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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집[西河集]

불운했던 문인의 글, 벗의 덕에 세상에 남다

1222년(고종 9)

서하집 대표 이미지

서하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서하집(西河集)』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의 문인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시와 글을 모은 문집이다. 임춘이 세상을 떠난 후 벗이었던 이인로(李仁老)가 엮어 만들었으며, 이후 목판본으로 인쇄되었다.

2 무신집권기 임춘의 불우했던 삶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북방의 강자로 고려와 전쟁을 거듭했던 거란과의 관계가 11세기 전반에 안정되었고, 11세기 중후반에는 송과 교류도 재개되었다. 절대적인 강자가 지배하는 일원적 체제가 아니라 여러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며 경쟁했던 다원적 국제 관계가 형성되며 활발한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려 내부의 체제가 정비되고 문화적인 역량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부적으로 부와 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불균형이 심화되었고, 결국 집권층 중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있었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바로 12세기 후반 1170년(의종 24)에 터진 무신정변(武臣政變)이다. 이로부터 100년 동안 이른바 ‘무신집권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국왕과 문신들은 실권에서 밀려나 무신집권자에게 눌려 있었다. 더구나 수많은 문신들이 정변 초기에 무신들에 의해 살육당하였다. 권력을 쥔 무신집권자들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국정을 농단하였다. 사회적으로 ‘문치(文治)’라는 지향점이 외면되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노력을 기울여 학문을 익히고 글을 배운다고 해도 문신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포부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춘이 활동했던 시기는 바로 이러한 암울한 시대였다.

임춘이 언제 태어나 언제 사망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서하집』의 내용과 관련 인물들의 생몰년으로 보아, 임춘은 대체로 의종대에 태어나 30~40세 무렵에 사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인로 열전에 임춘에 관한 기록이 짧게 덧붙여져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자(字)는 기지(耆之)이며 서하(西河) 사람이었다. 글재주가 천하에 떨쳤으나 정작 과거 시험에는 연거푸 낙방하였고, 어렵게 살다가 일찍 죽었다고 묘사되었다. 무신정변 당시에 그의 집안이 화를 크게 입었고, 임춘은 겨우 몸을 피해 살아남았다고 하였다.

임춘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후대의 자료가 많다. 이 중 서로 엇갈리는 전승도 있어 명확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임춘은 자신의 백부와 숙부, 아버지가 모두 글에 뛰어났다는 말을 남겼다. 이인로는 『서하집』의 서문에서 임춘이 ‘가숙(家叔)’인 종비(宗庇)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문장가였던 임종비(林宗庇)로 비정된다. 임종비의 형제는 당시 한림원에(翰林院)에 오른 문한관(文翰官)이었다.

이러한 묘사는 과장이 아니었다. 태어난 환경으로 보면 임춘도 관리 집안의 자제로 글을 익혀 가업에 따라 과거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활동한다는 삶의 여정을 밟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임춘은 개경에서 글공부를 하며 학문을 익혔다. 임춘의 부친은 음서로 아들을 관직에 진출시키려 하였던 듯하나, 본인이 이를 원하지 않고 과거 급제자가 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나 급제는 쉽지 않아 거듭 낙방을 하였다. 그리고 무신정변이 터졌다. 정변 이후의 세상은 그동안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매우 달랐다.

무신정변이 터진 뒤에도 임춘은 5년 동안 개경에 머물러 살았다. 온 집안이 화를 입었지만 겨우 살아남아 힘겹게 버텼으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무신정변에 이어 ‘김보당(金甫當)의 난’까지 터지며 문신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해지자 어쩔 수 없었던 듯하다. 당시의 삶에 대해 임춘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저는 난리를 만나 앞으로 밟히고 뒤로 넘어지며 숨어 지내며 남에게 몸을 던져 구원을 바란 것이 여러 번이었지만, 모두 저를 개돼지처럼 대하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에 산 것이 모두 5년이었으나 굶주림과 추위는 더욱 심해졌고 가까운 친척들도 문에 들여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지방을 떠돌았지만, 타향에서의 삶도 쉽지 않았다. 상주(尙州)에 머물 때 그는 관의 구휼을 받고 서기(書記)에게 감사하는 글을 올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침에 저녁거리를 계획하지 못하고, 구차하고 빈한하여 동리 사람들이 속으로 웃으며 서로 멸시하고 친구들도 모두 등지고 절교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또한 운명이라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 어찌 장자(長者)의 인(仁)을 베푸시와 굽어 천한 동문(同門)을 기억하실 줄을 바라겠습니까.

