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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사문집[動安居士集]

출사와 은둔으로 굴곡진 삶, 불후의 문집으로 엮이다

미상

동안거사문집 대표 이미지

천은사 및 이승휴 유허지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은 13세기의 정치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문집이다. 13세기 고려의 국내외 정치상황은 물론, 고려와 원의 관계 및 당시인들의 삶에 대한 중요한 기록들을 담고 있는 역사 자료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2 동안거사집 편찬과 간행

『동안거사집』은 이승휴의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엮었다. 『동안거사집』의 분량은 비교적 소략하다. 고려 말의 큰 정치가이자 문장가였던 이색(李穡)이 지은 서문 뒤에 나오는 「잡저」에는 단지 열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행록(行錄)」 네 권은 시 위주로 편찬되었고, 그중 마지막 권4는 원(元)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다녀오며 적은 「빈왕록(賓王錄)」이다. 문집의 첫머리에서 이연종은 “가군(家君)께서 평소 저술한 사륙 잡문은 개경을 떠나 고향으로 갈 즈음에 다 흩어져 남은 것이 없었다. 만년에 지으신 몇몇 약간 편들을 엮어서 잡저 한 부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승휴는 정치적으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휴의 저술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연종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은 글을 정리하여 「잡저」 1부(部)와 「행록」 4권을 엮고 이색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이색이 이를 수락하고 서문을 적은 시점이 1359년(공민왕 8) 겨울이었다. 역시 이승휴의 저술인 『제왕운기(帝王韻紀)』가 1360년(공민왕 9)에 중간(重刊)되었으므로, 이때 『동안거사집』도 함께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동안거사집에 담긴 이승휴의 삶의 여정

옛사람들이 남긴 문집은 그들의 학문과 사상, 정치적 활동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하여 한층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동안거사집』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승휴는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嘉利縣)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자질을 보였던 듯하다. 그가 지은 「병과시(病課詩)」를 보면 9세 때 처음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12세 때부터 희종(熙宗)의 아들인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에 들어가 당대의 명유(名儒)라 불리던 신서(申諝)를 스승으로 모시고 경전을 배웠다. 그러나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 친척 어른이 길러주셨다고 한다. 이후 1252년(고종 39)에 최자(崔滋)의 문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뜻을 펼칠 기회가 열리는 듯하였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급제 소식과 함께 어머니가 계신 삼척(三陟)으로 내려가던 이승휴의 마음이 얼마나 기쁨으로 차 있었을까.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병과시」에서 이승휴는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적었다.

그다음 해에 몽골군이 길을 막았고, 이로 말미암아 개경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임시로 시골에 있었는데, 문청공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원씨께서도 돌아가셨다. 임금 계신 곳에 따라붙을 형세가 없었고, 또 동쪽 변방 역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스스로 〈집안 상황을〉 일으킬 수 없어, 두타산 기슭 구동 용계의 곁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직접 밭을 갈며 어머니를 모셨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거듭된 침입을 받고 있었다. 이승휴가 어머니를 뵈러 삼척에 내려갔을 때, 몽골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어 개경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후 자신의 좌주(座主)였던 최자와 돌봐주셨던 친척 어른인 원씨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셨고, 집안은 노략질을 당해 생계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삼척에 머무른 기간이 무려 12년이었다. 이때의 삶은 상당히 고단했던 듯하다. 위 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집안에 병이 돌아 어머니께서 위독해지시고, 심지어 집안 노비들마저 죽거나 병이 들어 이승휴가 홀로 어머니와 노비들을 밤낮으로 돌봐야 했다는 술회가 이어진다.

오랜 세월 삼척에 머물던 이승휴는 1264년(원종 5)에 급제 당시의 동지공거(同知貢擧)였던 황보기(皇甫琦)에게 글을 올려 동문원수제(同文院修製) 직을 받았다. 개경으로 올라온 이승휴는 옛 지인들에게 이런 소회를 전했다.

몇 년이나 몰락하여 강산에 기탁했던가?
다시 서울을 밟으니 꿈 속 같다.
옛 친구는 모두 대궐에 귀한 자가 되었는데,
곤궁한 자에게 누가 수레 바퀴자국 물속의 메마른 물고기 신세를 구제해줄까?

이승휴는 이후 여러 재상의 천거를 받아 본격적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우여곡절이 참 많은 벼슬살이였다. ‘삼별초의 난’을 에 휘말렸다가 겨우 탈출하기도 하고, 강직하게 간언을 올렸다가 파직되는 일도 거듭되었다. 원에 파견되는 사신단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다녀왔던 일은 고단하기는 했겠지만 뿌듯한 일이었을 것이다. 원종 대부터 충렬왕 대까지 그가 정계에서 활동하며 보였던 여러 면모에 대해서는 『동안거사집』보다는 『고려사』의 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안거사집』에 실린 글에서 우리는 『고려사』에서는 볼 수 없는 섬세한 삶의 자취들을 볼 수 있다. 가령, 고려 시대 관청의 뜰에 장미가 피어 있고, 이를 보며 술자리를 가졌던 당시인들의 모습을 어디에서 또 찾아볼 수 있을까.

