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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집[補閑集]

파한집을 보충한 고려 후기의 본격적인 시화집

미상

보한집 대표 이미지

보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보한집(補閑集)』은 고려 후기인 13세기 중반에 편찬된 책이다. 문신이었던 최자(崔滋)가 역대의 시와 문장, 민담 등을 모아 펴내었다. 『파한집(破閑集)』보다 좀 더 본격적으로 시와 문장에 대한 비평을 가미한 시화집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2 최자의 정치적 활동과 『보한집』 편찬 동기

최자는 1188년(명종 18)에 태어나 1260년(원종 1)에 사망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관리로 진출하였다.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조정의 대신이었던 이규보(李奎報)가 최자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면서 무신 집정인 최우(崔瑀)의 눈에 들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중용되었다.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와 글짓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글을 모은 문집에 대해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가집(家集)』 10권’이라 하였고, 『동인지문오칠(東人之文五七)』에는 ‘『최상국집(崔相國集)』 8권’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최자가 편찬한 『보한집』은 『고려사』와 『동문선(東文選)』에는 『파한집』의 속편이라는 뜻의 『속파한집(續破閑集)』이라고 적혀 있다. 책의 성격이 약 반세기 전에 편찬된 『파한집』을 보완·개정하는 면이 강했으므로 붙였던 이름이다. 다만 중국 국가도서관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 판본으로 추정되는 『보한집』에는 고려 후기의 인물 이장용(李藏用)이 쓴 발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최자가 ‘보한집’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다. 최자 본인이 두 가지 이름을 다소 혼용하였거나, 어느 시점에 수정을 하였던 듯하다. 간행 이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최자의 『보한집』 편찬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우선 최자는 서문에서 편찬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본조(本朝)는 인문(人文)으로 교화하고 성공하였으므로, 뛰어난 인재가 간혹 나와서 풍화(風化)를 칭찬하고 드러냈다. (중략) 그런데 고금의 여러 명현이 문집을 편찬한 것은 오직 몇십 가(家)에 그쳐서 나머지 좋은 문장이나 빼어난 시구들이 모두 없어져 알려지지 않았다. 학사 이인로가 간략히 모아서 책을 만들고서 『파한(破閑)』이라 명명하였는데, 진양공(晋陽公, 최우)이 그 책이 자세하지 않다고 여겨 나에게 계속해서 보완하게 하였다. 없어지고 잊혀진 것들을 억지로 수습하여 근체(近體) 약간 연을 얻었다. 때로는 심지어 승려, 아이, 여인들의 한 두 가지 일이라도 담소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그 시가 비록 훌륭하지 않아도 함께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측면이 학계에서 주목된다. 문학적 측면을 바라볼 때에는 역대 명현들의 문장과 시구를 널리 모았다는 점이 조명되며, 역사적으로는 무신집정이었던 최우가 『파한집』으로는 부족하니 새로 보완하도록 지시했다는 점이 중시된다. 후자의 경우는 서문 말미에서 ‘아직 조판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시중 상주국(侍中 上柱國) 최공(崔公, 최항)께서 선조의 뜻을 잇고자 그 책을 찾기에 조심스럽게 잘 베껴 써서 올렸다.’라고 한 점, 그리고 이장용의 발문에서 ‘〈청하공이〉 나에게 명하여 이 뜻을 적게 하고 공을 불러서 각판한다.’라고 한 점과 연결되어, 무신집정 최우와 최항(崔沆)이 편찬을 후원하였던 점과 연결시켜 보게 된다.

이 점에 주목한 연구들은 이인로의 삶이나 『파한집』의 내용이 무신집권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최씨정권이 탐탁치 않게 여겼고,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최자에게 새로 『보한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본다. 최씨정권이 문사들을 적극 후원하고 활용하여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고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결과 『보한집』에는 몽골과의 전쟁에 시달렸던 당시 백성들의 어려운 삶에 대한 내용이 없고, 오히려 무신집정을 칭송하는 글들이 들어가 있음을 지목한다. 가령 최자는 주석을 통해 ‘처음 진양공(晉陽公, 최우)이 기이한 책략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임금의 수레를 받들어 서쪽 목해(木海)에 위치한 화산(花山)에 도읍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실제로 『보한집』에 『파한집』보다 훨씬 다양한 작가들의 많은 작품이 수록된 점도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두 배 정도로 내용이 풍부해졌으니, 그 가치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파한집』이 편찬되고 40년가량 흐르면서, 그 사이에 새로 등장한 많은 문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 시기의 작품들과 새로 대두한 문학관을 반영하였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고 인정되고 있다.

