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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화려했던 고려의 궁궐, 서서히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다

919년(태조 2) ~ 1361년(공민왕 10)

만월대 대표 이미지

개성 만월대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 기록관

1 개요

만월대(滿月臺)는 고려의 궁궐터를 부르는 명칭이다. 현재는 편의상 그 궁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태조 대부터 국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르는 본궐(本闕)로 사용되었던 이 궁궐은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을 점령했을 때 불타버렸다. 그 뒤로는 복구되지 못하고 터로 남아있으며, 2018년 현재 남북 공동 사업으로 발굴이 추진되고 있다.

2 불타버린 옛 왕조의 궁궐,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다

‘만월대’라는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의 ‘망월대(望月臺)’에서 발음이 비슷한 ‘만월대’로 변했다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조선의 정치가였던 남효온(南孝溫)은 개성을 둘러보고 쓴 『송경록(松京錄)』에서 “옛 궁궐터에 올랐는데, 속칭 망월대라 한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송경광고(松京廣攷)』에서는 위의 기록과 중기의 또다른 견문록을 언급하면서, 세간에서 이를 만월대라고 부르는 것은 ‘망’이 ‘만’이 된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궁궐이 불타버린 이후의 고려 말기에 이미 ‘만월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니, 일단 조선 시대에 이렇게 불렸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만월대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무렵부터 문인들의 개성 유람기를 통해 나타난다. 옛 왕조인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은 이 시기 문인들의 유람지로 관심을 끌었다. 심지어 국왕의 개성 행차 때에 고려의 궁궐터를 방문하시라는 청을 개성유수(開城留守)가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월대’라는 명칭이 조정의 논의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후 많은 문인들이 만월대를 읊은 시를 지어 후대에 남겼다. 대체로 지난 왕조의 멸망을 회고하며 옛 궁궐의 터에서 우수에 찬 정서를 담은 시들이 전해진다. 가령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에 살았던 이의현(李宜顯)은 「만월대가(滿月臺歌)」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지나가는 나그네 만월대에 올라서 / 客登滿月臺
서글피 노래하며 고려를 생각하노라 / 悲歌憶前朝
번화했던 고려의 오백 년 역사 / 前朝繁華五百年
지금은 부질없이 유적만 쓸쓸하네 / 只今遺跡空蕭條
굽은 섬돌은 기운 채 시든 풀에 덮여 있고 / 曲砌欹仄衰草合
잡초에 묻혀 버린 폐허 들불에 태워졌네 / 荒墟蕪沒野火燒
예부터 흥망성쇠의 아득함 이와 같으니 / 古來興廢莽如許
지난 일 돌아가는 나무꾼에게 물을 필요 있으랴 / 往事誰能問歸樵
해 저물자 밥 짓는 수많은 집에 어둠이 깔리고 / 日暮炊煙萬家昏
옛날의 밝은 달은 시원한 밤하늘에 걸렸도다 / 舊時明月懸淸宵
시원한 밤의 밝은 달은 해마다 똑같건만 / 淸宵明月自年年
곡령의 푸른 삼나무와 소나무 이미 시들었네 / 鵠嶺杉松翠已凋
일찍이 역사책 보면서 감개한 마음 깊었으니 / 曾於靑史感慨深
고적 찾아 높이 나는 기러기를 멀리 보내노라 / 訪古目送高鴻遙

이러한 정서는 후대로 계속 이어져, 일제강점기에는 「황성옛터」라는 대중가요가 만들어졌다. 그 1절은 아래와 같다. 같은 정서가 담겨 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3 화려했던 과거, 고려 시대의 ‘만월대’

이렇듯 만월대는 우수와 회한의 상징처럼 노래되었다. 하지만 홍건적에 의해 영영 불타버리게 되기 전에는 당당하고 화려한 고려 왕조의 궁궐로 400년 넘게 수도 개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처럼 고려 시기에 이 궁궐에 어떤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만월대’로 통칭하겠다.

