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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

필멸의 인간, 불멸의 글귀

1241년(고종 28)

동국이상국집 대표 이미지

동국이상국집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다. 이규보는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에 관해서는 ‘이규보’ 항목이 별도로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다만 어려서부터 뛰어난 글재주가 있었으나 젊어서는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고, 무신권력자인 최충헌(崔忠獻)과 그 아들 최우(崔瑀)의 눈에 든 뒤에야 비로소 승승가도를 달렸다. 문장으로 출세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글 중 일부가 지금 『동국이상국집』으로 전해져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생생한 증언을 해주고 있다.

2 간행 경위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이 간행된 경위는 그 서문에 실려 있다. 그 부분을 발췌하여 보자.

“(전략) 평생 동안 저술한 것을 종이 한 장도 모아두지 않았다. 아들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이함(李涵)이 만 분의 일을 수습하였는데, 고부(古賦)·고율시(古律詩)·전(牋)·표(表)·비명(碑銘)·잡문(雜文)이 모두 몇 편이었다. 문집(文集)을 만들자고 청하니, 공(公)께서 그 청이 가하다 하셨다. 41권(卷)으로 나누고 호칭을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이라고 하였다. 이함이 또 청하기를, ‘문집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서문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께서 내게 명하셨다. 나는 진실로 재주가 없고 또 아들 또래로 감히 서문을 쓸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공께서 더욱 은근히 명하시니, 다만 한 두 마디 서문을 쓴다. 신축년 8월 일. 입내시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태자문학(入內侍 朝散大夫 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 太子文學) 이수(李需)가 서문을 쓰다.”

서문을 쓴 이수는 당시 최우의 총애를 받던 문신 중 하나로, 역시 글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규보와 친분도 두터워, 그가 쓴 이규보의 묘지명도 본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이규보의 문집은 아들 이함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함은 이 편찬에 대하여 뒤에 다시 아래와 같이 기록을 남겼다.

“대인께서 평생 저술하신 것이 많았다. 그러나 본래 거두어 모아두지 않으셨고, 또 다른 사람이 가져가 돌려주지 않기도 하였고, 혹은 불태워 버리기도 하셨다. (중략) 겨우 남은 것은 열 중에 두 셋이므로 편철하기가 어려웠다. 뭇 대인께서 일찍이 다니신 유가(儒家)와 석원(釋院) 및 교유하신 사대부(士大夫)들을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와 글 몇 편을 얻어 41권으로 나누어 엮어서 전집(前集)을 만들고, 시랑(侍郞) 이수(李需)가 서문을 썼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이규보의 글을 힘들게 모아 편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41권의 문집이 1241년(고종 28) 8월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뒤에 새로 많은 글이 발견되어, 같은 해 12월에 추가로 엮게 되었다.

“(전략) 모아서 만든 뒤에, 또 묻혀 있었거나 근래에 저술하신 고율시(古律詩) 847수와 잡문(雜文) 50수를 얻어 후집 12권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편찬한 것이 전집(前集), 뒤에 추가한 것이 후집(後集)이 되었다.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가 이를 서둘러 판각하도록 지원하였다고 한다.

“가을 7월. 병이 들었다. 진양공(晉陽公)이 이를 듣고 명의(名醫) 등을 보내어 끊임없이 문진(問診)하였다. 이에 공(公)의 평생의 저술인 전후 문집 뭇 53권을 가져다가 공인들을 모아 판각하게 하였는데, 일을 독촉하는 것이 매우 급하였다. 공의 눈으로 보게 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판각 작업이 끝나기 전에 이규보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판각 작업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0년 뒤인 1251년(고종 38)에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판각 작업이 벌어졌다. 문집의 발문에 따르면 국왕의 명령으로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전·후집을 모두 판각하였고, 이규보의 손자인 이익배(李益培)가 집안에서 소장한 판본으로 교감하였다고 한다.

이규보의 글은 조선 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동국이상국집』은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및 연세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곳에 몇몇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3 구성과 주요 내용

『동국이상국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전집(前集)에는 서문과 연보 밑으로 고부(古賦), 고율시(古律詩), 상량문(上樑文), 구호(口號), 송(頌), 찬(贊), 명(銘), 잠(箴), 운어(韻語), 어록(語錄), 전(傳), 설(說), 서(序), 발(跋), 논(論), 기(記), 방문(牓文), 잡저(雜著), 서(書), 장(狀), 표(表), 전(牋), 교서(敎書), 비답(批答), 조서(詔書), 마제(麻制), 관고(官誥), 비명(碑銘), 묘지(墓誌), 뇌서(誄書), 애사(哀詞), 제문(祭文), 초(醮), 소(疏), 제문(祭文) 등이 차례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 후집(後集)에는 고율시(古律詩), 찬(贊), 서(序), 기(記), 의(議), 문답(問答), 서(書), 표(表), 잡저(雜著)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어 이규보의 뇌서(誄書)와 묘지명(墓誌銘)이 첨부되어 있고, 발문(跋文)으로 끝맺었다.

본 문집에 실린 글 중에는 역사적·문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 여러 편이다. 이에 대하여 여기에서 모두 자세히 적을 수는 없다. 다만 널리 이야기되는 몇 가지만 짚도록 하겠다. 먼저 「동명왕편(東明王篇)」이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부터 고구려 건국, 동명성왕의 귀천(歸天)과 맏아들 유리의 계승까지를 약 4,000자의 긴 시로 풀어낸 걸작이다. 내용도 의미가 있지만,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책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 또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의 판각 경위를 기록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는 고려 초에 현종(顯宗)이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판각하였다고 하여, 그 대략적인 제작 시점과 제작 경위에 대한 전승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라는 글에서는 인종(仁宗) 때 편찬된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이때 주자(鑄字)로 새로 인쇄하였다고 하여,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동국이상국집』의 간행이 위의 사실들을 후세에 전하는 것에 주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의 내용은 현재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무척 높은 기록들이다. 이규보 개인에 대한 평가는 긴 스펙트럼을 보인다. 훌륭한 문장가로 극찬을 받기도 하고, 부당한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일신의 영달을 도모한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그 시기의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준다는 점에서, 『동국이상국집』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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