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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집[牧隱集]

동방 문학의 정수(精髓)와 인간사의 고락(苦樂)을 담다

1404년(태종 4)

목은집 대표 이미지

목은집

e뮤지엄(소수박물관)

1 개요

『목은집(牧隱集)』은 ‘동방(東方)의 대유(大儒)’로 평가받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집이다. 이색의 사후 3남 이종선(李鍾善)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다. 시고(詩藁) 35권과 문고(文藁) 20권으로 구성되어 고려시대 문집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2 목은 이색의 삶과 활동

이색은 1328년(충숙왕 15)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과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 김씨(金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이곡은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원 제과(制科)에서 차석을 차지한 당대의 명유(名儒)이다. 이색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학문을 접하여 1341년(충혜왕 후2) 14세의 어린 나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1348년(충목왕 4)에는 원에 입국하여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1353년(공민왕 2) 고려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 제과에 급제함으로써 고려와 원 양국에서 출중한 역량을 인정받았다.

공인된 인재였던 이색은 젊은 시절 탄탄대로를 걸었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안의 사위가 되어 든든한 뒷배를 얻었고, 젊고 개혁적인 군주 공민왕(恭愍王)에게 중용되어 고려말 정치와 학문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여말선초 이색에게 ‘유종(儒宗)’, ‘동방의 대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유학자, 동시에 문장가였다. 하지만 원명교체기 중국 패권의 변화, 그에 따라 격변하는 고려 정계의 한가운데에서 이색의 삶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할 만큼 뒤틀리게 된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전후로 이색은 이성계(李成桂) 세력과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우왕(禑王)의 요동 정벌을 저지하지 않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을 추대하는 세력에게 동조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색이 종래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였던 것도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색과 그의 측근들은 창왕~공양왕(恭讓王) 시기에 걸쳐 이성계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창왕의 폐위와 함께 이색은 유배지를 전전하기 시작하였고, 1390년(공양왕 2)에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난에 연루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조선 건국 후 가까스로 유배 생활을 끝낸 이색은 새로운 왕조에서의 출사를 거부하고 유유자적하다가 1396년(태조 5)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목은집』의 간행 경위와 판본 현황

『목은집』은 이색의 죽음으로부터 8년이 지난 1404년(태종 4) 3남 이종선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다. 이색의 사후 바로 편집에 들어갔으나 고려말 최고 문장가 이색의 시문이 워낙 방대하였기 때문에 첫 간행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색의 측근이었던 권근(權近), 하륜(河崙)과 같은 인물들이 조선 건국 이후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그의 즉위에 기여하였던 상황 또한 현창 사업의 일환인 문집 간행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권근은 1404년 7월 『목은집』의 서문을 찬술하며 “우리 동방에 문학이 있은 이래 선생보다 성대하였던 자는 없었다”고 칭송한 인물이기도 하다.

『목은집』의 초간본은 완질로 전해지지 않는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책 두 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는 부록을 제외하고도 55권에 달하였던 『목은집』의 전체 규모에 비하여 극히 적은 분량이다. 현전하는 판본은 1626년(인조 4)에 이색의 10대손 이덕수(李德洙)가 재간행한 것이다. 첫 간행으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재간행되었기 때문에 내용과 구성에서 차이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의도적 변형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목은집』을 처음 간행하던 해에 이첨(李詹)이 찬술한 서문을 비롯하여 이색의 시문 다수가 1478년(성종 9)에 만들어진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동문선』을 토대로 『목은집』 초간본의 복원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4 목은집의 체제를 둘러싼 이견들

현재 학계에서는 『목은집』 초간본의 전체 규모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70권에 달하였던 『목은집』이 어떠한 이유로 축소되어 55권만 현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발단은 『동문선』에 수록된 이첨의 「목은선생문집서(牧隱先生文集序)」에 이색의 시문이 70권 있다고 서술되었던 데 있다. 조선 후기 재간행된 『목은집』에서 해당 구절의 70권은 55권으로 수정되었다.