918년(태조 1), 후삼국의 하나였던 태봉(泰封)의 수도 철원(鐵原)에서 난이 일어났다. 『고려사(高麗史)』 등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에서는 태봉의 군주 궁예(弓裔)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휘하 장수들이 왕건(王建)을 새 왕으로 옹립하였다고 전한다. 새로 왕위에 오른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고 도읍을 자신의 고향인 송악(松嶽)으로 옮겨 궁궐 등을 지었다. 물론 그 이전에 송악의 지역 유력자였던 왕건 집안이 궁예에게 항복하면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넘겨 도읍으로 삼게 하여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았다 하니, 이것이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조 대에 세워진 궁성은 그의 아들이자 3대 국왕인 광종(光宗) 시대에 대대적으로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종은 2년 뒤인 963년(광종 14)에야 공사가 끝난 궁궐로 돌아왔다.

고려의 도읍인 개경은 오랜 기간 동안 증축을 거쳐 궁성-황성-나성의 3중 성곽 체제를 갖추었다. ‘만월대’라고 부르는 공간은 보통 이 중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와 정치 공간 등 여러 전각으로 구성된 궁성을 가리킨다. 물론 그 중에서도 더 좁은 일부 구역만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궁성 공간 전체를 만월대라 하겠다. 우선 고려 시대 만월대의 연혁을 살펴보자.

만월대는 고려 초기부터 후기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존재했지만, 여러 차례 화재를 겪으며 소실과 중건을 거쳤다. 우선 1011년(현종 2)에 터졌던 거란과의 2차 전쟁 때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거란군은 고려군의 주력을 대파하고 개경까지 점령하였다. 이 때 거란군은 태묘와 궁궐, 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처음 세워진 뒤 100년 가까이 무사했던 고려의 왕궁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국왕 현종(顯宗)은 거란과 종전 협상을 맺고 개경으로 돌아와 궁궐 재건에 나섰다. 1011년(현종 2) 10월에 시작된 공사는 1014년(현종 5) 1월에야 끝이 났다.

이 뒤로 다시 100년 이상 개경은 평온한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는 고려가 가장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시기로 평가된다. 거란과 송,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다원적인 천하 구도를 이루며 견제 속에서 교류했고, 각종 문물이 오가며 불교와 도자기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가 비색상감청자를 개발하고 초조대장경과 교장(敎藏) 등 중요한 불교적 업적을 생산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123년(인종 1)에 송 사신단의 한 사람으로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 고려를 방문했다. 그는 고려에 다녀가면서 견문록을 작성했는데, 이를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송에서 고려를 오가는 뱃길부터 그가 본 여러 건물들, 고려의 풍속, 문물, 인물 등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여기에 궁궐의 문과 전각들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적혀 있어 당시의 궁궐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다만 원래는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지금 그림 부분은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서긍은 고려 궁궐의 전반적인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의 풍습은 음식은 아끼되 거처[宮室]를 꾸미는 것은 좋아한다. 그러므로 지금 왕이 머무는 건물에 있어서도 그 구조[堂構]는 둥근 두공에 각진 정수리[圓櫨方頂]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꿩이 나는 듯이 잇단 용마루는 붉고 푸른빛으로 장식하였다. 멀리서 보면 깊은 맛이 있으며 숭산(崧山) 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다. 꾸불꾸불한 길은 울퉁불퉁한데다 고목(古木) 그늘은 서로 겹쳐 있는 것이 마치 높은 산의 사사(祠寺)와 흡사하다.” 그리고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에 대해서는 “규모도 매우 장대한데 그 터는 높이가 5길[丈] 남짓이다. 동서(東西)로 양쪽에 계단이 있으며, 난간을 붉게 옻칠한데다 구리 꽃[銅花]으로 꾸며서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니 여러 전각 가운데 최고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송의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에 익숙한 서긍의 눈에 고려의 궁궐은 부족한 점도 많았다. 그는 “나머지 건물들[屋宇]은 모두 보잘 것이 없어 이름이 실재와는 떨어져 있으니 자세히 기록할만하지 않다.”거나 “뜰[中庭]에는 벽돌[甃石]을 깔았는데 벽돌 아래는 비어있어 견고하지 못하므로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는 소감도 남겼다.

