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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 시대 역사의 모습을 담은 가장 오래된 역사서

1145년(인종 23)

삼국사기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국왕 인종(仁宗)의 명으로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관찬(官撰) 역사서이다. 실물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역사를 모아 정리하였다.

2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문』에 나타난 편찬 동기와 당시의 시대상

『삼국사기』가 편찬된 사실은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즉 1145년(인종 23) 12월에 “김부식이 찬술한 『삼국사(三國史)』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에 인종은 김부식의 집으로 사자를 보내 치하하고 화주(花酒)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부식은 71세의 고령으로, 정치력과 문장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 대신이었다. 김부식은 이때 왜 삼국의 역사를 편찬한다는 큰 사업을 벌였던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지은 「삼국사기를 올리는 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인종이 어떠한 동기와 목표를 가지고 편찬을 지시했는지에 대해 인종의 말을 인용해 두었다.

“오늘날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에는 오경(五經)이나 제자(諸子)의 서적과 진(秦)·한(漢)의 역대 역사에 대해서는 간혹 두루 통달하여 상세히 말하는 자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게다가 생각하건대, 신라씨·고구려씨·백제씨는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통하였다. 그런 까닭에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으나, 국내의 일은 상세하지만, 국외의 일은 간략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고 하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에 빠진 것이 있다. 이런 까닭에 군후(君后)의 선악과 신자(臣子)의 충사(忠邪), 국가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삼장(三長)의 인재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서 만세에 물려주어 일성(日星)과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즉, 인종은 당시의 최고 엘리트들조차 경전이나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땅의 지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다. 인종은 중국에 전해지는 기록은 소략하며 고려에 전해지는 기록도 부실하고 거칠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인종은 ‘현재’에 부합하는 새롭고 유용한 역사서를 편찬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던 것이다.

인종은 즉위 이래로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여진(女眞)의 금이 새로운 강자로 대두하여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였고, 고려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정치 세력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이와 결부되어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이 벌어졌다. 인종은 지난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수집 정리하여, 여기에서 정치에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대에 최고 수준의 학식과 문장력을 지녔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했던 원로 대신 김부식에게 편찬을 맡겼다.

3 편찬 과정과 구성의 특징

물론 이런 거대한 사업을 김부식이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삼국사기』의 끝부분에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의 명단이 정리되어 있다. 김부식은 편수(編修)를 맡았고, 관구(管句)로 정습명(鄭襲明), 동관구(同管句)로 김충효(金忠孝), 참고(叅考)로 김영온(金永溫)·최우보(崔祐甫)·이황중(李黃中)·박동주(朴東柱)·서안정(徐安貞)·허홍재(許洪材)·이온문(李溫文)·최산보(崔山甫)가 참여하였다. 이들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대체로 과거에 급제한 비교적 젊은 문신들이 실무에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본기(本紀), 표(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인 것이다. 본기는 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국가별로 시기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제후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世家)’가 아니라 천자의 역사를 다루는 ‘본기’라는 항목명을 택한 것이 주목받는 점이다. 이어 세 권의 연표를 두고, 그 뒤로 제사·음악·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를 다룬 잡지(雜志)가 수록되었다. 다시 지리지(地理志)가 신라 세 권, 고구려와 백제를 합쳐 한 권 집필되었다. 그리고 직관지(職官志)가 세 권 이어져 있다. 그 뒤로는 김유신을 비롯한 삼국의 인물들에 대하여 열전이 열 권 들어가 있으며, 후삼국시대의 주역인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렇게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찬자의 논찬(論贊)이 들어가 있다. 신라에 대한 서술 분량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분량보다 많다는 점이 특징 중 하나이다. 그 이유로는 당시 전해지고 있던 자료가 신라에 대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하며, 김부식이 옛 신라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신라 위주로 편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 가지 상기할 점은, 이 책의 편찬 연대와 대상 연대 간의 시간적 괴리이다. 삼국의 건국을 기원 전후로 넓게 잡더라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7세기 중후반이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10세기 전반이었다. 『삼국사기』는 12세기 중반에 편찬이 되었다. 편찬자들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1천년 이상 과거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하여 200여 년 전에 후삼국이 통일되던 시점까지의 방대하고 먼 옛날의 역사를 집필해야 했다. 21세기인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역사를 써야 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남겨진 사료 내지 이전 시기의 역사서가 충분하지 않았을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김부식 등은 과연 어떤 자료를 토대로 『삼국사기』를 집필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우선 『삼국지(三國志)』부터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중국 측의 자료를 이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고려에 전해지고 있었던 삼국의 자료와 역사서들이 활용되었던 정황도 파악된다. 특히 『구삼국사(舊三國史)』로 통칭되는 역사서가 고려 전기에 편찬되어 있었고, 이를 참조하여 『삼국사기』를 집필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자료나 책들의 원본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없으며, 본문에 해당 사료의 전거가 밝혀져 있지도 않아서 정확한 판단은 쉽지 않다. 또한 김부식과 편찬자들이 나름의 기준에 따라 사료를 고치거나 표현을 바꾼 부분들이 많아 여러 논란이 빚어지기도 한다. 사료 간의 충돌, 사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과도하게 수명이 길게 기록된 특정인의 사례,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상충하는 경우 등 이 책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게 하는 요소들도 있다. 『삼국사기』에 반영된 역사의식이 사대주의적·유교주의적 한계가 크다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삼국사기』가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삼국의 역사에 대해 더욱 소략한 내용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국사기』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또한 각국의 본기는 해당 국가의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원칙을 견지한 것도 특징적인 면이다. 이에 따라 가령 하나의 전투에 대한 기록도 양측의 본기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4 현재 전해지는 판본과 문화재 지정 상황

고려 중기에 처음 간행되었던 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보물 제722호로 지정된 ‘성암본(誠庵本)’은 고려 후기인 13세기 후반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는 국내에 권44부터 권50까지를 담은 한 책만이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조선 시대에도 다시 판각되었다. 발문(跋文)을 통해 조선 태조(太祖) 대에 한 번 판각되었음이 확인되고, 이후 중종(中宗) 대에도 다시 판각되었다. 국보 322-1호와 322-2호는 위의 고려 시대·조선 시대 판각본들이 섞여 있는데, 완질본이며 상태도 양호하여 중요한 자료이다. 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된 판본은 1711년에 숙종(肅宗)이 아들 연잉군(延礽君), 즉 훗날의 영조에게 내려준 내사기(內賜記)가 있으며, 현종실록을 인쇄한 동활자로 간행했다. 이 외에도 몇 차례 더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사료에 보이나, 전해지는 유물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이외에 일본에도 몇몇 판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부분적으로만 확인될 뿐 전체적인 면모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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