문제의 구절을 두고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왕조 외압설을 제기하였다. 고려말에 조선 건국세력과 이색의 정치적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그의 사상과 행적이 담긴 문집을 조선에서 검열하였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실제 1411년(태종 11) 이색과 이성계의 행적에 대한 문장 표현을 둘러싸고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당시 명의 관리가 이색의 비문을 지어 조선에 보냈는데, 비문에 “권세를 휘두르는 자[用事者]”, “이색을 꺼리는 자[忌公者]”와 같은 부정적 표현이 보이자 다수의 조정 신료들이 이성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간주하여 연루자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한 것이다. 신료들은 권근의 이색행장과 하륜의 이색신도비문을 명의 관리가 저본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태종 또한 이들의 주장에 일부 동조하였다. 이에 외압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권근·하륜의 행장 및 신도비문이 이색의 문집에 수록되었을 것이므로 위의 사건을 전후하여 『목은집』에 대한 대대적 검열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한편, 조선중기 야사인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1417년(태종 17) 태종이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참서(讖書)들을 없애며 『목은집』의 제15권도 바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15라는 숫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외압설 주장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1417년에 『목은집』이 70권에서 55권으로 축소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외압설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조선후기 이첨의 서문이 수정된 연유에 대하여 저마다 다른 이해를 보인다. 일각에서는 본래 55권 분량의 『목은집』이 있었는데 1404년 이색의 아들이 유고(遺稿)를 추가 수집하여 70권으로 간행하였다고 추정한다. 다른 일각에서는 『목은집』이 처음부터 끝까지 55권이었다고 역설한다. 후자의 입장에 선 연구자들은 외압설에서 내세우는 주된 근거에 대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선 “이색을 꺼리는 자”와 같이 태종 시기 문제가 되었던 구절들이 대체로 『목은집』에 남아있는 것을 볼 때에 1411년의 사건을 계기로 15권에 달하는 분량이 축소되었다고 보는 데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동각잡기』의 “제15권”이라는 서술도 15권의 분량으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1417년에 이색이 찬술하였던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를 회수하라는 태종의 명령이 내려졌는데, 『목은집』 가운데에서도 『목은문고』 제15권에 「이자춘신도비」가 포함되었으므로 『동각잡기』에서 언급한 “제15권”은 『목은문고』 제15권 한 권만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욱이 1417년의 일은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던 왕실 계보와 이성계 부친 이자춘의 신도비에 서술된 계보가 달라 발생한 해프닝일 뿐 이색 관련 기록에 대한 고의적 조작과는 무관하다.

5 『목은집』이 전하는 인간 이색

『목은집』에는 ‘동방의 대유’, ‘유종’이라는 칭송과 함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서 거짓을 꾸며 명성만 낚는 자”라는 비난도 들었던 이색의 파란만장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목은집』 가운데 『목은시고』에는 이색이 지은 수많은 시가 시간순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색이 정치적으로 실각한 1389년(공양왕 즉위) 이후의 시는 유배 및 은거 생활의 고단함에서 비롯된 외로움·쓸쓸함·허무함의 정서가 주를 이룬다.

백년해로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니
늙어서 먼 길 보내는 그 심정이 어떠하랴
머리 위의 하늘을 피해 도망칠 수 없으니
후일에 다시 모여 함께 살 수나 있을는지

장단음(長湍吟)으로 묶여있는 위의 시는 1389년 12월 장단(長湍)으로 유배를 떠났던 이색이 이듬해 4월 다시 함창(咸昌)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직전 착잡한 소회를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껏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고려 유신(儒臣)들의 수장이자 전무후무한 고려 최고의 문장가로서 정치적·사회적 명망을 이어갔던 이색이 과연 63세의 나이에 유배지를 전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시는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한순간 뒤바뀌어버린 얄궂은 운명을 이색이 어떠한 심정으로 받아들였을지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특히 남편이 다시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부인에 대하여 이색이 느꼈을 안쓰러움과 미안함, 부인과 다시 살아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등의 복잡한 심정을 이색의 짧은 시 속에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적현에서도 이 몸이 자유스럽지 못했으니
하늘 끝 귀양살이 그 시름이 또 어떻겠소
편할 대로 떠나게끔 잘 좀 주선해 주신다면
백만년 더 사시도록 응당 축수를 올리리다

마음은 풍진 밖에 노닐고 있건마는
육신은 아직도 오랏줄에 묶여 있네
묻노라 어떤 이가 나의 뜻을 이뤄 줄꼬
충심으로 날 위해 꾀해 줄 이 누구일까
우로의 은혜에 젖어 볼 길이 없어
강산을 그저 왔다갔다 반복하기만
송헌은 기꺼이 이 몸을 돌봐 주리니
끝내 길이 막혀 통곡하지는 않으리라

마찬가지로 이색이 장단에서 남긴 위의 두 시는 힘겨운 유배 생활을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 쓰는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이색은 송헌(松軒), 즉 이성계에게 수차례 시를 보내어 사면을 청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편의대로 장소를 택하여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면 이성계를 위하여 축수를 올리겠다는 구절, 이성계는 기꺼이 자신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구절을 노골적으로 배치한 데에서 이색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시에서는 함창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은 뒤 이성계와의 옛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에 대한 혐의를 벗고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였던 이색의 처세술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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