리 길을 남쪽으로 정벌하고 동쪽을 칠 때는 친히 방패와 창을 베개로 삼았습니다. (중략) 또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위엄으로 보호하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붙잡아 주시어, 바라건대 백군(百郡)에서 그리고 삼한에서 전쟁이 오래도록 길이길이 사라지고 농사와 양잠은 사방에서 항상 넉넉하여 농사가 아주 잘 되게 하시어 나라는 편안하고 지방의 사서(士庶)와 이곳저곳의 백성들은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마음을 품고 나라에는 충정의 절개를 다하게 하소서.(하략)”

위의 글은 고려 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화엄법회를 열며 직접 지어 부처께 올린 것이다. 이 글은 조선 전기에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리지」가 편찬되던 시점에도 돌에 새겨져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난 전란의 세월을 회고하며 부처의 도움에 힘입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며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고려가 길이 태평한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보살펴 달라는 기원을 간곡히 올리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원을 올렸던 왕건이 살았던 시대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통일 신라는 8세기 중반부터 여러 정치적 문제가 누적되며 점차 흔들렸다. 9세기 말이 되자 각지에서 지방 세력이 대두하며 서로 충돌하였고, 10세기가 시작될 무렵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각기 옛 고구려와 백제를 잇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라를 세워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지금의 개성(開城) 지역인 송악(松嶽)의 지방 세력이었던 왕건 집안은 궁예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휘하 장수로 많은 공을 세우고 인망을 얻은 왕건은 결국 918년(태조 1)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고, 936년(태조 19)에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 왕조는 이 뒤로 1392년(공양왕 4)까지 5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그런데 고려의 수도인 개경(開京)은 지금의 개성 지역이었다. 왜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논산 지역에 절을 지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일까? 더구나 왜 태조 왕건이 직접 법회에 참여하여 부처께 글을 올리는 극진한 의례를 시행하였던 것일까?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개태사가 창건된 곳은 당시 이름으로는 황산(黃山) 일대였다. 먼 옛날 백제의 계백(階伯)이 신라군을 상대로 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는 황산벌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가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후백제 2대 군주인 신검(神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후삼국 통일을 완료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왕건은 바로 이곳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염원을 담아 개태사를 창건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개태사는 후백제의 항복을 받은 그 해에 창건이 시작되어 940년(태조 23) 12월에 완공되었다. 이에 대하여 왕건은 위의 「개태사 화엄법회 소문」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원컨대 군대가 머물던 곳으로 절을 열 것을 허락하시어 부처님과 성인의 지지해주심에 답하고 산령의 도움을 갚고자 특별히 사국(司局)에 명하여 절을 짓게 하여 이제 원만히 이루어 보찰(寶刹)이 새롭게 만들어져 우러러 천우(天佑)를 받들고, 아래로는 신공(神功)을 입어 천하가 지극히 깨끗해지고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하게 하고자 하여 그러므로 이에 ‘천호(天護)’로 산 이름을 삼고 ‘개태(開泰)’로 절 이름을 짓고자 하옵니다.”

3 고려 시대 개태사의 위상

이렇듯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앞으로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사찰이었다. 그러니 그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쉽게도 창건 당시의 개태사가 어떤 규모였는지, 또 어떤 구조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사』에는 창건 기사의 뒤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중략) 개태사를 세울 때에는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하략)”라고 묘사되어 있다.

