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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고려 광종이 조성한 석조대불

969년(광종 20)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표 이미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은진미륵’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체 높이 18.12m로 우리나라 최대 불상이다. 관촉사 경내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에는 사각석등과 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보살입상 앞에 석등과 석탑이 배치된 경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초의 역사와 고려시대 불교조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머리에 이중방형(二重方形)의 보개(寶蓋)라 불리는 보관(寶冠)을 착용하고 있으며 보살상임에도 여래상이 입는 대의(大衣)를 입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스스로 황제라 칭한 고려 광종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2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모습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조성연대와 건립주체가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전기 석불입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동남 30°를 향하여 18.12m의 높이로 서있는 거대한 상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이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머리에 두 겹의 네모난 모자 형태인 이중방형(二重方形)의 보개(寶蓋)를 착용하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방형보개는 면류관형 보개로 분류된다. 이는 장방형 모양의 면류관형 보개의 시원은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으로 알려져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보개는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보개보다 장식성이 강화된 형태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보관 정면에는 화불이 부착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부러진 철 조각의 흔적만 확인된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마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백호(白毫)가 있으며 이마와 보관 사이에는 반원형의 머리카락 형태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머리카락 모양은 936년 조성되어 940년 완공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본존불 옆에 있는 협시불(脅侍佛)에서도 확인된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다 먼저 조성되었으며 방형 보개를 착용한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는 보관자체가 반원의 머리카락처럼 처리되었다. 곱슬거리는 보발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귀 부분에도 보이는데 귀 한가운데를 세 가닥의 보발이 가로지르고 있다. 불상의 상호는 매우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이다. 크고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 두툼한 코와 입, 한껏 부푼 양 볼과 턱은 불상의 상호에 자비로움보다는 위엄과 권위를 더해주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길게 늘어뜨려진 귀는 어깨에 거의 닿아있다.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아 오른쪽 가슴에 붙여놓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붙여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왼편 가슴에 대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장방형의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과 더불어 보살상임에도 불구하고 여래상이 착용하는 대의(大依) 형태의 옷을 입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3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기록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기록은 ‘관촉사사적비(灌燭寺事跡碑)’에 남아 있다. 이 비는 1743년(영조 19)에 건립되었다. ‘관촉사사적비’의 기록은 조선시대 작성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특히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건립 공사를 970년(광종 21) 시작하였다는 내용과 불상의 실측치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의 애로사항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관촉사사적비’의 글자 수는 총 1,159자이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을 상고하니 고려 광종(光宗) 19년 기사년(969년)에 사제촌(沙梯村)의 여인이 반약산(盤藥山) 서북쪽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데 홀연히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려서 이윽고 나아가 보니 땅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마음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서 그 사위에게 말을 하니 사위가 곧바로 관아에 고하고 관아는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관에게 명하여 회의를 하니 아뢰기를 “이는 필시 불상을 만들라는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의원(尙醫院)에 명하여 팔도에 사신을 보내 널리 불상을 만드는 장인을 구하게 하였다. 승 혜명(慧明)이 추천에 응하고 조정은 장인 백 여 명을 골라서 경오년(970년, 광종 21)에 일을 시작하여 병오년(1006년, 목종 9)에 일을 끝마치니 무릇 37년이 걸렸다.
불상이 이미 완공된 후 도량(道場)에 모시려고 하여 마침내 천여 명이 힘을 합쳐 옮겼는데 머리 부분이 연산(連山)땅 남촌 이십 리에 도착하자 그로 인해 마을의 이름을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혜명스님이 비록 불상은 완성하였으나 세우지를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사제(沙梯)마을에 도착하자 두 명의 동자가 진흙으로 삼동불상(三同佛像)을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평지에 먼저 그 몸체를 세우고 모래흙을 쌓은 뒤 그 가운데에 다음을 세워 다시 이처럼 하니 마침내 그 마지막 부분도 세우는 것이었다. 혜명이 주의 깊게 보고는 크게 깨닫고 기뻐하였다. 돌아와서 그 규칙과 같이 하여 이에 그 불상을 세웠으니 동자는 바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현신(現身)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불상의 신장은 55척 5촌, 둘레는 30척이고 귀의 길이가 9척, 눈썹 사이가 6척이며 입의 지름은 3척 5촌, 화광(火光)이 5척이다. 관의 높이는 8척이니 큰 덮개는 넓이가 11척이고 작은 덮개는 6척 5촌이다. 작은 금불은 3척 5촌이고 연화(蓮花)의 가지는 11척인데 혹은 황금을 칠하고 혹은 붉은 구리로 장식하였다.
이에 사방에 풍문이 퍼져 만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공경히 예불하는 사람이 마치 시장과도 같았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냇물을 이름하여 시진(市津)이라 하였다. 세우기를 마친 뒤에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불상을 씻어 주었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게 서려 100일을 지속하였다.

