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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 十層石塔]

일본에 빼앗겼다 되찾은 국보

1348년(충목왕 4)

경천사지 십층석탑 대표 이미지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국보 제86호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 十層石塔)은 1348년(충목왕 4) 경기도 개풍군 부소산(扶蘇山) 기슭 경천사(敬天寺)에 조성된 고려시대 석탑이다. 현존하는 한국의 석탑 대부분이 화강암인 것과 달리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그 가치가 높다. 층마다 다양한 불교 도상(圖像)이 조각되어 있다. 1907년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다가 1918년에 돌려받았으나, 그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에 복원되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되어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2 경천사지 십층석탑 건립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348년(충목왕 4)에 만들어진 대리석 석탑이다. 석탑이 만들어진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까닭은 석탑 1층의 상단 부분에 누가 언제 석탑을 만들었는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석탑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오랜 세월로 인해 마모되어 일부 글자가 지워졌지만, 다행히 남아 있는 글자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1348년(충목왕 4) 3월에 세워졌다. 중대광 진녕부원군(重大匡 晉寧府院君) 강융(姜融), 원사(院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가 후원자가 되어 석탑 조성에 이바지하였다. 이들은 석탑 건립을 통해 원(元)의 황제, 태자, 황후의 만세를 기원하고 불법(佛法)이 날로 흥성하여 복을 얻을 수 있기를 발원하였다. 고려에서 만들어진 석탑이 원 황실의 복을 빌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석탑이 건립되었던 14세기에 고려는 원과 정치적, 사회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인으로 원에 가서 출세하여 고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석탑의 대시주(大施主)인 강융과 고용봉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고용봉은 원에서 출세한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가리킨다. 고용보는 기자오(奇子敖)의 딸 기씨를 순제(順帝)의 후궁으로 추천하고는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자 제2황후로 책봉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고용보는 기황후의 재정을 관리하는 자정원(資政院)의 책임자인 자정원사(資政院使)가 되어 기황후와 황태자를 등에 업고 고려에서도 권력을 휘둘렀다.

강융은 관노(官奴)의 후손으로 천한 신분이었으나 충선왕(忠宣王)의 측근으로 공을 세워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다. 충선왕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 승진하여 관직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또한, 강융의 누이가 원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강융은 탈탈과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원의 탈탈 승상이 경천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진령군(晉寧君)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는 말이 세간에 전해진다고 기록하였고 실제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발간되던 시기에는 경천사에 탈탈 승상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탈탈이 석탑을 건립하고자 원의 기술자를 고려에 보냈으며, 탈탈의 인척인 강융이 실무를 주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건립 경위에 대해 또 다른 설이 전해진다. 조선 성종(成宗) 시기의 문인인 채수(蔡壽)는 개성(開成)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에서 경천사는 기황후의 원찰로 중국 사람이 바다를 건너와 탑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어찌 된 일일까?

기황후와 탈탈은 원 조정에서 정치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탈탈은 기황후의 아들인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자신의 집에서 기를 정도로 사적으로도 친밀하였으며 사재를 바쳐 태자의 축원을 비는 사찰을 세우기도 했다. 탈탈은 황제 일가의 복을 빌며 멀리 고려에 있는 경천사에도 석탑을 건립하게 되었고 기황후도 고용보를 통해 이에 깊이 관여했기에 석탑을 만든 사람이 탈탈이라는 설과 기황후라는 설이 같이 전승된 것이다.

3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수난과 복원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한동안 잊힌 듯하였으나 1907년에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갑작스레 화두로 떠올랐다. 일본인 무리가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와 탑을 해체하여 약탈해간 것이다. 개성의 지방관리와 지역 주민들이 이를 막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어 전국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일본의 궁내대신(宮內大臣)이었던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顕) 자작이었다. 1907년 1월, 그는 황태자였던 순종(純宗)의 가례(嘉禮)에 일본 측 특사로 파견되어 조선을 방문했다. 혼례가 끝나고 귀국하기 전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 고종을 알현했다. 이때 그는 갑자기 고종(高宗)에게 하사품에 감사한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당연히도 고종이 다나카에게 석탑을 하사해준 일은 없었다. 다나카가 석탑에 탐을 내자 조선 측 인사 한 명이 황제께서 기꺼이 석탑을 하사해주시리라 말했던 것이다. 다나카의 의도를 알게 된 고종은 귀한 석탑을 내줄 의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석탑 약탈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다나카는 고미술 방면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당시에는 궁내대신으로서 제실박물관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 1904년에 작성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를 통해서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건축조사보고」는 동경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関野貞)가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고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사진을 곁들여 작성한 보고서이다. 스러진 경천사 터에 남겨져 있는 석탑이 실려있음은 물론이다.