태조대 이후에 개태사는 어떤 위상을 지녔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지는 사료에 개태사에 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전란으로 인한 사료의 소실과 『고려사』 편찬 당시에 불교 관련 내용은 소략하게 담았던 점,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단편적인 자료들을 통해서도 고려 시대에 개태사가 중요한 위상을 지녔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개태사가 존숭된 것은 특히 태조의 영전을 모신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모습을 모신 진전은 왕조 사회에서 높은 존숭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태조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군주로 고려 시대에 숭상받았다. 이러한 태조 진전이 있었기에 개태사도 위상이 높았던 것이다. 고려 사람들이 개태사의 태조 진전을 신성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몇몇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무신집권기였던 13세기 초에 경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규보(李奎報)가 토벌군으로 참여하여 행군하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개태사의 태조 진전에 발원문을 올려 “삼가 바라건대, 신(神)의 힘을 빌어 신(臣) 등으로 하여금 반역의 무리를 섬멸하여 곧 승첩을 거두고 다시 이 나라 태평의 기반을 구축하게 하여 주시면, 반사(班師)하는 날 아무 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최자(崔滋)가 『보한집(補閑集)』을 지을 때에도 태조가 개태사를 창건한 일과 위의 발원문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14세기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오자 공민왕(恭愍王)은 개태사의 태조 진전으로 사람을 보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는 일의 길흉을 점치도록 하였고, 피난지에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할지에 대해서도 역시 이곳에서 점을 치게 하였다. 개태사는 14세기 후반에 이 일대에 침공한 왜구에게 여러 차례 노략질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그 뒤에도 여전히 태조진전으로서 크게 존숭되어,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인 1391년(공양왕 3)에도 왕이 사자를 파견하여 태조 진전에 제사를 올렸던 모습이 확인된다. 하지만 연이어 피해를 입고 고려마저 멸망하면서 개태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점차 사라졌다. 조선 세종대에는 이곳으로 연산군(連山郡)의 현청이 일시적으로 옮겨와 있기도 하였다. 세조대(世祖代)에 이곳에 승려가 머물고 있었던 모습이 나타나지만, 선조대(宣祖代)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4 개태사 터에 남은 유물과 유적

이렇게 하여 태조 왕건이 창건했던 개태사는 지금 남아있지 않고, 그 터가 남아 있다. 개태사가 오래 전부터 터만 남게 되자 그 일대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개태사의 원래 모습을 찾는 작업은 쉽지 않았으며, 유물들도 인근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 개태사 터에서 1986년부터 2016년까지 6차례 걸친 발굴·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원래 터의 건물배치와 규모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져 전체적인 가람배치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 여러 건물 터와 주춧돌, 석축, 아궁이 등이 발굴되어 옛 개태사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에 토대가 갖추어지고 있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개태’가 새겨진 명문 기와를 포함한 많은 기와 조각, 청자 파편, 소조상 파편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역사 자료 축적에 도움이 되고 있다.

우선 원래의 개태사에 있었던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자.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양식 분석을 통해 개태사가 창건되던 시기의 불상인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또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된 ‘개태사지석조(開泰寺址石槽)’는 화강암으로 만들어 물을 담아두던 도구인데, 크기가 약 가로 3m 세로 1.3m로 매우 크다. 이는 직경이 약 3m에 둘레 약 9m, 높이 약 1m에 달하는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 ‘개태사철확(開泰寺鐵鑊)’, 즉 솥과 함께 당시 개태사에 거주했던 인원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진다. 또 일부 파손되었으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개태사오층석탑(開泰寺五層石塔)’도 남아있다. 개태사에서 출토되어 ‘연산천호리비로자나석불(連山天護里毘盧遮那石佛)’로 불리며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상은 최근 광종대에 조성된 석조공양상(石造供養像)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한편, 이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국보 제213호 금동탑(金銅塔)은 고려 시대 미술품의 정수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탑은 안타깝게도 최상단부가 사라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약 1.5m에 달한다. 정교하게 당시의 석탑 양식을 반영하여 각종 장식과 문양이 새겨져 있다. 표면에는 원래 금칠이 되어 있었으나 현재에는 거의 벗겨진 상태이다. 또 13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m 가량의 대형 금고(金鼓), 즉 쇠북도 출토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태사 터의 남서쪽에는 이후 새로 세워진 현재의 개태사가 존재한다. 솥과 석조여래삼존, 석탑은 현재 이곳에 옮겨져 있다. 비로자나석불은 인근의 용화사(龍華寺)에 봉안되어 있으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유물들은 여러 박물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고려 초기의 중요 사찰인 개태사의 원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이 일대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과 정비가 진행되고 있어 향후의 성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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