4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평가와 조성배경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시대에 따라 불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졌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고 하나의 돌기둥 형태에 불과하며 신라의 전통이 온전히 사라진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또한 불상 조성에 있어서도 호족들이 중심이 되어 이 지역의 토속적인 민간신앙을 반영하여 조성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까지의 견해이다. 현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계획 아래 조성된 고려시대 대표적인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광종이 논산에 관촉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한 이유로는 지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 논산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배경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는 광종이 자신을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여기게 하고 미륵이 하생한 용화세계에서 정법으로 국가를 다스리고자 했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밖에 지방호족을 감시하고 호족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개경을 황도(皇都)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후백제의 옛 영토를 지방화하는 의미로 거대한 불상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탑과 불상을 세워 땅의 기운을 다스린다는 비보사탑풍수(裨補寺塔風水) 사상의 영향으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하였다는 견해이다. 즉, 후백제 지역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같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여 풍수적으로 지세를 보완하고자 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건립을 통하여 후백제 지역이 순화되고 고려의 지방통치가 원활하게 수행되기를 바라고자 한 의도가 조성배경이라는 주장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배경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당시 논산 일대에는 고려 왕실의 견제를 받을 만큼 강한 호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광종의 입장에서 집권 직후 가장 경계하였던 호족들은 진천과 청주의 호족들이다. 진천과 청주는 광종과 왕권 계승을 위해 권력투쟁을 벌였던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의 처가세력들이 웅거하고 있었던 곳이다. 혜종의 장인은 진천 임희(林曦)와 청주 김긍률(金兢律), 경주 연예(連乂) 등이 있었다. 그 중 김긍률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들 호족 세력들은 광종이 등극한 후 표면적으로 불만을 들어내지 못하였으나 언제든지 광종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었다. 광종은 집권 전반기 진천과 청주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진천과 청주의 북쪽에 평택 비파사성, 안성 봉업사, 안성 망이산성, 충주 숭선사 등을 정비하였다.

광종은 집권 전반기 옛 신하들을 대접하는 동시에 호족세력들을 견제하였다. 이와 더불어 집권 전반기 노비안검법(956년, 광종7), 과거제(958년, 광종 9) 등을 실시하여 자신의 세력을 착실히 확장해 갔다. 광종은 즉위 11년이 되는 960년에는 개경을 황도라 칭하였으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광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실시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광종의 대대적인 구신 숙청 작업은 968년(광종 19)경 오랜 숙청에 반발하는 세력이 다시 커져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광종 19년경에 벌어진 정수(正秀)에 의한 균여(均如)의 참소사건이다. 정수는 균여를 광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참소하였으나 광종은 도리어 참소한 정수를 처형하였다.(『均如傳』 卷9 感應降魔分 참조) 이러한 사실은 광종 집권 후반기에 광종이 반발세력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이해된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은 970년 조성작업을 시작하여 1006년 완공하였다. 그러나 ‘관촉사사적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만들고자 계획한 시기는 공사가 시작되기 2년 전인 968년(광종 19)이 된다. 즉, 광종은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968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광종이 논산 관촉사에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세운 조성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논산은 충남지역에서 지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나 광종이 견제하고자 하는 대호족이 웅거한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와도 거리가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장소에 많은 예산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거대한 석조대불을 조성해야 하는 이유는 인근에 위치한 논산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후백제 신검(神劍)이 항복한 바로 그 장소에 건립한 불상이다. 논산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건국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불상이며 태조 왕건의 권위가 반영되어 있는 불상이다. 태조 왕건 사후 개태사에는 태조 진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개태사는 태조 사후에도 국가적인 관심을 받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고려 광종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968년에 논산 개태사가 위치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건립하였다. 광종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보다 4~5배의 더 크게 조성하게 하였다. 광종은 전례에 없던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을 제작하도록 명하였고 그 불상의 상호와 조형미에 괴력이 넘치는 모습이 반영되게 하였다. 광종이 권위와 힘이 넘치는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게 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고려 광종 자신이 태조 왕건을 능가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거대한 불상 조성을 통해 은연중에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광종은 집권 후반기에 등장한 반발세력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고 그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조성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최대 크기의 불상이라는 점과 더불어 고려 광종 집권기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미술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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