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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碧瀾渡]

서해와 개경을 이어주던 고려의 항구

미상

벽란도 대표 이미지

벽란도의 위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벽란도(碧瀾渡)는 서해에서 예성강(禮成江)을 통해 개경(開京)으로 통하는 교통로에 존재했던 항구 혹은 나루터를 지칭한다. 개경 인근의 대표적인 나루터 중 하나였다. 특히 고려 시대에 외교 사절단의 왕래 등에 중요하게 이용되었다.

2 벽란도와 고려도경(高麗圖經) 속의 벽란정(碧瀾亭)

벽란도의 위치는 현재의 북한 개성시 개풍군 신서리로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벽란도 나루, 벽란도 마을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기록들에서도 벽란도의 위치에 대하여 찾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는 개성 서쪽으로 선의문(宣義門)에서 30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개성부 서쪽 36리에 있다고 하였다.

벽란도는 고려 시대의 해상 교통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곳이다. 특히 고려 시대의 국제 교역과 외교 사절단 왕래를 설명하면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는 12세기에 고려에 다녀간 송(宋)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영향이 크다. 1123년(인종 1)에 고려에 왔던 서긍은 자신이 보고 들은 고려의 문물제도와 풍경을 그림과 글로 엮어 『고려도경』을 편찬하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그림 부분은 사라지고 글만 전해진다. 이 책에는 ‘벽란도’라는 명칭의 유래로 추정되는 벽란정이 등장한다. 먼저 이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자.

서해 뱃길을 통해 고려로 왔던 송 사절단은 예성항에 도착한 뒤에 우선 벽란정에 송 황제의 조서(詔書), 즉 외교 문서를 보관하고 잠시 쉬었다. 사절단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고려에서 준비한 군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맞이하며 벽란정으로 서긍 일행을 안내하였다고 한다. 벽란정은 왼쪽과 오른쪽 두 채의 건물로 나뉘어 있어서, 한 쪽에 조서를 봉안하고 다른 한 쪽에서 사절단을 접대하였다. 그 주변에는 10여 채의 민가가 있었고 30리 너머에 있는 개경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다.

당시 사절단을 영접하는 고려의 의장 행렬뿐만 아니라 이들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일대가 가득하여, 서긍은 그 수가 만 명 정도나 되는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사절단 일행은 벽란정에서 쉰 뒤에 다음날 육로로 개경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개경 서쪽 교외를 지나 선의문을 통해 개경으로 들어갔다.

5년 뒤인 1128년(인종 6) 6월에 도착한 송의 사절단도 개경으로 오기 전에 먼저 벽란정에 머물렀던 모습이 보인다.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벽란정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당시 고려에서 송의 사신단을 맞이하는 항구에 설치한 중요한 영접 시설로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태조대(太祖代)에 후당(後唐)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배에 싣고 왔을 때에도 예성강을 통해 개경으로 왔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문종대(文宗代)에도 송의 사신단이 예성강으로 왔던 기록이 남아있다. 벽란정이 설치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외국 특히 중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마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성강에 배를 끌고 오갔던 송의 상인들도 아마 벽란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예성항과 벽란정의 모습은 당시의 풍경을 상상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3 벽란도에 얽힌 옛 사람들의 이야기

벽란도의 ‘도(渡)’는 나루터를 뜻한다. ‘벽란도’라는 명칭이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고려도경』 보다 좀 더 뒤 시기의 일이다. 가령 1277년(충렬왕 3)에 김방경(金方慶)을 장사(將士)들이 벽란도에서 맞이하였다는 표현이 보이며, 1281년(충렬왕 7)에 고려에 유배되었던 원(元)의 황자(皇子) 애아적(愛牙赤, 아야치)을 벽란도에서 전송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고려 말인 14세기 중반부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몇 차례 더 등장한다. 물론 이것이 벽란도라는 명칭이 이 시점부터 쓰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벽란도라는 명칭이 먼저 쓰였고 이를 따서 벽란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사료에 남아있는 기록은 과거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언제 붙었든, 혹은 언제 변했든, 이 나루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는 점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벽란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하여 사료들을 살펴보자.

예성강 흐름 중에서 벽란도 앞을 흘렀던 부분을 벽란강(碧瀾江)이라고 불렀던 듯하다. 무신집권기의 권력자 중 한 명이었던 이의민(李義旼)의 아들인 이지영(李至榮)이 벽란강의 보달원(普達院)을 원찰(願刹)로 삼고 강에 다리를 놓으려 백성들을 수탈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곳에서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려 계획한 최충헌(崔忠獻)이 보낸 수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충혜왕(忠惠王)~공민왕(恭愍王) 시대의 정치가였던 유숙(柳淑)은 이곳에 대하여 “오랫동안 강호(江湖)의 언약을 저버리고, 속세에서 20년을 보냈네. 갈매기가 나를 비웃으려는 듯 끼룩끼룩 울며 누각 가까이 오네”라고 시를 지었다. 아마도 오랜 벼슬 생활에 지친 때의 한탄을 담았던 듯하다.

고려 말이 되면 벽란도의 제반 시설들은 크게 쇠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말선초의 정치가인 권근(權近)은 이곳에 세워진 식파정(息波亭)의 기문(記文)을 지으며 “강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에는 초루(草樓)가 있었으니, 나루터 일을 맡은 관원이 거처하는 곳이었다.”라고 하였다. 송의 사절단을 맞이하던 두 채의 벽란정은 아마도 이전 어느 시점에 파괴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권근은 이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나루터를 지나다녔고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조선 개국 직전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서 돌아오다가 벽란도에서 머물려고 하였는데,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신들과 대립하던 정몽주(鄭夢周) 등이 해칠까 두려워 극력 청하여 길을 계속 간 일화도 전해진다.

푸를 벽에 물결 란. 푸른 물결의 나루터라는 이름을 가진 벽란도. 나루터를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뜻을 품고 이곳을 건넜을 것이다. 위에 나온 사람들은 벽란도 앞의 푸른 강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역사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이곳에 담겨 있었을까.

이제는 벽란도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에 속한 곳이라 가볼 날도 요원한 듯하다. 하지만 훗날 그 강가에 서게 되면, 그곳을 오갔던 수많은 옛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번화했던 옛 시절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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