3 『보한집』의 구성과 간행

『보한집』은 상·중·하 세 권을 묶어 한 책으로 만들어졌다. 권별로 명확하게 성격을 나누어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인 특성은 나타난다. 상권에서는 고려 초기 이래의 임금과 명신들의 일화와 관련 시를 소개한 것이 많다. 특히 과거제의 시행 및 과거 급제자들의 일화 등 과거제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중권부터 하권의 중반 정도까지는 본격적으로 당대 문인을 중심으로 시문을 소개하고 평가하였다. 또한 승려들의 시를 여러 편 다루며 비평을 한 점이 특색이다. 시와 글에 대한 최자의 비평을 풍부하게 볼 수 있어서 문학적 측면에서 특히 중시되는 부분이다. 하권의 후반부는 문인과 승려들, 기생들의 시 및 일화 등을 주로 담았다. 이 마지막 부분은 앞부분과는 여러모로 성격이 달라 흥미롭다. 앞부분의 내용이 주로 근엄한 관리와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뒷부분은 기이한 야담에 가까운 성격의 글들이 있다. 이에 대해 최자도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지금 이 책은, 감히 문장(文章)으로서 나라의 위엄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나라[盛朝]의 남은 사적을 찬술하고 기록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찮은 재주[雕篆]가 남아서, 우스운 이야기[笑語]의 재료로 편집하였다. 그러므로 책의 마지막 편에, 음란하고 기괴한 일을 몇 단락을 수록하여, 괴롭게 공부하는 신진(新進)들이 놀거나 쉬는데 도와주려고 한다. 멋대로 엮은 것이나 그 중에 교훈이 될 만한 본보기[鑑戒]가 몇 글자 있을 것이니 보고자 하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최자는 『보한집』에 역대의 손꼽히는 시문과 이들에 대한 비평을 제공하고, 다양한 문체의 글과 설화까지 포함하여 후대에 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몽골과의 전쟁에 시달리던 무신집권기의 현실과 정치에 대한 비판적 요소가 빠져 있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되나, 『보한집』이 지닌 문학적 역사적 의의는 분명히 존중할 만하다. 특히 당시의 풍속과 윤관(尹瓘)의 9성 축조, 송에 간 고려 사신의 활동, 승려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적으며 ‘전(傳)을 찬술하여 승사(僧史, 『해동고승전』)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자 한다.’고 한 것은 이 책이 단순히 문학비평서가 아니라 역사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한집』의 제작과 간행 이력은 어떠했을까. 우선 앞에서 소개한 서문들과 발문을 통해 이 책이 최우가 살아있었던 시기에 작업을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우가 1249년(고종 36)에 사망하였으니, 적어도 이보다는 이른 시기에 최자가 작업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서문에 적혀 있듯이 최항이 보기를 요구하여 필사본을 올린 것이 1254년(고종 41)이었다. 이장용은 발문에서 1255년(고종 42)에 이를 목판에 새겼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에는 최우 사후에 일어난 일에 관한 글이 포함되어 있어, 필사본과 목판본의 제작 사이에 내용이 추가·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되었다. 현재 이 고려 시대의 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로 내려와 15세기 말 성종대(成宗代)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이극돈(李克墩)이 『파한집』과 『보한집』 등을 간행하고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17세기 중반 효종대(孝宗代)에 경주에서 두 책이 다시 한번 판각되었고, 이때의 판본이 지금 규장각 등에 전해지고 있다. 중국 국가도서관에서 발견된 판본은 성종대에 제작된 책판으로 인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4 『보한집』에 나타난 고려 시대의 모습들

끝으로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려 시대의 생활상 중 몇 가지를 찾아보자. 우선 2월 보름의 등석(燈夕), 즉 연등회(燃燈會)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부분을 볼 수 있다.

매년 2월 보름을 등석(燈夕)이라 한다. 하루 전날 〈임금께서〉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조상과 성인의 진영(眞影)에 예를 올렸는데, 이를 봉은행향(奉恩行香)이라 한다. 구도(舊都)의 아홉 거리[九街]는 넓고 평탄하였으니, 흰 모래가 평평하게 깔려 있고, 큰 내가 넘실넘실 두 회랑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이날 저녁이 되면 모든 관리가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비단산을 맺고, 여러 군부(軍府)도 비단[繒綵]으로 낙(絡)을 엮어서 거리마다 끊어지지 않게 연결시키고, 그림 액자·글씨 병풍을 좌우로 펼쳤다. 악기를 다투어 연주하였고, 온 나뭇가지의 등불이 하늘에 맞닿아 대낮 같았다.
임금의 행차가 돌아갈 적엔 양부(兩部)의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들이 무지개 치마를 입고 화관(花冠)을 쓰고 악기를 든 채 승평문(昇平門) 밖에서 임금의 수레를 영접하며 환궁악(還宮樂)을 연주하였다. 〈임금의 수레가〉 흥례문(興禮門)과 이빈문(利賓門) 사이를 들어가니, 궁전은 어두컴컴하고, 별들은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음악 소리 우렁찬 것이 하늘에 있는 듯하였다.

고려에서 연등회는 국가적인 행사로 매우 중시되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이를 통해 행사의 흥겨운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 『보한집』에는 봄과 가을에 대장경(大藏經)을 읊고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 때 조정의 문한관들이 시를 지었다는 점도 기록되어 있다.

해마다 봄가을로 대장경(大藏經)을 전경(轉經)하고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여는데, 모두 고원(誥院)의 사신(詞臣)들에게 명령하여 사운(四韻)의 음찬시(音讚詩)를 짓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상인이 고려에 와 상점을 열고 있었던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단편적인 자료이지만 국제 민간 교역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승(右丞) 김돈시(金敦時)가 어렸을 때 한 승려를 따라 당상관(唐商館)에 갔다. 어떤 상인이 아내와 사이가 나빠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중략) 상인이 이 시를 보고 감탄하여 심지어 눈물을 흘렸고, 끝내 아내를 떠나지 않았다.

또한, 무신정변 이후 폐위되고 비참하게 살해된 국왕 의종(毅宗)의 진영(眞影)에 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의종이 남쪽으로 피하여 있을 때에 이기(李琪)라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의종의 진영(眞影)을 그렸지만 제목을 달지 않은 채, 동도(東都) 초당(草堂)이라고 불리는 곳에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를 드리고 섬겼다.

이 외에도 곳곳에 고려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최자의 『보한집』은 고려 후기의 문학적 성취와 비평론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는 전해지지 않는 당시의 역사상을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의 보물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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