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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櫟翁稗說]

겸손하게 풀어낸 고려의 대서사

1342년(충혜왕 후3)

역옹패설 대표 이미지

역옹패설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간섭기 고려의 대표적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1342년(충혜왕 후3)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하며 저술한 책이다. 총 4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붓 가는대로 기록하였다”는 저자의 서문대로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하였으나 그 내용은 왕실의 세계(世系)에서부터 세간의 기이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담았다. 이제현이 생존하던 1363년(공민왕 12) 3남 이창로(李彰路)와 장손 이보림(李寶林)에 의하여 경주에서 처음 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려시대 간본(刊本)은 전해지지 않는다. 1432년(세종 14) 세종(世宗)의 명령으로 원주의 목판본을 인출한 책이 현전하며 보물 제1893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1814년(순조 14) 이제현의 후손들이 『익재난고(益齋亂藁)』와 함께 간행한 판본이 남아 있다.

2 유력 정치가에서 ‘역옹’이 되기까지

이제현은 1287년(충렬왕 13) 문정공(文定公) 이진(李瑱)과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박씨(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장력과 학문적 역량을 갖추었던 그는 15세가 되던 해인 1301년(충렬왕 27)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연이어 권영(權永, 훗날 權溥로 개명)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제현은 9봉군(封君)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세를 보유하던 권영의 사위가 되어 젊은 시절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제현은 명실공히 원 간섭기 고려의 학문과 정치를 선도하는 인물이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머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원과 고려의 학자들을 초청하였을 때 이제현은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만권당에 머물며 새로운 성리학 사조를 수용하였다. 충숙왕(忠肅王)과 공민왕(恭愍王) 시기에는 고려에서 인재 선발의 총책임을 맡아 과거를 주관하여 많은 문인들을 거느리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제현은 원의 정세 변동에 따라 고려 국왕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고려 왕조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토번(土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1323년(충숙왕 10)에 이제현은 원의 승상에게 글을 올려 충선왕의 귀환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같은 해 제2차 입성책동(立省策動)으로 고려가 존폐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는 입성론(立省論)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장문의 글로써 이를 저지하였다. 이후에도 심왕옹립운동(瀋王擁立運動)의 본격화로 입성론이 다시 제기되거나 조적(曹頔)의 난과 같은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마다 이제현은 고려 국왕들을 구명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위협적인 부원세력(附元勢力)에 맞서 국왕이 측근정치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이제현은 종종 정치적 위축을 경험하였다. 고려 국왕이 개혁 의지를 보일 때마다 적극 호응하였던 이제현은 개혁이 무산되고 권신(權臣)들이 전횡을 일삼는 시기에는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함으로써 각종 변란에 연루될 여지를 차단하였다. 고난의 시기 동안 이제현은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역옹패설』을 비롯한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겼다.

3 ‘역옹패설’이라 쓰고 ‘낙옹비설’이라 읽다

『역옹패설』은 이제현이 56세의 나이에 정계를 떠나 유유자적하며 저술한 책이다.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국내에서는 충혜왕(忠惠王)의 행실과 정책이 문제였다. 무뢰배를 가까이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충혜왕의 행동에 민심이 크게 떠났다. 국외에서는 고려 출신 공녀 기씨(奇氏)가 원에서 황태자를 출산하고 황후로 책봉되면서 고려 왕실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였다. 설상가상 기황후(奇皇后) 가문과 우호적 관계를 맺지 못하였던 충혜왕은 점차 원 조정과의 관계에서 그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이제현의 문집 『익재난고』에 수록된 그의 연보에는 충혜왕의 복위 직후 “소인이 더욱 치열하게 날뛰므로, 공이 자취를 숨기고 나아가지 않았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유신(儒臣) 세력을 대표하던 이제현이 충혜왕 측근들의 견제를 피하여 스스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기황후 가문을 중심으로 부원세력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었던 상황 또한 이제현이 앞으로의 위기를 직감하고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데 일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옹패설』 전집의 서문에서 이제현은 “여름비가 여러 달 계속되어 두문불출하였는데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조차 없어 번민을 떨칠 수 없었다”고 집필 경위를 설명하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이제현이 외로움과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이제현은 ‘역옹패설’을 ‘낙옹비설’로 읽어달라고 당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역(櫟)’은 나무를 나타내는 ‘목(木)’과 즐거움을 뜻하는 ‘낙(樂)’이 조합된 한자로, 파자(破字)하였을 때 ‘나무의 즐거움’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재목으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나무가 벌목의 위험에서 벗어나 즐겁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즐거움’에 방점을 두어 ‘낙’으로 읽기를 권한 것이다. ‘패(稗)’는 잡초 피를 의미하는데, 곡물을 뜻하는 ‘화(禾)’와 천박함을 뜻하는 ‘비(卑)’가 조합되었기에 이제현은 겸손하게 후자에 방점을 두어 ‘비’로 읽기를 권하였다.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자조, 뛰어난 문장력을 스스로 낮추어 평가하는 겸양을 이제현의 서문에서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4 구속되지 않은 형식, 방대한 이야기