불법적으로 반출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본에 도착한 후 포장도 풀지 못한 채 십여 년 넘게 방치되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에서 석탑 약탈 사건을 수차례 보도하며 일본의 만행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인 호머 B. 헐버트(Homer B. Hulbert), 영국인 어니스트 T. 베델(Ernet T. Bethell)이 국내외 영자 신문에 석탑 반출의 부당함을 보도한 것은 석탑을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을 때 현지 신문에 경천사지 십층석탑 약탈 사건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마침내 1918년 11월 15일에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해체되고 운반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어 바로 조립되지 못한 채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석탑은 약 40년이 지난 후에야 복원되었다. 복원 사업은 국립박물관의 주도로 1959년에 시작되어 다음 해에 완료되었으며 복원된 석탑은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졌다. 1962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석탑은 오랜 수난 끝에 복원되어 대중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수리복원에 사용된 시멘트가 풍화되고 야외에 위치하여 환경오염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 특히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에 산성비에 매우 취약했다. 결국, 석탑은 1995년에 다시 해체되어 정밀 보존처리가 시행되었고,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상설전시실 1층 역사의 길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은 쾌적한 실내에서 정밀 복원된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4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구조와 도상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의 다른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원나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외래 요소와 고려 전통적인 불탑 양식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흔치 않은 재료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목조 건축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석탑의 모든 면에 불회도(佛會圖), 부처, 보살 등이 빠짐없이 조각되어 있다. 1467년(세조 13)에 만들어진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 十層石塔)의 모델이기도 하다.

석탑은 3층의 기단부 위에 10층의 탑신부와 상륜부가 건조된 형태이다. 옛 기록에서는 기단부와 탑신부를 합하여 13층 석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현재는 탑신부만 따져 10층 석탑이라고 부른다. 석탑은 구조에 따라 기단부, 탑신부의 1~3층, 탑신부 4층, 탑신부 5~10층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1~3층은 20면으로 둘러싸인 형태이다. 탑의 단면은 20면인데 사각형의 각 변에 작은 사각형이 돌출된 형태이다. 亞자형 구조라고 표현한다. 탑의 형태는 4층을 경계로 변화한다. 탑신부 4~10층까지는 4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식 석탑 양식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특징 중 하나는 석탑을 둘러싼 모든 면에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석탑은 모든 불교 존상들이 모여있는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이라 할 수 있다. 조각의 도상은 고려식과 원나라식이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조각의 예술성 또한 뛰어난데, 석탑이 무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섬세한 조각이 가능했다. 조각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서부터 기단부 1층에는 사자, 용, 연꽃이, 기단부 2층에는 당(唐)의 현장(玄奘) 법사가 구법을 위해 서역에 다녀오는 서유기(西遊記) 내용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으며, 기단부 3층에는 서유기 장면과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서유기 조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상으로 원에서 희곡으로 공연되던 현장의 취경설화(取經說話)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탑신부에는 정토 세계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1~4층에는 부처의 설법 장면을 담은 불회도(佛會圖)가, 5~10층에는 부처가 새겨져 있다. 불회도는 각 층의 사방에 하나씩 배치되어 총 16불회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 각 면 상단부에 법회 이름이 적은 현판이 새겨져 있다. 1~3층의 도상만 불회라고 보아 12불회라고 하기도 한다. 불회도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다.” 라고 기록하였고, 채수는 “더할 수 없이 정교(精巧)하여 인력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조선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세조(世祖)는 불교를 옹호하여 원각사(圓覺寺) 창건을 통하여 조선 건국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세조는 원각사 창건에 큰 의미를 부여한 만큼 원각사에 최고의 석탑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이에 가장 아름다운 석탑 모델로 경천사 십층석탑을 선택하여 탑의 재료부터 구조, 조각까지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유사한 형태를 가진 두 기의 석탑이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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