사관(史館)의 뜰 가운데 장미 한 그루가 있으니 가지와 줄기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 마치 우산을 펼친 듯하다. 바야흐로 꽃이 활짝 피었는데 홍문관(弘文館)과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공들이 술을 마시고 감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아 장미연(薔薇宴)이라고 이름지었다.(하략)

한편, 『동안거사집』에 수록된 여러 시와 글에는 당시 조정의 관리들이 등장한다. 이승휴는 이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으며, 혹은 지방관으로 부임해 있으면서 그곳에 내려온 다른 관리들을 맞이하며 글을 남겼다. 예를 들면, 「안집사(安集使)인 병부시랑(兵部侍郞) 진자사(陳子俟)를 모시고 진주부(眞珠部) 서루에 올라 현판사에 차운하다(공도 이 부의 사람이다)」 라는 시의 제목에서 삼척 지역에 파견된 안집사에 관한 정보를 볼 수 있고, 「전별에 사례하는 시」에서는 홍저단(洪佇端)이라는 인물이 1265년(원종 6)에 원에 파견되는 서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문집을 통해 『고려사』를 보충할 수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이승휴는 간언을 올렸다가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외가쪽에서 전해지던 삼척 땅에 집을 짓고, 용안당(容安堂)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지내며 불경을 읽었고, 나중에 이곳을 간장사(看藏寺)로 고쳤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불교 관련 저술로 추정되는 『내전록(內典錄)』과 역사서인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동안거사집』을 통해 우리는 중요 역사서인 『제왕운기』가 집필된 장소의 풍경과 그 안에 머물렀던 이승휴의 모습에 대해 그려볼 수 있다.

시내의 서쪽 밭의 잘록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이란 구절의 글귀를 취하여 용안당이라 이름하였다. 당의 남쪽에 차가운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이 있는데, 가물어도 더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으며, 차고도 차가워서 시원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며, 손으로 움키기도 전에 몸이 이미 청량해진다.(하략)

4 빈왕록(賓王錄)에 담긴 고려-원 관계의 한 장면

『동안거사집』에서 특히 주목받는 부분은 행록의 권4에 수록된 「빈왕록」이다. 1273년(원종 14)에 원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립하고 천하에 알리자, 원종은 순안후(順安侯)를 하진사(賀進使)로 삼아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이승휴가 서장관으로 천거되어 사신단의 일원으로 원에 다녀오면서 적은 사행록이 바로 「빈왕록」이다. 「빈왕록」은 현재 전해지는 사행록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고려에서 원으로 가는 여정과 원에서 있었던 일들, 다시 원에서 고려로 돌아오는 여정까지 장장 약 네 달에 걸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1290년(충렬왕 16)에 엮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월 초에 길을 출발한 사신단은 29일에 원 동경(東京)에 도착했고, 심주(瀋州)를 거쳐 8월 4일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사신단은 황후와 황제 알현, 황제의 성절(聖節) 하례, 황태자와의 잔치 등을 치르고 9월 8일에 다시 고려로 출발하였다. 이들이 개경에 도착한 것은 10월 3일이었다. 이때 이승휴는 자신이 지나간 곳의 지리 관련 내용은 물론, 참석한 여러 의식과 보고 들은 연경의 모습에 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정하여 준 좌석의 위차는 서편 제1행은 황태자, 한 위차를 건너서는 대왕 여섯,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영전(令殿), 그 뒷 열에는 대왕 일곱, 또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후저(侯邸), 그 뒷 열에는 안·동 승상을 수석으로 한 십여 명의 관원, 여기서 두 위차를 건너서 우리 열인데, (하략)
“9층의 목탑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2리나 되었다. 우리 일행 2백여 명이 앞 다투어 올라가려고 하더니 제3층까지 올라가서는 지쳐서 더 올라가지 못하였고, 나는 상서 송빈·낭장 윤복균과 맨 위층에 올라갔는데, 멀리를 두루 바라보매 어지러움이 멈추지 않아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도성을 굽어보니 길거리에 다니는 인마가 개미떼와 같았다.”

이러한 생생한 내용은 원의 의례 절차는 물론 고려 사신단의 위상, 원 수도의 경관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정보들을 전해준다. 이승휴의 말에 따르면 「빈왕록」 역시 파직되어 삼척에 내려와 있을 때 지었다고 한다, 이때의 파직은 이승휴의 일생에서 큰 불운이었다. 그러나 이때 『제왕운기』와 「빈왕록」 등을 저술할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니, 후대에 큰 공을 남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안거사집』에는 이승휴의 꿈과 좌절, 재기, 상처 극복 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출사하여 관리로서 활동할 때, 또 은둔하여 지난 삶을 회고하고 불교에 마음을 기댈 때마다 삶에는 굴곡이 생겼다. 그가 이를 그저 기억에만 담아두지 않고 글로 옮겨 적었을 때, 그의 삶은 역사로 남게 되었다.

어떤 사안을 논쟁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바다의 풍물이나 구경하며 모든 일을 거절하고 여생을 보내었는데, 어느 날인가 할 일 없이 상자를 뒤지다가 우연히 지난날의 시·표의 초고와 도중의 일기를 얻어 읽은바, 양대에 걸친 군신 사이의 잘 만남과 일신의 부침에 대한 자취가 어제의 것처럼 완연히 떠올라서 감회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냥 버릴 수 없게 되어 한 부를 엮어서 「빈왕록」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감히 세상의 이목을 번거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애오라지 집안을 계승해 나가는 자손들에게나 보여주자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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