결국 임춘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집도 타버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전토(田土)도 남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살길이 막막했던 임춘은 절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무신정변 이후에도 임춘은 과거에 응시를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곤궁한 생활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실의한 임춘은 은거 생활에 들어갔고, 얼마 뒤 장단(長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 이인로 등 문인과의 교유, 그리고 『서하집』의 탄생

임춘은 평생 뜻을 펴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비록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지만 임춘의 글재주에 대해서는 당대 사람들이 널리 인정하고 있었다. 당대의 저명한 문인이었던 이규보는 과거에 낙방하여 상심한 임춘에게 글을 보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슬퍼 말게. 사람들이 내년에는 장원하리라 말하니.’라고 위로를 전하였다.

다행히 그는 동시대의 문인들과 교제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무신집권기에도 많은 문인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관직에 올라 문신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마음껏 뜻을 펴기는 어려운 시대였다. 많은 문인들은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서로 모여 글을 지으며 모임을 가지는 데에서 삶의 낙을 찾았다.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렸던 모임이 대표적이다. 임춘도 이인로, 오세재(吳世才),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沆),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와 함께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이들에 대해 당시 세상에서는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을 맺는다는 의미의〉 금란(金蘭)이 되기를 약속하였다. 꽃 피는 아침이나 달이 밝은 저녁때에는 항상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세상에서는 〈그들의 모임을〉 죽림고회(竹林高會)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현실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으나, 이들과 어울리며 글을 짓고 품평하는 시간은 임춘에게 삶의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담지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아래의 글이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금 중추(中秋)를 하루 앞두고 이담지 군이 내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오늘 저녁을 이용하여 술을 걸러서 밝은 달에게 권하고, 다시 우리 집안의 고사(故事)를 닦기로 했는데 그대는 제남(濟南)의 후손이 아닌가. 어찌 그 정을 잊을 수 있는가.’ 하므로 나는 흔연히 달려가서 그와 함께 높은 누에 올라 술상을 나누고 시가(詩歌)를 읊조려 회포를 풀며, 간혹 농담도 하며 인간의 일이라곤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밤 오경(五更)에 이르러 파했다.

임춘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작품들은 세간에 널리 퍼져 전해졌다. 하지만 책으로 편찬되지 못하면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은 자명하였다. 죽림고회의 일원으로 임춘과 친분이 깊었던 이인로는 자신이 지은 『파한집(破閑集)』에서도 여러 차례 임춘의 글을 인용하며 칭찬할 만큼 임춘의 글을 아꼈다. 아직 전해지는 임춘의 시와 글을 모아 여섯 권으로 만들고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서하집』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이인로는 서문에서 이를 목판에 새겨 후세에 전하려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전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인로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222년(고종 9)에 무신집정이었던 최우(崔瑀)가 후원하여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판본은 현재 확인되는 것이 없고, 다만 이인영(李仁榮)이 평양 청분실(淸芬室)에 소장했던 책의 목록으로 작성한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에 4권과 5권이 수록된 한 책이 실려 있다.

고려 시대에 간행된 이 판본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어느 시점에 더이상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설화적인 내용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다시 발견된 것은 1656년(효종 7)의 일이었다고 한다. 운문사(雲門寺)의 승려 인담(印淡)이 꿈에서 한 도사를 만나 근처를 파면 보물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곳을 파보니 동탑이 나왔는데 그 안에서 『서하집』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하구(李夏耈)라는 사람에게 전해져 보관되어 있었고, 이를 본 신유한(申維翰)이 1712년(숙종 38)에 임춘의 후손인 임재무(林再茂)에게 알렸다. 선조 임춘의 뛰어난 글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동문선』에 수록된 몇 편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워하고 있던 임재무는 이 소식을 듣고 책을 빌려와 이듬해에 다시 간행하였다. 또한 1865년(고종 2)에도 다시 한번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권1부터 권3까지에는 고율시(古律詩), 권4에는 서간(書簡), 권5에는 서(序)와 기(記), 권6에는 계장(啓狀)과 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모두 시 144수와 글 54편이 담겨 있다. 권5의 말미에 실린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은 현존하는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임춘은 비록 평생을 불우하게 살며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와 글은 800년가량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져 당시인들의 삶과 생각을 전해주는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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