서긍이 다녀간 지 3년이 지난 뒤, 고려에서는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터졌다. 어린 국왕 인종의 후원자로 권력을 쥐고 있던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국왕측의 공격에 역습을 가하여 난을 벌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이자겸측 병력이 국왕군과 궁궐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고,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질러 국왕측을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궁궐은 다시 한 번 불에 타버렸다.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는 큰 화재였다고 한다. 다행히 인종과 그 측근들은 얼마 후 전열을 정비하여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였고, 이후 궁궐을 다시 지었다. 빠른 재건이 가능한 역량이 고려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두 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곧 복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접어들어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개경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232년(고종 19) 6월, 수도를 강화도(江華島)로 옮기어 개경이 방치된 것이다. 물론 관리를 보내 개경을 관리하도록 하기는 하였으나, 이후 약 40년 간 강화도가 수도로 기능하면서 개경은 상대적으로 관리가 잘 될 수 없었다. 몽골군에 의한 파괴도 이루어졌다.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나, 전쟁 이전의 모습과 역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후 국왕들은 다른 궁궐들을 지어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하면서 다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 궁궐은 재건되지 못하고 ‘만월대’라는 이름의 옛 궁궐터로 남게 되었다.

4 남북 협력의 상징이 된 만월대 발굴 사업과 그 성과

고려 시대 만월대, 즉 궁성의 구조와 규모, 장식 등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정보는 아직 제한적이다. 기록도 많지 않고, 아직 발굴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궐은 개경 송악산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약 39만 제곱미터 정도이다. 인공적으로 땅을 파내고 재단하여 지은 방식이 아니라 자연의 지세를 따라 축조하여,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축대를 세워 수많은 전각들이 건설되었다.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기도 했으나, 회경전, 건덕전(乾德殿), 선정전(宣政殿), 문덕전(文德殿), 장화전(長和殿), 원덕전(元德殿), 중광전(重光殿), 연영전(延英殿) 등의 이름이 기록에 전한다. 궁성의 정문인 승평문(昇平門)으로 들어와 신봉문(神鳳門), 창합문(閶闔門)을 지나면 정전인 회경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여러 갈래의 길과 문으로 구역이 나뉘어 왕족의 생활 공간, 국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정치 공간, 각종 보조 공간 등이 자리를 잡았다. 회경전과 건덕전을 각각 중심으로 하여 큰 영역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월대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일제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주로 육안으로 확인되는 건물터와 계단 등을 통해 회경전과 그 주변 영역에 대한 파악에 그쳤다. 그 뒤 1973년~1974년에는 북한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본격적으로 만월대 발굴 사업이 추진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였다. 2007년에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주체가 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등이 공동으로 만월대 발굴에 나섰다. 남북관계의 상황 변화에 따라 중간에 단절된 시기가 있었으나, 201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공동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2013년에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체 구역 중 극히 일부만 진행된 상태이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평창과 서울에서 ‘만월대 공동발굴 특별 전시전’이 개최되었으며, 2018년 9월부터 다시 공동 발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동안의 발굴을 통해 고려 궁궐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한층 진전되고 있으며, 금속활자를 발견하는 성과가 나오기도 하였다. 고려의 궁궐인 만월대 발굴 사업은 남북 협력의 상징이자 중요한 성과물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향후 이를 통하여 고려 궁궐 만월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14세기 중반에 불타버려 수백 년 동안 회한과 우수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만월대는 이제 화합과 희망의 표상으로 다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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