『역옹패설』은 문인들의 시와 산문을 담는 일반 문집과 성격이 다르다. 그 안에는 고려의 역사와 제도, 경전 또는 타인의 시문 등에 대한 이제현의 비평문이 실려 있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채집되어 있다. 이에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역옹패설』의 장르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게 오고 갔다.

과거에는 “무료함과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 가는 대로 기록하였다”는 『역옹패설』 후집의 서문에 근거하여 『역옹패설』을 수필 장르로 분류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서구의 문학 장르를 한문학에 적용하는 데 무리가 있으며 수필과 같이 이제현의 개인적 감흥이나 정서가 『역옹패설』에서 주가 되지는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른 대안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역옹패설』을 한문학 장르인 필기문학(筆記文學)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필기는 필원잡기(筆苑雜記)의 준말로, 자유롭게 쓴다는 점에서 형식상 수필과 비슷하지만 내용상 정치·경제·문화전반·자연현상 등 수필보다 광범한 주제를 다룬다. 다른 한편, 『역옹패설』을 패관문학으로 분류하는 견해도 보편적이다. 패관문학은 가담항설(街談巷說), 즉 세간의 소문을 다룬 문학 장르이다. 실제 『역옹패설』은 문인을 비롯한 지배층의 일화 또는 항간의 우스운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어 패관문학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역옹패설』은 전집 두 권과 후집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집 권1에서는 고려 왕실의 세계와 종묘 배향, 과거제, 외교에서의 법도 등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고, 권2에서는 지배층의 일상 또는 관료로서의 활동에 얽힌 각종 일화와 우스운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후집은 대체로 문인들의 시 및 각 시에 대한 이제현의 비평, 경전·비문의 특정 문구에 대한 이제현의 해석과 고증을 담았다.

후집의 서문에 따르면, 자유분방한 형식과 주제가 돋보이는, 비꼬아서 보면 일관성을 상실한 『역옹패설』의 체제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비판을 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집에서는 고려 왕실의 세계 및 명망 높은 공경(公卿)의 언행으로 시작하였다가 도리어 우스운 이야기로 끝을 맺더니 후집에서는 아예 장구(章句) 다듬기로 대부분의 내용을 채워 줏대가 없다는 비판을 받자 이제현은 “무료함과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 가는 대로 기록하였다. 실없는 이야기가 있다 한들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되받아쳤다. 그리고 자신의 글은 패설일 뿐임을 다시 한 번 강변하였다.

저자 이제현은 이처럼 겸손한 태도로 『역옹패설』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였으나, 현대에 와서 『역옹패설』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문학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한국 고전문학의 외연을 확장한 걸작이다. 역사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제도사·지성사 등 다방면에서 곱씹어볼 만한 주제를 던져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이제현은 ‘역옹’이라는 자조적인 호로써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의 글을 ‘패설’로 비하하였기에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줏대 없다는 주변의 평판을 익살스러운 대응으로 넘기면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주제의 제한에 갇히지 않은 채 솔직한 생각을 서술하였기 때문에 『역옹패설』은 고려말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제현의 내면을 그대로 담아내는 거울 같은 작품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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